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엔 형제의 옴니버스 서부극 <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2018)를 구성하는 6개의 단편은 모든 죽음으로 끝맺는다. 정확히 말하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시신 이미지로 막을 내린다. 폭력의 장르의 원조인 서부극에서 죽음과 시신이 등장하는 건 물론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라는 희대의 영화광-유희자이가, 진지함과 심각함도 종종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로 바꿔놓은 당대 최고의 패러디 작가가, 이야기의 진행 과정에선 갖가지 시각적 언어적 유머를 전시하거나 애틋한 혹은 달콤한 약속을 예비하고도, 끝내 음울한 시신 이미지로 모든 이야기를 닫은 결정이 범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여느 영화를 말할 때처럼, 감독의 세상에 대한 비전이나 서사의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카우보이의 노래>의 죽음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코엔 형제처럼 서사적 필연성에 무관심한 감독도 드물다. 그들의 영화에서 하나의 영화적 기호는 대개 다른 영화적 기호를 불러내는 전조로 등장하며, 기호들의 연쇄는 서사적 연쇄라기보다 기표적 연쇄의 퍼포먼스에 가깝다. 예측할 수 없이 연쇄하는 기표들의 자유분방한 운동에서, 영화적 기호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겠지만,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서사적 연쇄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에게라면 종잡을 수 없거나 경박하거나 때로 불쾌한 것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의 재능은 영화적 요소들의 기표적 연쇄로부터 유희적 활력을 이끌어내는 점 자체에 있다기보다, 기표들의 소란스러운 연쇄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편의 영화를 매우 치밀하고 단단한 육체로 만들어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코엔 영화를 관람한 뒤, 우리는 대개 한바탕의 놀이 시간을 통과한 것처럼 느끼지만, 돌아보면 그곳엔 무언가 놀이의 퍼포먼스로 환원되지 않는 모종의 견고하고 아득한 실체가 버티고 있다고 간혹 느끼게 된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제목은 물론이고 존 포드 서부극의 아이콘인 모뉴먼트 밸리가 등장하는 첫 에피소드의 첫 장면, 그리고 이어서 말을 타고 등장하는 총잡이 카우보이라는 캐릭터에서 자신이 서부극임을 호들갑스럽게 강조한다. 물론 이 서부는 더 이상 고전기 서부극의 서부가 아니다. 서부극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기괴한 암석봉들이 산재한 이 장소의 형상이 익숙한데도 어딘지 낯선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코엔 형제가 우리를 이끌고 온, 이 서부는 어떤 서부인가.
고전기 서부극의 서부를 ‘그 서부’라 칭한다면, 이 서부는 그 서부의 모조이다. 이것은 이 서부가 촬영된 장소가 실제 모뉴먼트 밸리와 비슷하게 꾸며놓은 야외세트라는 뜻이 아니다. 실제 모뉴먼트 밸리에서 촬영되었다 해도, 이곳은 여전히 야외세트일 뿐이다. <
역마차Stagecoach>(존포드, 1939)에서 처음 등장한 모뉴먼트 밸리의 그 서부는 포드의 서부극에서뿐만 아니라 그때까지의 영화를 통틀어서도 처음 등장한 장소이며, 다른 나라의 관객은 물론 미국 관객들에게조차 완전히 낯선 장소였다. 그 서부에서 촬영된 영화의 서사가 비록 제작 시점보다 수십 년 전 과거의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따라서 당대의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도 현행적 장소로 설정된 건 아니긴 했지만, 그 독특하고 기괴한 장소의 형상이 영화에 최초로 새겨졌다는 점에서 그 장소는 1939년의 장소로서의 물질적 시원성이 있다.
그 서부와 이 서부 사이엔 최초와 그 이후의 시간적 서열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20세기 중후반, 원거리 통신과 교통수단에서 일어난 혁명은 지구상의 모든 곳을 가시화하고 접근 가능한 장소로 만들었다. 낭만적 상상력을 자극했던 저 너머의 장소가 사라진 뒤로, 그 서부도 사라졌다. 이제 모뉴먼트 밸리는 초월적 잠재성을 잃어버린, 오늘날 우리의 시각장에 갇힌 폐쇄공간이 되었다. 오늘의 서부극의 서부는 켈리 레이차트의 <
믹의 지름길Meek's cutoff>(켈리 레이차트, 2010)에서처럼 알레고리화된 정신적 공간으로 드러나거나, 코엔의 또 다른 서부극 <
더 브레이브True grit>(2010)에서처럼 확대되고 개방된 무대로 드러나거나 혹은 SF영화의 우주처럼 서부의 가상적 변주공간으로 드러난다.
코엔은 첫 장면에 모뉴먼트 밸리를 등장시키면서 이 서부의 모조성을 위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짓궂은 방식으로 강조한다. 기타 치며 노래하는 카우보이를 비추던 카메라는 갑자기 기타 내부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점(視點) 숏으로 바뀐다. 또한 카우보이의 노래가 듣는 위치에 따라 소리의 크기와 질감이 바뀌는 청점(聽點) 숏들을 몽타주한다. 이 시점과 청점 숏들은 당연히 특정 인물의 감각에 속할 수 없고(기타 안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객관적 숏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카메라의 존재와 이 장면의 인공성을 장난스럽게 노정하는 장치로밖에 볼 수 없다. 이곳은 지금 갖가지 촬영 장비가 들어서 있는 꾸며진 공간이며,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일종의 유희적 퍼포먼스가 될 것임을 이 숏들은 암시한다.
