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플레이어 원 스티븐 스필버그, 2018

by.송경원(씨네21 기자) 2018-11-28조회 12,315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

아마도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2018)이 스티븐 스필버그를 대표할만한 걸작으로 기록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죠스JAWS>(1975)처럼 기념비적인 흥행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1977)처럼 지속적으로 영감을 미칠 만한 명장면을 남기지도 못했다. <쥬라기공원Jurassic park>(1993)처럼 CG를 활용한 리얼리티의 혁신을 가져오지도 않았고 <에이.아이.A.I.>(2001)처럼 장중한 호흡과 묵직한 걸음으로 현실과 영화 사이 어두운 그림자를 응시하기 시작한 영화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레디 플레이어 원>이야말로 자연인 스필버그와 대중문화의 아이콘 스필버그를 잇는 가교 같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오타쿠 소년이 세 개의 시련을 통과해 온라인 세계를 구원한 후 오프라인 세계를 잇는 가교가 되어 균형을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 영화는 스필버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압축 정리한 자서전이라고 생각했다. 스필버그는 인터뷰를 통해 “내 모든 영화들이 개인적인 것들이 녹아들긴 했지만, 나의 실제 삶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영화는 아직 만들지 않았고 앞으로도 만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소년 웨이드 와츠와 노인 제임스 할리데이는 분열된 자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스필버그의 과거와 현재를 대변한다. 

전제(혹은 도망갈 길)를 하나 미리 깔아두겠다. 현재진행형인 감독의 행보를 결정된 감독론으로 정리하는 건 의미 없는,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작업인지라 단지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한 보조기구 정도로나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행적을 한 줄 서사로 정리하는 건 꽤 재미있는 작업이고, 한편으론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한다. 할리우드 산업의 총아로 선택되었고 적극적인 탐험가를 거쳐 원숙미까지 더해가는 거장의 길이라면 더욱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2000년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민한 제작자와 할리우드 클래식 최후의 수호자라는 위상을 동시에 수행 중인 것처럼 보인다. 두 영역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평행 우주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는데 오직 스티븐 스필버그만이 홀로 인과의 법칙에서 자유로운 양 양쪽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요컨대 할리우드에는 두 명의 스필버그가 존재한다. 그렇게 믿어져 왔다.

진짜 그럴까. 정말 두 명의 서로 다른 스필버그가 있는 것일까. 스필버그는 한쪽에선 블록버스터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사람으로서 대중영화의 최전선에서 스펙터클이라는 마법을 휘두르고, 다른 한쪽은 할리우드 시네마 최후의 보루로서 원숙미 넘치는 성찰을 낮은 목소리로 설파하고 있는 중일까. 그는 후자를 바라면서도 상업적인 판단하에 이상을 누르고 대중이라는 모호한 속성과 종종 타협해왔던 것일까. 걸작과 범작, 킬링타임용 영화까지 손을 뻗친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를 납득하기 위해 대신 변명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70년대의 쇼크와 혁신, 80년대의 보편타당한 가족 드라마, 90년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성장기로 변화의 과정을 구획 짓고 연대기로 정돈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스필버그가 내놓은 다종다양한 영화들을 한 줄기로 꿰어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의 행보를 둘로 찢어놓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두 명의 스필버그를 필요로 한 건 관객이 아니라 평단의 입이다. 굳이 양립할 수 없는 우주 사이의 교차점을 탐색하는 것보단 그편이 훨씬 선명하고 손쉽다.  

레디 플레이어원 스틸

<레디 플레이어 원>은 두 명의 스필버그로 분리해 접근해도 미적지근하다. 순수하게 엔터테인먼트를 강조한 프로젝트로 봤을 때 <레디 플레이어 원>의 심도는 미흡하다. 게임에 대한 영화 속 이해는 초보적인 수준이고 가상현실의 묘사 역시 익히 보아왔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원작인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영화에 맞춰 변형된 몇몇 장면들에 대해 디지털, 게임 서사, 가상현실, 무엇보다 오타쿠 문화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는 묘사라며 불만을 토로한다면 온전히 변호할 수 없을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관은 소위 말하는 ‘덕질’이 능력이 되는 은밀한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다. 천재 게임 개발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일런스)는 가상현실게임 오아시스의 소유권을 걸고 세 가지 시련을 부여한다.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영화의 대사까지 통째로 암기할 줄 아는 덕질이 필요하지만, 스필버그를 이를 ‘현실과 균형을 맞추는 일’로 타협하고 이른바 ‘착하고 상식적인’ 주인공에게 힘을 실어준다. 적당한 타협. 또는 숱한 영화에서 봐왔던 익숙한 결말. 게임을 무대로 하되 비디오 게임의 탄생 시기인 1980년대 대중문화를 원전으로 내세움으로써 이른바 상업 드라마적으로 보편타당한 해답을 내놓는 것이다. 오타쿠의 시선에서 보자면 이 영화가 건드리고 지나가는 이스터에그들은 한없이 가볍고 처음 본 사람도 납득 가능할 만큼 무난하다. 

