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워 바디 한가람, 2019

by.듀나(영화평론가) 2019-11-29조회 11,824
아워바디 스틸
올해도 10편의 영화를 뽑았는데, 유감스럽게도 빈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벌새>는 나에게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부산 영화제에서 먼저 본 다른 필자들이 이미 작년 리스트에 올리는 바람에 올해 리스트에서는 누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몇몇 필자들의 올해 리스트엔 여전히 이 영화가 있다! 아, 다들 무시하고 버텼나보다.) 더 아쉬운 영화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셀린 사아마, 2019)이다. 영상자료원이 준 진짜 진짜 진짜 최종 마감일이 11월 8일.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내가 이 영화를 본 건 11월 9일. 어쩔 수가 있나. 안 본 영화를 미리 리스트에 올릴 수는 없다.

언제나처럼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일단 올해는 한국 영화를 많이 넣었다. <우리집>, <아워 바디> 그리고 <벌새>(!)는 올해 극장에서 상영한 영화 중 가장 내 뇌 속에 오래 남았던 영화들이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2019년에 나온 영화 중 가장 흉악하게 재미있는 작품일 것이다. 사악한 즐거움은 <더 페이버릿>도 만만치 않다. 극도로 개인적이고 거의 기이하기까지 한 특별한 개인사를 냉전시대 역사로 보편화시킨 심술궂은 영화 <콜드 워>도 있다. 리미티드 시리즈인 <믿을 수 없는 이야기>와 <체르노빌>은 영화와는 다른, 텔레비전 매체 고유의 스토리텔링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경계선>, <어스>, <미드소마>는 판타지와 호러 영역에 속하는데, 여기엔 내 취향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지만, 우린 이 영역의 영화들이 슬슬 게토에서 벗어나 진지한 목소리로 인정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워 바디>(한가람, 2019) 이야기를 하자. 이 영화가 나에게 올해 최고의 영화였느냐. 그건 아니다. 하지만 가장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 반응을 뒤에서 구경하는 것도 그만큼이나 재미있었다. 굉장히 심술궂은 재미를 방사능처럼 발산하는 영화이다. 여담이지만 올해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 대부분은 심술궂은 표정의 여자를 한 명 이상 품고 있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자영도 예외는 아니다.
 

설정만 보면 건전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시험을 포기해버린 8년차 행정고시생인 자영은 어느 날 동네에서 달리기를 하는 현주라는 여자를 만난다. 현주의 모습에 매료된 자영은 달리기를 시작하고 현주의 친구가 된다. 자영은 서서히 건강을 되찾고 친구가 소개해 준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인턴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열심히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으면 정직원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

이 정도면 거의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바탕을 둔 생활 체육 홍보 영화처럼 보인다. 자영과 현주의 관계는 로맨스의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건전해보인다. 운동을 하면 건강도 얻고 사랑도 얻고 취직도 할 수 있다니 이렇게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영화는 그 방향으로 안 간다. 사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 도 원래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베날리스가 한 말은 기껏해야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까지 깃들기를 기도하라’ 정도였다. 육체의 건강과 질병은 분명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건강한 몸의 영향이 건전한 방향으로만 향하는지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육체가 정신의 건전함이 뭔지 어떻게 아는가? 군인과 검투사의 나라에 살았던 풍자 시인이 설마 그 자명한 사실을 몰랐을까.

<아워 바디>는 유베날리스의 회의적인 관점을 충실하게 따른다. 영화는 자영에게 건강한 몸을 준다. 하지만 8년의 고시 생활 중 피폐해진 정신까지 치료하지는 않는다. 이 뒤틀릴 대로 뒤틀린 정신이 운동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면 어떻게 될까?

슬슬 <위험한 독신녀>의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토론토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몇몇 평론가들이 이 두 영화를 비교했었다. 다행히도 자영은 그 방향으로는 안 간다. 덜 뒤틀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뒤틀림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더 나쁜 방향으로 진행되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만 자영이 현주의 몸에 티끌만큼이라도 상처를 내는 건 여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아워 바디>는 현주, 정확히 말하면 현주의 몸에 대한 자영의 욕망에 대한 영화이다. 단지 그 욕망이 어떤 의미인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데에서 이 영화의 재미가 있다. 자영과 현주는 당연히 모르고 관객들도 모르고 이들의 창조주인 한가람도 확신하지는 못하는 거 같다.

