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독 배우들의 육체가 활동하거나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이 그 영화를 지정한다는 느낌을 받은 영화들이 많았다. 배우의 몸이 빚어내는 고요하거나 육중한 리듬, 마찰하거나 돌파하는 신체가 지녔던 파열음의 강도, 장르와 무관하게 육신의 움직임에서 비롯된 우스꽝스럽거나 숭고한 제스처가 우리를 압도하는 장면을 통해 영화들이 지금 무엇에 집중하고 있으며 결국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를 찾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호아킨 피닉스의 둔탁한 어깨가 거친 호흡을 따라 오르내린다. 폭력으로 점철된 유년 시절과 떨쳐버릴 수 없는 전장의 기억, 죽음의 공포는 온몸에 난 흉터에 새겨졌고, 욱신거리는 어깨를 감싸고 앉아 있는 그의 등은 고통을 즉자적으로 지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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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는 트라우마를 짊어진 피닉스의 육체가 매번 스크린이라는 면에 부딪히면서 우리를 향해 밀고 나오는 과정으로 보인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사뿐한 발걸음과 우아한 손짓은 공기보다 가벼워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유령처럼 집안을 부유한다. 그가 걷거나 앉는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동작에 이어 병상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다가 급기야 여인의 무르팍에 엎드리는 무력함으로의 이행은 한 사람의 삶이 사랑과 집착, 광기와 허무로 인해 허물어지는 순간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
팬텀 스레드>(2017)는 맹렬하게 달리는 자동차의 가속도로 인해 흔들리고 팽창하는 가시적인 세계와 스크린에서 서서히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쇠약한 몸짓의 대비를 통해 지독한 사랑의 파멸을 목도한다. 노래는 기막히게 잘 부르지만 잔악하고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카우보이는 영혼이 되어서도 노래를 부르며 하늘로 올라가 프레임 안을 떠나지 못하고, 사지가 절단되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청년의 신체는 아름다운 낭독 솜씨에도 불구하고 닭보다 못한 효율성 때문에 폐기처분된다. 온갖 풍파를 겪은 노인은 처진 뱃살과 늘어진 근육을 동원해서 끈덕지게 금광을 파헤친다. 땅을 파는 행위만으로 고단한 운명을 넘어서는 불멸의 순간이 제시되고, 유령마차의 탑승객과 같은 인물들이 안개 자욱한 집으로 들어서면 그들의 육체 또한 폐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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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의 노래>는 노래를 하고 사막을 횡단하고 이야기를 들을 사람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서부라는 장소보다 그곳에 머무는 다양한 신체들이 몰두하는 행동으로 인해 몹시 분주하고 재미나면서도 적막하고, 쓸쓸하면서도 장엄하다. 당당한 걸음으로 활보하는 톰 행크스와 머뭇거리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메릴 스트립의 보폭이 같아지던 순간은 <
더 포스트>(2017)에서 거대한 인쇄소로 들어오는 빛, 신문이 생산되는 과정, 정렬된 활자판과 문장으로 조합하는 행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숙련공들의 빈틈없는 노동과 마주하는 장면이다. <
풀잎들>(2017)에서 카페를 들어서고 나가는 배우들의 걸음걸이와 느긋한 정도, 골목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 쪼그리고 앉아 대야에 심긴 잎사귀를 바라보는 각자 다른 웅크림의 정도와 몸의 기울기는 끊임없이 말을 이어가고 엿듣고 기록하고 상상하는 공간에 지금, 이곳의 애처롭고도 스산한 삶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다큐멘터리의 카메라 앞에 선 육신은 시간의 흐름 안에 놓인 존재임을 매번 일깨워준다.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공간을 기억하는 행위는 타인의 말을 듣고 카메라에 담아내는 끈기와 인내, 마을과 사람들의 얼굴을 찾아다니면서 함께 걷는 발걸음, 혼령을 달래기 위해 헤매는 몸짓들이 된다.
