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혼: 죽은 넋 왕 빙, 2018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8-11-19조회 6,575
사령혼 스틸

아마 긴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단순하게 말할 생각이다. 이미 오랜전부터 왕빙은 <사령혼: 죽은 넋(Dead souls)>(2018)을 찍고 있었지만 그걸 알게 된 것은 작년이었다. <팡슈잉(Mrs. Fang)>(2017)이 작년 부산영화제에 초대되었지만 왕빙은 오지 않았다. 대신 그 영화의 프로듀서와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내게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이 약간 주변을 둘러본 다음 조심스럽게 지금 왕빙이 파리에서 다음 영화를 편집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런 다음 짧게 질문했다. 왕빙의 유일한 극영화인 <자볜거우(The ditch)>(2010)를 보셨지요? (이 영화는 부산영화제에 <바람과 모래>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다. 왜 이런 제목을 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물론이지요. 그러자 대답했다. 지금 거기서, 자볜거우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한 영화를 편집하고 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두 개의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다. 나는 새 영화가 아마도 왕빙의 두 번째 영화 <허펑밍; 중국 여인의 연대기(Fengming, a Chinese memoir)>(2007)과 같은 방법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어느 눈 내린 겨울날, DV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왕빙은 허펑밍 할머니를 찾아간다. 그리고 요청한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그러면 허펑밍은 그녀가 17살이었던 1949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화면자료도 없고, 어떤 설명도 없으며, 어떤 자막도 없고, 어떤 움직임도 없다, 카메라는 멈추어 섰고, 왕빙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 그저 듣는다. 이 전례 없는 청취(聽取)의 방법론. 그저 한참을 듣다가 지나치게 방 안이 어두워지자 죄송하지만 불을 켜도 될까요, 가 전부이다. 그렇게 3시간 8분 동안 고작 6개의 쇼트만으로 이루어진 영화. 왕빙은 자기가 듣기 원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면 어떤 실용적인 방법도 거절할 것이며, 경제적인 선택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항상 그렇게 찍었다. 

다른 하나. 왕빙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집은 집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무 것도 없었다. 침대와 아주 간단한 취사도구, 몇 권의 책. 편집을 위한 컴퓨터 모니터 두 대. 마치 창고처럼 쌓아 올려진 (아마도 이제까지 촬영된 여러 영화의) 테이프들. 아주 간소한 책장. 그게 전부였다. 그때 내 눈길을 끈 것은 한 권의 책과 네 장의 DVD였다. 그 책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쓴 영화론인 『시간 안에서 조각하기(Sculpting in Time)』, 우리말로 『봉인된 시간』이라고 번역된 그 책의 중국어판이었다. 그리고 DVD는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Shoah)>(1985)였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유대인들, 그리고 그들을 감시했던 나치 SS대원들, 그들을 바라보았던 사람들, 어떤 화면자료도 없이 그들의 인터뷰만으로 진행되는 증언의 영화. 나는 DVD를 보면서 이미 내가 본 <허펑밍; 중국 여인의 연대기>의 참고가 되었던 영화였구나, 라고 멋대로 짐작했다. 프로듀서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틀렸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약간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러면 왕빙의 새 영화는 21세기의 <쇼아>가 될까요? 그녀가 대답했다. 정확하게 그렇습니다. 

<사령혼: 죽은 넋>을 영화 안에서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상영 시간 8시간 27분. 이따금 왕빙은 자볜거우에 가까이 자리한 밍수이의 풍경을 찍지만 거듭 되풀이해서 인터뷰한다. 모두 15명 혹은 16명. 이건 대답을 한 사람. 혹은 거절한 사람. 그 곁에 있었던 사람. 그들을 어떻게 셈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 왕빙은 방법론적으로 단순하게 찍었다. 인터뷰하고 그들은 대답한다. 그게 전부이다. 화면자료도 없고, 다른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으며, 그걸 설명하는 목소리(voice_over_narration)도 없고, 왕빙이 가끔 질문을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누군가는 아마 이걸 본 다음 대답하는 육체를 찍었다고 근사하게 대답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왕빙은 이 영화를 하나의 미학으로 찍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대상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할 지 모르겠다. 그런 설명만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더 난처한 것은 왕빙이 그들의 배경에 대해서 영화가 시작하면 그저 단 세줄, “1957년 중국 정부는 반(反)정부적이라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반우파(反右派) 운동을 벌였다. 5만 5천명에서 1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되었으며,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1957년에서 1958년 사이, 약 3,200명의 극우분자들이 노동을 통한 사상재교육을 받기 위해 간쑤성 고비사막 근처의 자볜거우 농장수용소로 보내졌다”라고 상황을 설명한 게 전부이다. 물론 중국 근대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행된 대약진의 시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사령혼: 죽은 넋>은 그 지식을, 그 배경의 이해를, 그 상황의 설명을, 그 역사의 전개 과정에 관한 앎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영화이다. 마치 <쇼아>를 보기 전에 아우슈비츠의 역사를, 그 역사를 둘러싼 역사학자들의 논쟁을, 그 논쟁 속에서 아우슈비츠가 다루어진 방식을, 그 방식 속에서 모든 것의 망각을 목표로 한 저 소각의 무자비한 시도와 그 안에서 실낱같은 생명을 유일한 증거로 들고 간신히, 가까스로, 겨우, 거의 부서져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의 맥락을 근거로 한 이의제기를 이해해야 하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사령혼 스틸

