왕빙은 <
사령혼>(2018)을 오랜 시간동안 비밀리에 촬영하였고 그런 다음 기습적으로 공개하였다. 여기에 이유가 있다. 이제는 알려진 대로 이 영화는 1957년에 시작된 대약진 기간 동안 우파분자로 지목되어 간쑤성 고비사막에 있는 자볜거우(夾邊溝)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사상교정을 이유로 부역하고 돌아온 다음 침묵을 강요당한 ‘인민’들을 인터뷰한 영화이다. 중국 공산당은 등 샤오핑 이후 문화혁명에 대해서는 당의 오류임을 인정했지만 그러나 사실상 파국으로 끝난 대약진 시기에 대해서는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아직도 대약진 기간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은 사회주의 중국 인민 공화국에서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중국에서 공산당이 허락하지 않는 행위를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홍콩에서 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인민’들은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카메라 앞에서 말했다. 비공식 기록에 따르면 저볜거우 강제노동수용소에서만 3년 동안 3만 5천명이었던 수용소 우파분자들 중에서 돌아온 사람은 6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강제노동수용소가 중국 전역에 있었다. 대약진 운동 중에 굶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실종되거나, 하여튼 죽은 사람의 숫자는 4,7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나는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왕빙은 다른 영화를 찍으면서 내내 이들을 만나러 다녔다. 왕빙에 따르면 촬영분량은 600시간에 이르고 만난 사람은 120명에 달한다고 한다. <사령혼>은 그 중에서 15명에 관한 인터뷰를 담고 있다. 상영시간은 8시간 16분이다. 그런데 왕빙은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사령혼>은 저볜거우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돌아온 사람들에 관한 삼부작 중에서 첫 번째 영화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 영화를 기다렸다.
그래서 <
미(美)는 자유에 있다>(2018)가 당연히 <사령혼> 연작의 두 번째 영화라고 생각했다. 내가 틀렸다. 이 영화는 왕빙이 미국에 가서 라스베가스 근처에 살고 있는 중국인 화가 가오얼타이(高爾泰)을 만나 인터뷰한 다큐멘터리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왕빙은 예술가들을 인터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가도, 시인도, 음악가도, 대중예술가도, 어떤 영화감독도 만나지 않았다. 왕빙은 노동자들, 농부들, 어란 아이들, 정신병자들, 버림받은 이들, 그저 ‘인민’들만을 만났다. 그런데 갑자기 화가를 만났다. 두 번째 이유는 왕빙은 중국 바깥에 머무는 중국인들을 만난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외국인도 만나지 않았다. 아니, 그 자신이 외국에 누군가를 찍기 위해 나간 적이 없다. 그는 항상 중국을 돌아다니면서 거기서 찍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오얼타이를 만나기 위해서 미국 라스베가스에 갔다. 내가 왜 왕빙이 그를 찍기 위해서 미국에 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를 본 다음이다.
먼저 가오얼타이를 소개해야 할 것 같다. 가오얼타이는 화가이지만 그는 미학을 연구한 학자이며 철학을 강의한 선생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바이두(百度, www.baidu.com)의 소개에 따르면 산문수필가이며, 서예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왕빙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가오얼타이는 1935년 장쑤성(江蘇省) 가오춘현(高淳縣)에서 태어나 수쪼우(蘇洲)사범대학에서 공부했다. 1957년 7월 잡지 ‘새로운 건설(新建設)에 ’미를 논하다(論美)‘를 발표하였다. 이 글이 문제가 되었다. 가오얼타이는 지금도 변증법에 기반을 둔 이 미학에 관한 논문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오얼타이는 여기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는 반혁명분자로 분류되었고, 사상재교육을 위해 자볜거우 강제노동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가오얼타이가 간신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1959년 우여곡절 끝에 간쑤성 박물관으로 재배치되었고, 거기서 둔황(敦煌) 문화유적 복원사업에 복무하였다. 1962년 봄, 자볜거우 강제노동수용소가 폐쇄되면서 가오얼타이는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복권된 것은 아니다. 19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가오얼타이는 다시 우파분자로 고발조치 되었다. 그는 하방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첫 번째 아내가 죽었다. 가오얼타이가 학교로 돌아온 것은 1977년 문화혁명이 끝난 다음이다. 그 이듬해 란쩌우(蘭州)시범대학에 교편을 잡았고 거기서 <미는 자유의 상징이다(美是自由的象徵)>을 썼다. 이 책은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히는 미학에 관한 저술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9년 천안문 사태와 관련하여 가오얼타이는 136일 동안 감호소에 구금되었다. 