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무면 차이밍량, 2015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5-12-04조회 9,908
무무면

올해는 나에게 충만한 한 해였다. 무엇보다도 오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단지 영화를 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을 만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왕빙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가까스로 완성할 수 있었다. 지난해와 달리 올해 나의 영화를 고르면서 순식간에 16편의 제목을 썼지만 규칙에 따라 아쉽게도 6편의 영화를 명단에서 제외시켜야 했다. 만일 내일 다시 고른다면 이 중 몇 편의 영화가 빠지고 그중 몇 편의 영화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렇지만 나는 이 명단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배려도 하지 않았으면 어떤 균형도 잡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지금 떠오르는 대로 그저 내 두뇌 속의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명단을 차례로 적어나갔다. 차라리 이 명단은 베스트 10이라고 부르는 대신 ‘나의 몹시 사적인 동시상영관’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들의 목록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영화는 <무무면>이다. 이 영화가 올해의 나의 (단 한 편의) 영화는 아니다. 그러므로 오해하지 말아 주었으면 고맙겠다. 하지만 올해 이 영화를 가장 오랫동안 끈질기게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올해 차이밍량의 <행자 行者(Walker)> 연작을 일거에 볼 기회가 있었으며, 또한 그가 이 영화를 확장시켜 무대에서 진행한 <삼장법사>를 눈앞에서 볼 기회가 있었으며, 게다가 8개월의 시간 차이를 두고 두 번에 걸쳐서 만나 그의 작업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행자> 연작은 (차이밍량의 영화 작업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떠돌이 개>를 본 다음 아주 우연히 유튜브에서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을 여기서 보게 되었다고 말하자 무슨 말에도 친절한 차이밍량이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가장 나쁜 방법을 선택했다고 거의 나무라듯이 내게 말했다. 그런 다음 약간 덧붙였다.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보아야만 해요. 이 영화를 일상생활 바깥에서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반문했다. “당신은 영화를 이제 버린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차이밍량은 파안대소를 하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그건 잘못된 소문입니다. 아마 내 이야기를 들은 기자가 부주의했음이 틀림없어요. 나는 단지 상업영화들이 배급하는 방식을 더 이상 선택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건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행자>는 단순하다. 당나라 승려 삼장법사가 천축에 가서 불경을 가져오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데서 모티브를 가져와 이강생이 낡고 남루한 승복을 입고 그저 천천히 홍콩의 침사추이를, 프랑스의 마르세유 거리를, 커다란 한지 위를, 얕게 깔려있는 물 위를, 동경의 밤거리를 아주 느리게, 천천히, 때로는 멈춘 듯이 걸어간다. 여기에는 다른 어떤 이야기도 없다. 물론 이 작업에 대해서 매우 복잡한 이론을 열거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만일 그러다가 내가 여기서 가져본 어떤 마술적인 기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감돌기 때문이다. <행자> 연작은 매우 가냘픈 작업이다. 어딘가를 잘못 건드리면 순식간에 부서져 버릴 것만 같다. 대신 내가 느껴본 것을 말하고 싶다. 

맨 처음 보았을 때는 두 가지를 의식하게 된다. 거의 슬로우 모션처럼 걸어가면서 다른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걸어가는 보행 사이에서 서로 다른 속도가 마치 두 개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이강생은 거의 멈춘 것처럼 걸어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강생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풍경에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카메라가 거의 멈춰있기 때문에 이제 풍경 위로 흘러가는 날씨의 조건을 보기 시작한다. 거기 떨어지는 햇빛, 혹은 지나가는 구름. 이강생은 구름이 지나가는 것보다 더 느리게 걸어가기 때문에 그의 걸음 위로 구름이 지나가면서 때로 햇빛을 가렸다가 다시 화창한 날씨를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그때 우리가 보는 것은 더도 덜도 아닌 시간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시간을 이야기했고, 또 많은 예술가들이 시간 속에서 작업을 해왔다. 차이밍량은 시간을 다룬다기보다는 그것을 음미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는 오래전부터 시간 안에서, 곁에서, 사이에서, 뒤에서 영화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를 고심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영화 안에 시간을 놓아두고 싶어 한다. 