왕빙의 <
사령혼>(2018)에서 감동적인 순간은 3부에 등장한다. 노인들이 앉아서 지난 삶을 증언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한 이 영화에서 한 노인이 자리를 벗어나 집 안을 돌아다닐 때 꼿꼿한 노인들의 자세와 말이 흐트러지게 된다.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이나 죽음 직전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의 시간과 무관한 것처럼, 어쩔 줄 모르는 노인의 서성거림으로 인해 <사령혼>은 진혼에 멈추지 않게 된다. 원한조차 비켜 나갈 것처럼 음산하고 무시무시한 땅, 수습되지 못한 채 뒹굴고 있는 인골보다 서슬 퍼런 것은 증언자가 누구이건 동일한 경험과 기억으로 육화된 증언의 내용이다. 흐트러짐 없이 카메라를 향해 앉아 있던 그들이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엔 어김없이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변해있거나 사망했다는 자막이 등장할 때, 우리는 그들의 청청하던 눈빛과 품위를 잃지 않은 자세를 떠올리게 된다.
이 모든 영화들이 각별하지만, <
녹차의 중력>(2018)과 <
백두 번째 구름>(2018)에서 발견한
임권택의 손과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에 등장하는 바르다의 발은 낯설기 때문에 끈질기게 떠오르는 신체기관이 되어버렸다. 백 두 편의 영화를 만든 임권택의 손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바르다의 손은 그녀의 영화에 종종 등장했지만, 발이 스크린을 채운 것은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그녀의 발 사진과 어떻게 놓아도 불편해 보이는 임권택의 깍지 낀 손을 보면서 노년의 예술가가 창조한 세계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넘어서는 감동을 느낀 것이다. 영화에 입문하게 된 전설적인 계기나 오랜 시간 영화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겪었던 체험의 위대함, 명민하고 섬세하거나 과격할 만큼 고집스레 지켜온 연출의 태도와 그들의 손과 발의 활동을 연관 지어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더욱이 바르다는 여전히 카메라를 지닌 채 활동하고, 임권택은 소강상태에 빠진 시간을 견디는 중이라는 사실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녹차의 중력>은 영화감독 임권택에서 출발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임권택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시간을 버텨 내는가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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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길어올리기>(2011)를 마치고 <
화장>(2015)의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약 4년 남짓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학교에서 강의하고,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김동호의 <
주리>(2012) 촬영현장을 찾는 것으로 집약된다. 임권택에게 작용되는 강제성이 이 시간의 핵심이고, <녹차의 중력>은 생산하지 못하는 무위의 시간은 그저 버틸 도리밖에 없음을 체득한 임권택의 제스처와 손, 얼굴을 떠나지 않는다.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시간을 견뎌내는 임권택과 그의 곁에서 그의 모든 것을 찍겠다는 정성일 모두가 무력함이나 조바심을 잊는 사람들처럼 무심하게 제자리를 지킨다. 기차 창에 기댄 임권택의 오랜 잠보다 기차 대합실에서 커피를 만지작거리는 손이나 세례를 받을 때 어정쩡하게 깍지를 낀 손에서 현재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도래하지 않은 영화의 행위를 상상하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그는 잠에서 이미 영화를 만드는 행위에 닿아 있을지 모르고,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장의 모습을 그의 손을 통해 불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의 활동은 몇 신에서 두드러지는데, 첫 번째가 녹차를 대접하기 위한 행동이고 둘째가 세례를 받는 장면이다. <녹차의 중력>은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에서 시작한다. 노래 ‘봉선화’가 흘러나오는 프롤로그에 이어 등장하는 것은 녹차를 대접하는 임권택의 모습이다. 그의 손은 어김없이 떨리고 있고, 그 때문에 달그락거리는 다기의 소리는 녹차를 덜어내거나 물 따르는 소리, 주전자를 탁자에 놓는 소리보다 강렬하게 들린다. 그 공간은 소리의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떨리는 손으로 인한 소리들과 고요함의 이어짐이 곧 말수가 적고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임권택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자, 이 영화가 처음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임권택이란 사람의 시간이다. 특히 세례식은 고단할 정도로 반복되는 제식 행위(앉고 일어서고, 같은 구절을 반복적으로 낭송하고, 줄지어 서고, 감사를 표하고, 인사한다.)에 피곤함을 느꼈을 법한 임권택의 무심한 표정보다 가지런히 손을 모으지 못한 그의 구부정한 손가락 마디가 먼저 눈에 띈다. 또 그보다 연배가 낮은 대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행위나 영성체를 받기 위해 길게 줄지어 서서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잠재우고 있는 그의 우물쭈물한 자세가 그의 시간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아내가 권유했을 것 같은 예식은 모종의 강제성을 띠고 있지만, 그는 불편하고 어색한 감정을 애써 숨기는 것 같다. 