이해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흐름은 있다. <아워 바디>가 멀쩡하고 건강한 영화였다면 자영과 현주는 섹스를 했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의 구조를 보면 둘이 만나는 순간부터 그게 유일하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워 바디>의 드라마는 영화가 이 당연하기 짝이 없는 지점으로 가는 길에서 끊임없이 일탈하다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자영이 이성애자이거나 이성애자로 정체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영은 현주의 몸에 집요하게 집착하고 있지만 이것을 성애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를 선망으로 정의하고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까) 현주를 모방하려는 시도까지는 정상이다. 이는 얼마든지 건강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길로 안 간다.
 

영화 중반에 현주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면서 자영은 죄의식에 휩싸인다. 이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영에게 불건강한 죄의식을 제공해주기엔 충분하다. 자영은 현주에게 정말 드물게 다가간 ‘여자친구’였다. 현주는 남의 시선을 받기 싫어 한동안 런닝 머신만 뛰었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가 아닌 내면을 읽어주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만든 ‘여자친구’가 지금까지 만난 어떤 남자들보다 자신의 몸과 외모에만 집착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아워 바디>가 두 사람이 나누는 섹스와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 역시 건강한 진행이 가능했다. 아름다운 몸에 대한 사랑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두 사람이 이성애자여도 상대방과 자신의 몸을 사랑하며 같이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없다. <아워 바디>의 작은 세계에서 이성애는 모든 건강한 전개를 막는다. 그러고보니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멀쩡하고 건강한 섹스를 나눈 사람들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과 엘로이즈라는 게 생각난다. 

<아워 바디>에 대한 반응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의 섹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영이 살아있는 다른 사람과 나누는 섹스는 매력적인 구석이 단 하나도 없고 대부분 불쾌하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전에 나눈 마지막 섹스는 비루하기 짝이 없다. 현주의 죽음 이후 달리기 모임의 남자와 한 섹스는 남자의 자기 도취와 그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자영 때문에 공허하다. 직장상사인 중년 남자와 나눈 섹스는 문장 자체가 불쾌한 이유를 품고 있다. <아워 바디>를 싫어하는 몇몇 관객들은 이 영화를 ‘중년남자와 섹스하는 영화’라고 부른다. 마치 젊은 여자가 중년 남자와 하는 섹스가 한국 영화에서 흔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고보면 마지막 섹스에서 영화는 이 상황이 얼마나 불쾌한지 인식하게 하는 뜻밖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관객들이 이 영화의 섹스신을 싫어하는 이유는 동성애 기반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고 이성애 기반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다. 자영과 현주의 관계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은 이성애 섹스가 지겨울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그리는 모든 이성애 섹스의 환멸에 찬 묘사가 더 신경 쓰일 것이다. 보다보면 숨이 막힌다. 주인공은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믿는데 이성애엔 답이 없다. 그리고 다들 질겁하는 마지막 섹스는 따지고 보면 자영이 할 수 있는 가장 동성애에 가까운 섹스이다. 자영이 현주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욕망을 대신 실천한 것이니까. 이를 통해 자영과 현주는 한 몸이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현주가 자영에게 한 말들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영은 현주의 내면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현주가 정말 이성애자인지도, 자영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자영이 뒤늦게 참회하며 스스로 재구성한 현주는 몇몇 의미없는 단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허구에 불과하다. 자영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식의 브레이크는 걸리지 않는다. 아, 어쩔 수 없지. 우리의 몸과 정신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욕망은 결코 온전하게 납득이 가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아워 바디>는 엄청나게 심술궂다. 종종 심술궂기로는 만만치 않은 <기생충>을 능가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모든 교훈은 파괴되고 두 주인공과 관객의 욕망은 단 하나도 실현되지 않으며 이들이 가는 길은 최악의 모양으로 배배 꼬여있다. 정말로 성격 안 좋은 이야기꾼이 킬킬 웃으면서 만들었을 것 같은 영화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아워 바디>는 우리가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처음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욕망의 사각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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