<떠돌이 개>는 그의 영화에서 하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의 자리에 가져다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영화는 마치 자신의 제목처럼 영화관이 아닌 다른 장소를 찾아 떠돌아다녔다. 나는 이 영화를 전혀 다른 장소에서 세 번 보았다. 세 번째는 광주 한복판의 전남도청 강당에서 한밤중에 보았다. 올해 광주 예술극장 개관행사 중의 하나였다. 이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당신에게 다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강당은 이미 어두웠고 여기저기에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차이밍량은 마치 보물찾기 하듯이 일일이 나를 데리고 다니며 소개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장소가 지닌 1980년 5월 그날의 의미에 대해서 차이밍량에게 설명했을 때 자신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 다음 덧붙였다. “그분들(의 영혼) 중의 누군가 오늘 밤에 이 영화를 보러 와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 말을 듣고 문득 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차이밍량은 가볍게 안아 주었다. <떠돌이 개>는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행자>를 시작하기 위한 이 위대한 거절. 마치 이 영화는 내게 허우 샤오시엔에게서 <남국재견> 같은 결단으로 다가왔다. 예술가들에게서 두 번째 데뷔작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차이밍량은 왜 그럴 필요가 생겨난 것일까. 

두 번째를 말할 차례이다. 내게는 이게 더 중요하다. 홍콩에서 진행된 <행자>는 이 작업이 영화 안에서 진행된 퍼포먼스인지 반대로 퍼포먼스를 영화가 기록한 것인지 쉽게 분간하기 힘들었다. 물론 차이밍량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찍었다. 이런 종류의 작업을 미술이 했을 때 나는 언제나 실망했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차이밍량은 어디 서 있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고, 얼마나 멀리 있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으며, 언제 시작해서 언제 멈춰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무면>에서는 새로운 단계가 도입되었다. 갑자기 카메라는 이강생을 내버려두고 전철에 올라탄 다음 창문 바깥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심야에 달리는 이 전철 바깥으로 풍경이 하염없이 흘러간다. 나는 이 역의 출발역과 도착역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상철인 이 열차는 하염없이 흘러가는 풍경을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는 창문과 정확하게 수평을 이루기 때문에 전철 안의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 잠겨있는 도시는 어떤 지표도 노출하지 않고 그저 어둠과 불빛의 풍경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쳐갈 뿐이다. 이걸 바라보다가 문득 영화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찍은 영화를 이미 이전에 본 적이 있다.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대부분 영화사 책은 <기차의 도착>과 <공장에서의 퇴근>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뤼미에르 형제의 다른 영화를 보지 않는다. 뤼미에르 형제의 전작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만든 영화를 잠시 동안 파리에 머물 때 시네마테크에서 하루 종일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 영화들이 보여준 것은 모든 대상들은 이미지로 지각되고 모든 이미지는 대상의 감흥을 불러일으킨다는 배움이었다. 영화의 문법이 잃어버린 것은 그 배움이다. 21세기가 되었을 때 일부의 예술가들이 그것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를 썼다. 차이밍량은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중이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나는 그것을 뤼미에르 효과(Lumiere-effect)라고 부르는 중이다. 영화에서 유일한 진실은 영화 스스로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때 그 활동은 영화의 시간이며 생명이다. 나는 점점 더 두 개념 중에서 후자에 이끌린다. 무엇이 영화에 생명을 부여하는가. 어쩌면 이 열 편의 영화들은 그 질문에 대한 각자의 방식의 대답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 열 편의 영화는 좌표의 의미이며 표류하고 있는 내게 등대선들이다. 그들이 비춰주는 빛. 그 가냘픈 빛. 하지만 그 빛이 없으면 어떻게 내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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