포스터들

반대로 2000년 이후 스필버그의 묵직한 연출에 찬사를 보내던 이들의 입장에서 봐도 <레디 플레이어 원>의 난감한 영화다. <A.I>, <우주전쟁War of the worlds>(2005), <워 호스War horse>(2011), <스파이 브릿지Bridge of spies>(2015)의 진지한 통찰은 간데없고 사물의 어둠을 응시하고 현실과 재현의 거리를 고민하던 얼룩들도 깔끔하게 지워져 있다. 미성숙한 아이의 신기한 장난감처럼 자신이 사랑한 대중문화를 유희와 오락의 관점에서 쌓아 올렸을 따름이다. 이 거창하고 어딘지 낡아 보이기까지 한 놀이기구는 관점에 따라선 거의 퇴행적인 영화처럼 보일 지경이다. 어떻게든 스필버그를 이해하고 싶은 이들은 엔터테인먼트를 목표로 8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과 향수를 모은 오마주 정도로 납득할지도 모르겠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스필버그를 한 방향, 한 가지 길로 규정지을 때 양쪽 모두를 충족시키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결과에 도달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레디 플레이어 원>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어정쩡한 면모 때문이다. 

어정쩡함이란 단어가 이상하다면 달리 표현하겠다. 이건 분리된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할리데이는 최후의 시련을 통과한 웨이드에게 오아시스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계약서를 준다. 실은 숨겨진 테스트였기에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은 웨이드는 그제야 진짜 에그를 얻는다. 스필버그도 마찬가지다. 그는 항상 두 가지 길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아왔다. 예술과 상업, 영화와 현실, 리얼과 리얼리티. 스필버그의 개별영화들을 양 갈래 길로 분류하기 시작하면 그의 행보는 분열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며 어쩌면 스필버그는 한 번도 무언가를 구분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다. 스필버그에게 영화란 무엇일까. 반드시 라고 하긴 어렵지만 ‘작가’로 칭송받는 감독들의 작업은 대개 연역적이다. 대다수 작가들에겐 세계와 영화과 관계 맺는 이상적인 형태가 있다. 무릇 작가라면 그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영화를 두드리며 구도의 길을 걷는다. 반면 스필버그가 영화를 체험하고 구축해나간 방식은 철저히 귀납적이다. 그는 그때그때 자신이 흥미롭게 즐긴 대상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소화시켜 표현의 영토를 넓혀 왔다. 

스필버그는 탐욕스러운 모험자다. 재미, 호기심, 즐거움을 최우선에 두는 소년은 미지의 분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도전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한때는 도전과 개척의 대상이었을 영화에 터를 잡은 뒤 스필버그는 모든 경험들을 영화라는 무대 위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슈가랜드 특급The sugarland express>(1974)을 연출했던 스필버그는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들에 매료되어 그 시적 리듬을 자연스레 흡수했고, <이티E.T.>(1982)에는 각종 특수효과의 상상력과 마술적인 표현을 마음껏 뽐냈다. <쥬라기 공원>(1993)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의 지각적 리얼리티를 영화 안에 끌어들였다. 그 결과 “디지털 시대는 어떤 장면도 더 이상 경이롭지 않게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고 그런 점에서 나 역시 유죄”라고 스스로 고백하면서도 새로운 표현방식과 전통적인(익숙한) 영화를 접목시키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스필버그의 극장에는 때로 할리우드 고전 영화들이 상영되고 때로는 스펙터클의 도배되었다가 어떨 땐 새로운 기술 시연의 장이 되기도 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 선택한 새로운 장난감은 가상현실 게임이다. 