서사적 필연성에 무관심한 이야기의 중심 소재는 사건이 아니라 사고다. 사건과 사고는 벌어지는 일 자체가 아니라 서사에 맥락화되는 방식에 따라 구분된다. 사건은 내적 필연성을 지닌 것으로 새겨져 사건이 벌어지면 결코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사고는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것으로 제시되며 이전과 이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사건의 서사는 대개 불연속적 선형성으로 나타나며, 사고의 서사는 대개 대체에 의한 연속적인 순환구조 혹은 나선구조로 나타난다. 코엔식 기호놀이의 서사가 요청하는 건 당연하게도 기표들이 필연성에 흡수되지 않고 뛰어놀 수 있는 사고의 서사다. 사고의 우연성과 돌발성은 기표들의 활력의 동력원이 될 것이다. 관객을 노골적 모조의 서부에 초대한 코엔 형제는 고전기 서부극의 소재가 된 진중한 사건들을 돌발적이고 황당한 사고로 전환해 패러디의 난장을 상연한다. 이 난장의 활력과 민첩함 그리고 발작적 반전이 다음 장면을 전혀 예상할 수 없게 만들어, 보는 이의 넋을 빼놓는다.
<카우보이의 노래>의 여섯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잠재적 순환구조를 갖고 있다. 1편의 깝죽대던 카우보이 버스터는 또 다른 총잡이와의 결투로 갑작스레 죽는다. 새로운 총잡이 역시 언젠가 그렇게 죽을 것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피살자의 영혼이 살해자와 함께 노래하는 장면은 그들의 동일한 운명을 유머러스하게 암시한다. 2편의 실패한 은행 강도는 교수형 당할뻔하다 살아나지만 황당한 계기로 다시 목을 매달린다. 3편의 팔다리 없는 음유시인은 버림받은 뒤 ‘수학하는 닭’으로 대체되지만 명민한 닭 역시 언젠가 음유시인의 운명이 될 것이다. 음유시인과 닭을 끌고 겨울 들판을 통과하던 늙고 초라한 쇼맨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5편의 젊은 웨건마스터는 한 여인과 맺어져 정착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뻔했지만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패한다. 지나치게 과묵한 늙은 웨건마스터의 젊은 시절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이들의 나선적 순환의 삶의 끝은 모두 죽음이다. 그러니 마지막 에피소드의 좁은 포장마차 안에서 저마다 자신의 삶이 특별하다고 뽐내던 다섯 인물이 결국 공동묘지와도 같은 호텔 안으로 사라져가는 음울한 결말은 적절한 마침표다. 이 에피소드들에서 죽음은 장대하고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우연적 사고에 의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거나, 인물과 서사의 개별성과 관계없이 예정된 죽음이다.
바깥이 사라진 모조 서부는 박제된 유해와 고대의 형상이 보존된 유사박물관과도 같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이 폐쇄된 유사박물관에서 자기 죽음을 소극(笑劇)으로 재상연하는 유령들의 잔치 혹은 죽은 자들이 부르는 묘지의 발라드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톰 웨이츠가 늙은 금 채굴꾼으로 등장하는 네 번째 에피소드를 잊기 힘들다. 이 에피소드는 예외적이다. 무대는 야트막한 언덕의 나무들과 산에 둘러싸여 있고, 한가운데 냇물이 흐르며 수리부엉이와 사슴과 물고기가 한가롭게 거니는 아름다운 분지다. 노인은 곳곳에 구멍을 파다 마침내 금을 발견한다. 그 순간 비열한 젊은 도둑이 뒤에서 그를 쏘지만, 총알이 급소를 피하는 바람에 반격에 성공해 도둑을 죽인다. 노인은 황금이 나온 구덩이에 젊은 도둑의 시신을 밀어 넣고 유유히 떠난다. 부엉이와 사슴과 물고기도 돌아온다. 여섯 에피소드 중 유일한 승리의 이야기, 축복의 퍼포먼스다. 남다은의 표현대로 “죽음의 기운이 넘실대는 다른 에피소드와 달리... 모든 것들의 생명력을 경애”한다. (『필로』 5호)
이 예외성에는 다른 얼굴도 있는 것 같다. 다른 에피소드의 모조 서부들은 물리적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이 에피소드의 공간만 유일하게 바깥으로부터 구획된 물리적 한정 공간이다. 전자의 서부는 풀 한포기도 드문 황야이지만 이곳은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생명체가 광채를 발하는 풍요의 초원이다. 이곳은 어쩌면 폐쇄된 모조 서부가 잃어버린 바깥의 상상적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분지마저 서부의 인간이 침투해 상처 입힌다. 스스로도 상처 입었지만, 노인은 살아서 이 공간을 떠난다. 그가 떠나자 곧바로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돌아왔으므로 노인의 채굴과 획득과 살인은 이 아름다운 공간의 균형을 훼손하지 않는, 사건 아닌 사고일 뿐인가. 하지만, 노인과 함께 금을 향한 욕망도 살아나갔다. 그 탐욕은 앞으로도 또 다른 자연의 성지를 파헤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화사한 에피소드는 어쩌면 가장 불길한 예기인가. 물론 코엔은 어느 쪽으로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묘지 가운데 핀 꽃의 위안 혹은 위안을 가장한 묵시록. 코엔의 유희는 즐겁지만 은밀하게 우리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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