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우 데이빗 로버트 미첼, 2014

by.김봉석(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 2015-11-26조회 6,242
팔로우 스틸이미지

저주를 받은 사람에게 악마나 사신이 쫓아다니는 설정은 공포영화의 흔한 공식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의 <팔로우>는 천천히 다가오는 사신의 공포를 청춘의 불안과 두려움을 엮어 아찔한 분위기를 잡아낸다. 기이한 오프닝 장면이 없다면, <팔로우>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청춘영화다. 제이가 뒷마당의 풀장에서 수영을 할 때면 동네 아이들이 엿본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 곱게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차려입는 장면은 <식스틴 캔들스> 같은 1980년대 존 휴즈 영화를 보는 것만 같다. 음악도 비슷한 톤이다. 어디론가 가고 싶지만 현실의 벽 안에서 어쩔 줄 모르는 청춘들이 그곳에 있다.

휴와 첫 섹스를 하고 난 제이는 혼잣말처럼 이야기한다. “어릴 때는 자유롭게 어디론가 가는 꿈을 꾸곤 했어. 데이트를 할 때에도 차를 타고 멀리 어디론가 가고 싶었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두려움을 느낀다. 채 20살도 넘지 않은 제이는 그렇게 두려움을 말한다. 어린 날의 꿈이 그저 공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욕망과 이상을 좇아 어디론가 가고는 싶지만 현실의 벽이 거대하다는 것도 깨달았으니까. 제이는 말한다. “이제 클 만큼 컸는데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순간 기억을 잃은 제이는 깨어나면서 의자에 묶인 자신을 발견한다. 휴가 말한다. 누군가 따라올 것이라고. 모르는 사람일 수도, 아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결코 너를 만지게 하지 말라고. 멀리 도망가라고.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누군가와 섹스를 해서 넘겨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 다시 따라온다. 다행히도 뛰거나 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막다른 곳에만 몰리지 않으면 된다고. 그렇다. 핵심은 섹스다. 영구적이지는 못하지만 섹스를 해야만 일단 피해갈 수 있다.

공포영화에서 섹스는 죽음의 지름길이었다. <13일의 금요일> 등 슬래셔 영화에서는 섹스를 한 캐릭터부터 죽어 나간다. 섹스를 하고 난 직후, 섹스를 할 때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그들은 금기를 어겼으니까. 슬래셔 영화의 원조인 존 카펜터의 <할로윈>에서 살인마 마이크 마이어스는 섹스를 한 누나를 살해한다.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이 슬래셔 영화의 공식을 일일이 패러디하면서 조롱하고 역으로 이용할 때에도 ‘섹스’는 중심에 있었다. 주인공은 하필이면 살인자와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한다. 애초에 제물이었던 그녀는 당당히 싸우고 살아남아 최후의 그녀가 된다.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남는다. 80년대 슬래셔 영화에서 ‘섹스’는 그야말로 원죄였다.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미국 사회를 반영하듯이.

<팔로우>에서도 언뜻 그렇게 보인다. 휴와 섹스를 했기 때문에 제이는 저주를 받게 된다. 하지만 섹스는 죄의 시작인 동시에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다시 섹스를 해야만 넘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섹스를 해야만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한다면, 그에게 저주를 넘겨주게 된다.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과 섹스를 한다면 어떤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가 단지 원나잇을 원했으니까 저주를 넘겨준다는 것은 과연 합당한 일일까? 휴에서 제이로, 다시 그렉으로, 모르는 남자에게로, 폴로 섹스를 통해 저주가 넘어가는 과정은 기이하다.

<팔로우>에서 섹스는 단지 저주를 주고받는 도구가 아니다. 그들에게 섹스는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양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제이는 그렉과 섹스를 한다. 왜 그렉이었냐는 질문에, 제이는 답한다. 예전에 한 번 한 적이 있었고, 그렉이라면 어떻게든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제이와 그렉이 섹스를 하고 난 다음 이어지는 장면들이 묘하다. 섹스를 한 병원의 침대에서 제이는 흐트러진, 어딘가 퇴폐적인 모습으로 누워 있다. 반면 그렉은 학교의 식당에서, 여자들에 둘러싸여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히려 제이가 홀가분해야 할 텐데, 제이는 타락한 여인 같은 모습이다. 그것은 곧 세상에 보이는 남녀의 이미지다. 섹스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떠올리는 남녀의 이미지. 그렉이 죽을 때, 사신의 모습은 그의 어머니다. 쫓아 들어간 제이는 마치 섹스를 하는 것처럼 그렉을 위에서 덮쳐누르며 움직이는 (그렉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신을 보게 된다. 정액처럼 보이는 끈적한 물질이 그들 사이에 있다. 섹스는 제이와 그렉,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는 존재다.