레디 플레이어원 스틸

<레디 플레이어 원>을 어정쩡한 범작에서 스필버그의 코어에 접속하는 중요한 열쇠로 승화시키는 대사가 있다. 할리데이는 최후의 관문을 통과한 웨이드를 어린 시절 자신의 방으로 초대한다. 8비트 게임기에 몰두했던 소년 할리데이는 현실에서의 소통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안타까워하면서도 현실을 긍정한다. 그 끝에서 툭 던지는 한 마디 대사. “리얼리티 이즈 리얼.” 이 순간 현실과 가상현실게임으로 구분되고 가로막혀 있던 세계가 연결된다. 할리데이는 현실보다 게임이 더 편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게임을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로 삼은 건 아니다. 게임 속에서 쌓은 할리데이의 위대한 업적과 긴 시간들을 누가 가상, 가짜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과 가상현실, 양쪽의 시간 모두를 긍정할 때 할리데이는 온전히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스필버그 역시 마찬가지다. 클래식 영화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고지식한 스필버그와 온갖 비영화적인 것(예컨대 CG, 3D, VR 등)들을 즐기고 기꺼이 영화의 세계로 초대하는 오타쿠 스필버그는 실상 분리되지 않는다.  

오늘날 영화는 무엇일까. 매체가 섞이고 플랫폼이 분화되고 관객이 체험이 다종다양하게 분리되는 현재, 관객 각자의 영화적 체험이 존재한다. 전통적 영화의 개념, 바쟁이 찾아냈던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이 희미해진 지금 영화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그려진 것과 찍힌 것, 달리 말하자면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컴퓨터 그래픽의 등장으로 찍는 영화와 그리는 영화의 구분이 모호해진 지금, 라이브 액션 시네마와 그래픽 시네마를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모든 의문의 근본에는 ‘필름, 실사, 시네마는 다르다’는 고집, 혹은 달라야 한다는 바람이 반영되어 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이 딱딱한 고정관념에 스필버그식으로 화답한다. 어떤 신기한 기술이든 받아들이고 거리낌 없이 흉내를 내되 소통할 수 있도록 현재화하는, 오직 즐거움을 향한 모험담. 

레디플레이어원스틸
레디플레이어원스틸

<레디 플레이어 원>에는 세 가지 층위의이미지가 공존한다. 첫째는 웨이드가 속한 라이브 액션. 이는 필름의 질감과 할리우드 서사 영화의 관습을 흉내 낸다. 두 번째는 가상현실게임 오아시스의 플레이 이미지들. 이는 CG 애니메이션임을 일부러 선명히 드러내며 애니메이션이 축적해온 미학적 양식(이를테면 과장된 이미지와 애니메이션적 허용)을 기반으로 한다. 마지막은 최근 스필버그의 페르소나라 해도 좋은 마크 라이언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재현한 제임스 할리데이다. 오아시스 속 캐릭터가 확연히 CG 애니메이션임을 드러내는 데 반해 할리데이의 비주얼은 필름을 극한까지 묘사한 최근 CG의 연장에 있다. 그려진 것이되 찍힌 것에 한없이 가까워지고자 하는 이미지. 여기서 다시 질문. <레디 플레이어 원>은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인가, 영화를 흉내 낸 게임인가. CG를 활용한 실사 영화인가, 실사를 흉내 낸 애니메이션인가.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결과물은 모든 개념을 포괄하고 경계를 허문 채 지금 여기 존재한다. 리얼리티 이즈 리얼. 사실적인 것(가상현실) 역시 사실(현실)의 일부라는 단순명료한 답. ‘영화적인 것’ 역시 영화의 일부라는 수용적 태도. 

생각해보면 스필버그는 항상 그랬다. 스필버그를 대중과 예술이라는 평행선 위에 두고 찢어놓고 싶어 한 건 평자들의 욕망이었을 뿐, 그는 늘 대중문화의 여러 체험을 섞고 영화적인 것들로 소화한 뒤 쌓아 올려 우리의 ‘영화적’ 체험을 확장해왔다. 관객으로서 이 영화를 받아들이고 즐기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것은 영화라는 딱딱한 정전이나 개념이 아니라 숱한 대중문화를 통해 축적된 체험의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할리데이와 헤어지기 전 웨이드는 묻는다. “아저씨는 진짜예요?” 할리데이는 답한다. “내 게임을 해줘서 고맙다.” 이 짧은 문답에 스필버그의 지난 영화 작업이 오롯이 담겨 있다. “내 영화를 봐줘서 고맙다”고 쑥스럽게 고백하는 스필버그에게 답하고 싶다. 이제 진짜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고. 앞으로도 당신의 영화와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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