예식 내내 손가락을 풀면 큰일 나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깍지를 끼고 있던 그의 손에 비해 세례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뒷짐을 진 그의 손이 오히려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정성일은 두 손이 행하는 동작을 보여줌으로써 평소 같으면 집과 영화 촬영장 외의 장소를 찾을 일 없는 그의 예외적인 순간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마지막으로 <주리> 현장을 찾은 임권택의 모습이다. 이 현장에는 감독이 넘쳐나도록 많고 카메라도 많다. 연기하는 배우나 조감독도 감독들이고, 김형구의 카메라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카메라, 정성일의 카메라까지 현장을 기록하는 중이다. 하지만 임권택의 카메라와 그의 배우들과 그의 영화는 여기에 없다. 분주하고 복잡한 현장에서 연기를 한 후, 모니터를 보고 있는 김동호의 뒤편으로 임권택이 앉아 있다. 그는 상념에 잠겨 있거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거기 앉아 영화를 찍고 있는 다른 감독의 현장을 견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의 눈에 맺혀 있는 보이지 않는 영화를 가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임권택만 혼자 동떨어진 존재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그의 손마저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프레임 바깥에 있을 손을 상상하는 우리가 더 숙연하고 비통한 기분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에게 바르다의 손은 익숙하다. <
낭트의 자코>(1991)에서 자크 드미의 등을 따라 움직이거나 <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2000)에서 감자를 줍고 거대한 그림의 끝을 잡고 있거나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봤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이 직접 등장하지 않더라도 야위고 검버섯으로 덮인 드미의 손을 쓸어내리거나 옅어져 가는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무성한 수풀과 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카메라의 움직임에서 그녀의 손길을 가늠할 수 있다. <아녜스의 해변>(2008)에서 바닷가를 걷거나 뒷걸음으로 퐁데자르를 지나가는 것뿐 아니라 <다게레오 타입>(1976), <벽, 벽들>(1981) 등을 통해 자신이 살던 거리부터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이르는 장소를 무수히 걸었던 그녀의 행위를 떠올릴 수 있다. 그녀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로부터 쿠바, 이란, 미국을 오가는 동안 카메라에 담긴 풍경과 사람들의 얼굴과 행동들을 기록했고, 이 영화들은 타인을 만나기 위해 어디든 이동하는 그녀의 생생한 표정과 경쾌한 걸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도 이와 유사한 궤적을 보이지만, 몇 가지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녀가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진 것과 멈추어 서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녀가 걷는 행동이 조금씩 줄어든 만큼 차를 타고 이동하는 거리는 늘어가고, 동행자도 생겨났다. 사진작가 JR과 포토트럭을 타고 마을을 방문하고 주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거대한 사진으로 집의 외벽을 덮는 과정을 지켜본다. 또 JR은 바르다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한다. 휠체어를 타고 루브르 미술관을 활보하면서 그녀가 사랑하는 그림들을 보고 스위스에 살고 있는 고다르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한다. 활기와 웃음과 사소하고도 재미있는 수다로 가득 찬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처음엔 낯설다가 둘의 대화에 익숙해질 무렵, 바르다가 점점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그녀는 여전히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고, 카메라를 통해 누군가를 기억하거나 자신의 삶을 믿고 있는 타인들의 표정을 지켜본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더욱더 느려질 것이고, 계단을 다 오르지 못하고 멈춰 서게 될 것이다. JR은 그녀의 발과 강제로 확장된 눈의 사진을 기차에 붙임으로써 그녀의 온 생애에 깃든 행동을 기념하는 것 같다. 동공이 확장된 눈과 동그란 발가락은 자유롭고 거침없이 행했던 걸음과 봄과 들음을 위한 멈춤의 순간에 새겨진 오랜 시간의 흔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수술을 위해 찍은 눈은 바르다가 볼 수 없는 순간이고, 그녀의 맨발도 스스로 찍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모습이기 때문에 JR의 적극적인 행위가 개입되어야 한다. 게다가 거대한 크기로 인해 거대한 형상은 움직이는 기념비가 된다. 즉 JR이 바르다와 함께 하는 순간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는 방식이자, 선로를 따라 프랑스 곳곳을 활보할 발과 마주칠 사람들에게나, 영화를 통해 기차와 더불어 이동하는 바르다를 마주할 우리들에게도 각인될 표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