가오얼타이는 1992년 그의 두 번째 아내와 함께 홍콩을 거쳐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그의 딸은 중국에 남았고 미국에서 그녀의 부고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 소개를 읽고 나면 왕빙이 왜 가오얼타이를 만나기 위해 미국까지 가야만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빙은 가오얼타이가 화가이거나 유명한 미학 학자여서가 아니다. 그는 우리가 <사령혼>에 이어서 만나는 16번째 자볜거우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다. 아니, 17번째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왕빙의 두 번째 영화 <펑밍; 중국여인의 연대기>에서 만난 허펑밍(和鳳鳴) 할머니도 (그 영화를 볼 때는 미처 셈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게 된 것인데) 자볜거우에서의 경험을 안고 살아 돌아온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미(美)는 자유에 있다>는 상영시간이 5시간 25분이지만 단 한 번도 가오얼타이의 그림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인터뷰가 내내 그의 작업실 바로 옆방에서 진행되는데도 그러하다. 그리고 왕빙은 단 한 번도 가오얼타이의 창작의 과정, 그의 예술작업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쉬지 않고 오직 자볜거우에서의 경험에 대해서만 물어보고 또 물어본다. 그렇다면 왜 가오얼타이를 <사령혼>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 단지 그 분량이 길기 때문에? 내 생각에 그건 (마오쩌둥의 분류에 따르면) 가오얼타이는 지식분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사령혼>에서 단 한 명도 지식분자들을 만나지 못했다. 가오얼타이는 <미적 각성>과 <미적 저항>이란 두 권의 저서가 지금도 중국 내에서 예술가들과 아카데미에서 읽히는 존경받는 저자이다.
왕빙은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그의 방법을 바꾸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경청(敬聽)의 미학이라고 불러야 할 만한 방법으로 듣고 또 듣는다. 왕빙은 거의 질문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영화에 그가 질문하는 순간을 남겨놓지 않았다. 일단 가오얼타이가 대답을 시작하면 그 대답의 시간 안으로 왕빙은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카메라를 믿고 오로지 대답하는 가오얼타이를 담는 일에 집중한다. 거기에는 음악도 없고, 별다른 카메라의 위치 변화도 없고, 그렇다고 구도를 바꾸지도 않는다. 다만 두 대의 카메라를 사용해서 이따금 이 카메라로부터 저 카메라에로 옮겨갈 따름이다. 이때 이 인터뷰를 담는 것은 왜 그토록 긴급하고 중요한가. 첫째, 대약진 시대에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한 어떤 이미지도 없다. 게다가 중앙정부의 자료들은 대부분 아직도 접근이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또한 (역사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그 신뢰도가 매우 낮은 상태의 보고서들이다. 심지어 지방 성(省)과 현(縣)의 자료들은 그것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훈련받은 공무원들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체계적이지 않았고 일부 수치들은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일부 수치를 멋대로 수정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거기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둘째, 그런데 그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용기를 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왕빙은 서둘렀지만 가끔 인터뷰가 끝난 다음 몇 달 뒤에 장례식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사령혼>에 그런 순간들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왕빙의 영화들을 단지 역사적 증언의 가치 때문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인가. 만일 그게 전부라면 이 영화들의 가치에 대해서는 우리보다는 역사학자들의 손에 맡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바로 여기가 우리들의 출발점이다. 우리들은 왕빙의 작업 과정에서 영화가 증언을 듣는 순간, 증인과 만나는 자리. 증언을 들으면서 증인의 증인이 되는 영화의 자리를 다시 물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영화는 자기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을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왕빙의 영화를 보면서 배움을 구하는 것이다. 고다르는 1944년 아우슈비츠에 영화가 없었기 때문에 영화가 죽었다, 라고 말했다. 정확하게 같은 의미에서 왕빙은 영화가 1957년 자볜거우에 없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영화의 책임을 물어보는 중이다. 접근 불가능했던 것들에게 영화가 다가가서 그들에게 증언을 할 기회를 준다는 것은 단지 기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 있던 역사의 심연에서 영화가 하나의 섬광 같은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때 영화는 자기의 존재를 역사 속에서 증명해낼 것이다. 그렇게 영화의 죽음을 한 번 더 선언하지 않기 위해서 왕빙은 생존자들의 말을 영화에 담기 위해 그들 곁에 있는 것이다. 영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네,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