섹스는 아이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표식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섹스는 길을 떠나는 행위이고 일종의 여행이 된다. 제이와 친구들은 그렉의 차를 타고 휴의 행방을 찾아간다. 길가의 풍경은 스산하다. 문을 닫은 상점과 공장, 버려진 집들. 그들이 살아가는 도시는 계속해서 폐허가 된다. 제이는 주의 깊게 그 풍경을 바라본다. 처음 휴를 만났을 때, 제이는 역할 바꾸기 게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변의 아무나 한 명을 골라서, 왜 그 사람과 바꾸고 싶은지 설명해보라고. 사춘기의 그들은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다. 경계를 넘어가고, 어디론가 가고 싶다. 어린 시절 그들은 중심가에 나갈 때, 주 경계를 넘을 때 반드시 어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다. 섹스는 그들이 가장 쉽게 혹은 일상에서 벌일 수 있는 여행이고 위반이다.

청춘, 사춘기의 아이들은 경계에 있다. 금을 밟고 슬쩍 넘어가 보기는 해도 확 건너가지는 못한다. 아직은 아니다. 두렵기도 하고, 그럴만한 힘도 없다. 하지만 저주를 받은 후에도 제이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다. 동생인 켈리에게도, 엄마한테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놀랄 것이고, 믿지도 않을 것이라고. 그렇다. 어른들은 믿지 않는다. 믿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들과 어른의 세계는 완전하게 단절되어 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소통할 뿐이다. 심지어 제이와 섹스를 한 후의 그렉조차도 저주를 믿지 않는다. 제이가 아무리 이야기하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여줬어도 믿지 않는다. 어른인 그렉은 믿지 않기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제이가 사신을 만나 처음으로 도망친 곳은 놀이터다. 어린 시절에 놀던, 나무와 모래 그리고 그네가 있는 놀이터.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비합리적이고 광기어린 초자연적 존재가 완전히 무시당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아니다. 그들은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린 시절 제이와 폴이 처음으로 키스를 했던 그곳, 수영장에서 저주를 벗어날 방법을 찾는다. 이 결말이 허술하다는 비판이 많이 있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총에도 죽지 않는 사신을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하지만 <팔로우>의 사신은 형체가 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건드리면 분명하게 물질적인 형체가 있는 존재다. 형체가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초월적인 힘을 가졌다 해도 약점은 있다. 공포영화나 판타지에 나오는 괴물의 캐릭터들이 그렇듯이.

그렉이 죽고난 후, 제이는 모르는 남자와 섹스를 한다. 충동적으로 처음 본 남자들과. 그리고 제이는 집으로 돌아온다. 아마도 잠시의 시간뿐이겠지만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후 보이는 장면에서, 제이가 수영을 하던 뒷마당의 비닐 풀장이 부서져 있다. 물이 빠진 채로 널브러져 있다. 제이는 더 이상 과거의 그녀가 아니다. 풋풋함이 사라진 것이고, 더 이상 아이들이 엿보지 않는 여자가 되었다. 폴이 찾아와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 하지만 피한다. 제이는 이미 죽은 길 건너 그렉의 집을 바라보고, 폴은 화장대에 붙여진 수영을 하는 제이의 사진을 본다. 순수했던 그녀의 시간, 존재. 휴와 섹스를 했기 때문에 악몽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돌아가야 한다. 그 시간 이전의 순수했던 지점으로.

<팔로우>는 존 휴즈와 존 카펜터의 작품들을 뒤섞은 청춘 호러영화 같다. 그들이 사는 교외의 풍경은 <할로윈>을 연상시킨다. 느리게 흐르는 영상과 끼걱거리는 음악도 그렇다. 우울하고 섬뜩하지만 동시에 반짝거리는 제이와 친구들의 청춘을 그려낸다. 젊기 때문에 그들이 맞닥뜨리는 죽음의 깊이, 어둠의 빛깔은 한없이 검다. 친구인 야라는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준다. ‘가장 심한 고통은 상처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시간 후에, 10분 후에, 30초 후에 지금 당장 영혼이 육체를 떠나고 더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가장 끔찍한 건 그 확실성이다.’<팔로우>는 죽음의 확실성을 천천히 다가오는 사신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정말로 끔찍했을 것이다. 가장 밝아야 하는 순간에 가장 어두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순간은. 하지만 그것이 곧 세상을 이해하는 수순이다. 휴가 말하지 않았던가. “가끔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죽이려 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그런 비극이 세상이고, 언제 어디에서건 우리는 사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 서서히 다가오는 사신을 늘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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