그러므로 <사령혼: 죽은 넋>의 첫 장면이 시작하기 전을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955년 가을. 마오쩌둥은 중국이 사회주의 블록 안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할 필요를 느꼈다. 그건 단지 (이제는 러시아가 된) 소비에트와의 사회주의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 벌인 경쟁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이 끝난 상태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혁명 동지들이 이제부터는 정치적인 정적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지도력을 한편으로는 인민들에게 증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치적인 경쟁자들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공산당 내 서열을 정해졌지만, 그는 그들이 종종 도전해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농촌의 집산화 운동을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철강 증산을 요구하였다. ‘사회주의의 물결을 높이 끌어올리자(社會主義高潮)’는 구호 아래 (훗날 불리게 된) 소약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내에서 저우언라이를 중심으로 1956년 봄 이 운동은 기근을 초래했으며 지나치게 목표를 높이 잡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전개되었다. 마오쩌둥은 이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1957년 2월 마오쩌둥은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마치 자아비판을 하듯이 “인민 내부의 모순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하여” 이제 인민들로부터의 비판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은 덩샤오핑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 숙청이 이렇게 대규모로 전개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공산당은 인민들에게 당을 비판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말하는 자에게는 죄가 없다(言者無罪)‘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침묵하였지만, 곧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마오쩌둥은 기다렸다. 1957년 6월, 인민일보에 우파보수주의자들이 혁명을 위협한다는 사설이 실렸다. 마오쩌둥은 우파분자들의 색출작업을 자신의 계획을 눈치 챈 덩샤오핑에게 맡겼다. 한편으로 마오쩌둥은 그 과정에서 당내 경쟁자들 사이의 분열을 가져왔다. 그들에게 당내 2인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유도했으며, 공산당 내 유물변증법의 최고 이론가였던 류소치는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당내 투쟁의 과정을 진행하면서 인민들에게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1957년 겨울, 중국 전역에서 마을마다. 동네마다, 지역마다, 마오쩌둥의 교시에 따라 우피분자 색출에 나섰으며, 그들은 밤마다 자아비판을 요구했고, 낮에는 경제개혁 운동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유물론의 기초를 잠시 잊었다. 그들은 토대를 미처 마련하지 않았고, 개혁 운동은 전 국토의 파괴를 가져왔다. 농지의 파괴와 공장의 폐수와 공해, 그리고 제방이 무너지고 쥐 떼와 메뚜기 떼가 휩쓸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기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경제개혁 운동이 강행되었다. 마오쩌둥은 대답했다. “인민 절반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을 수도 있다” 불만이 쏟아져 나왔고, 도둑이 들끓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대답은 간단했다. 더 강력하게 개혁 운동을 진행하고, 반대하는 우파분자들을 가차 없이 숙청하라. 여기저기 강제노동수용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가 간쑤성 고비사막에 자리 잡은 자볜거우 강제노동 수용소이다. 상황에 대한 간단한 통계자료를 제시하겠다. 1957년 12월에 자볜거우 강제노동 수용소에 첫 재소자 2,300명이 도착했다. 1960년 9월, 일부 재소자를 다른 노동수용소에 옮길 때 이미 이 중 1,000명 이상이 죽었다. 간쑤성 전체에서 12월 한 달 동안에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약 4천 명이 수용소에서 죽었다. 6월에 8만 2천 명이었던 재소자는 반년 사이에 7만 2천 명으로 줄었다. 이 시기를 연구한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1958년에서 1962년까지 대약진 기간 동안 중국 전역에서 약 4,500만 명이 죽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시기에 자행된 파괴의 규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체의 파괴 규모를 넘어선다고 한다. 이게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비로소 첫 장면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령혼 스틸

지금 왕빙 카메라 앞에 앉아있는 이 노인들은 거기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면 왜 그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해졌는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81년 중국 공산당 11기 6중 전회에서 문화혁명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대약진 시대의 역사에 대해서 공산당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것은 이 시기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이 시기를 찍은 영화는 온통 찬양뿐이며, 선전 프로파간다이며, 살아남은 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중이다. 심지어 촬영 중에 누군가는 병석에 누워있으며, 누군가는 아직도 말을 꺼내 들기를 두려워한다. 대답하는 그들이 누구이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역사로부터 버려진 삶.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삶. 그들이 모두 죽으면 역사는 함께 땅속에 묻힐 것이다. 왕빙은 살아남은 자들의 말, 그 말의 실존을 영화에 남겨놓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임무라고 받아들인다. <사령혼: 죽은 넋>은 거기서 시작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미처 찍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몫이 아니다. <사령혼: 죽은 넋>은 미처 찍지 못했던 그것에 다가가기 위해서 악착같이 찍고 또 찍은 영화이다. 나는 여기서 영화가 해야 할 일을 본다. 말 그대로 영화의 윤리.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마 긴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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