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우 데이빗 로버트 미첼, 2014

by.김혜리(영화평론가) 2015-12-21조회 20,645

언젠가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만약 성경의 표현이 모두 은유라면? 마구간과 구유, 동방박사가 곧이곧대로 마구간과 구유, 동방박사가 아니라 일종의 상형문자라면, 복음서는 어떤 이야기가 될까? 벽 뒤에 감춰진 방이 열리는 듯했다.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팔로우>도 내게 비슷한 매혹이었다. 이 영화는 10대 슬래셔를 비롯한 몇몇 호러 장르의 관습을 메타포로 받아들임으로써, 여태 정면에서만 보아온 장르적 설정과 도상의 뒷면을 드러내고 더 보편적인 명제로 주제를 확장한다. 참신한 것은 주제보다 영화로 거기까지 도달하는 경로다. 그러나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장르의 관습을 비틀어 장르 자체를 갱신하는 작업에는 무관심하다. 그는 가난한 집의 꾀 많은 아이처럼 장르의 레고 블록들을 고스란히 빌려 와 자신이 원하는 딴판의 구조물을 조립한다. 20대에 접어들 무렵 시간의 풍경과 정서에 대한 숨 막히는 정밀 묘사. 그것이 <팔로우>의 실체다. 보지 못한 감독의 첫 장편 <아메리칸 슬립오버 The Myth of the American Sleepover>의 줄거리를 IMDb에서 찾아보았다. ‘네 명의 젊은이가 여름의 마지막 주말, 사랑과 모험을 찾아 디트로이트 교외를 돌아다닌다.’ 악령이라는 변수만 더하면 <팔로우>의 시놉시스와 바꿔치기해도 상관없을 성 싶다. 

디트로이트에 사는 제이(마이카 먼로)는 남자친구 휴와 처음 섹스를 나눈 직후 클로로포름에 마취돼 의식을 잃는다. 휠체어에 묶여 깨어난 제이에게, 휴는 섹스를 통해 옮겨가는 악령을 방금 너에게 넘겨줬으니 너도 어서 다른 희생자를 찾으라고 통보하고 앞으로 제이를 따라올 ‘그것’(원제의 ‘it’)의 실체를 곧장 보여준다. 예고편에서 부각된 이 신은 <쏘우> 류의 고문 호러를 암시했지만, 실제 극중 맥락은 딴판이다. 휴가 구태여 제이에게 ‘생존 매뉴얼’을 설명하고 자리를 뜨지 못하도록 결박해 악령의 존재를 입증하는 까닭은 이 저주에 수반된 특수한 규칙 탓이다. 새로운 표적이 악령에게 살해될 경우 저주는 사슬을 한 칸 역행해 돌아온다. 다음 주자가 요령껏 살아남아야 나도 무사하기에 저주를 넘겨주는 쪽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해’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만약 섹스 상대와 감정적인 유대가 있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무거워진다. 이 항목에 이르러 <팔로우>의 10대들은 괴물에게 쫓기는 예쁜 사냥감을 넘어 결단의 주체가 된다. 호러의 재미를 이루는 3대 원소는 대략, 저주가 작동하는 룰과 몬스터/악당의 개성, 반격의 전략일 텐데 <팔로우>는 총명하고 의미심장한 규칙을 고안해 승점 절반 이상을 확보한다. <팔로우>의 ‘그것’은 때로는 아는 사람의 모습으로, 때로는 낯선 이의 형상으로 나를 향해 똑바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하지만 좀비처럼 표 나는 행색도 아니라 군중 틈에서 식별하기 어렵고 저주를 넘겨주고 받은 당사자 이외의 사람들에겐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 악령이 하는 행동의 물리적 결과는 모두의 눈에 보인다.) <팔로우>의 STD(성행위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 sexually transmitted disease) 설정은 방종한 10대를 살인마가 응징하는 70, 80년대 <할로윈> 류 호러와 동일하다. 그러나 <팔로우>의 섹스는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도이기도 하기에 10대의 성을 죄악시하는 청교도적 보수성은 제거됐다. 한편 누구도 해치지 않는 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고 무고한 타인에게 위험을 넘겨야 살아남는다는 딜레마는 <>과 가깝다. <링>의 저주가 시한부 삶과의 초조한 투쟁이라면, <팔로우>의 공포는 한번 눈 딱 감고 남에게 전가해도 언제 되돌아올지 모르고 나 이외의 모든 인간을 영원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광막하다. 빨리 성년이 되고만 싶었던 겨우 스무 살인 주인공들은 갑자기 남은 삶이 끔찍이도 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팔로우>의 약점은 명백하다. 한 마디로 이 호러는 별로 무섭지가 않다. 적어도 펄쩍 뛰거나 긴장으로 몸에 쥐가 나는 대목은 없다. 희생자들이 악령을 대적할 수 있는 실질적 방도가 없다는 점도 관객을 맥 빠지게 만든다. 제이와 친구들이 ‘그것’을 퇴치하기 위해 짜내는 작전은 한심하거나 허술하다. 실내 수영장으로 악령을 유인하는 클라이맥스의 논리는 특히 이해하기 힘들다.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뱀파이어 호러 <렛 미 인>이 같은 공간에서 연출한 아름답고 통쾌한 클라이맥스와 비교하면 더욱 시시해 보인다. <팔로우>가 물과 악령의 연관성에 대한 설정을 여러 차례 깔아놓고도 매듭짓지 않는 점은 가장 의아한 대목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위협을 느낄 때 주로 물가로 도망친다.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귀신의 힘을 빨아들이는 아시아 호러 영화 속 물의 힘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팔로우>에서 물의 의미는 끝까지 구체화되지 않는다. 

요컨대 <팔로우>의 어느 구석을 보아도, 재미있는 호러를 연출하기 위해 필요한 감독의 적당한 잔인함과 최소한의 새디스트적 기질을 발견하긴 어렵다. 대신 <팔로우>는 공포감의 역치를 바꾸어 놓는다. 히치콕의 <>가 그랬듯이 여태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상을 섬뜩한 앵글로 다시 보게 한다. 게임의 규칙을 인지한 다음부터 <팔로우>의 관객은 중경과 원경에 행인이 나타날 때마다 동요하게 된다. 휴는 제이에게 절대 막다른 장소에는 가지 말라고 조언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오가는 사방이 트인 공간 역시 저주받은 자에게는 언제 맹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정글이다. 요컨대 <팔로우>는 공포의 역치를 바닥까지 낮춤으로써 악령에 쫓기지 않는 관객에게도 어이없는 사실을 일깨운다. 낯선 사람이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저주 이후의 영화 속 세상은 영화 초반 제이를 처음 소개하는 장면과 대조를 이룬다. 집 뒤뜰의 간이 수영장에 몸을 가라앉힌 소녀에게 세상은 평온하고 다정하다. 제이는 미지근한 공기 속에서 다람쥐와 새를 느긋이 바라보고 벌레를 만져본다. 울타리 너머에서 엿보는 호기심 많은 소년들은 귀여울 뿐 위협이 못된다. 어떤 생명체도, 움직임도 성적 응시도 위험으로 느끼지 않았던 소녀에게 20대와 더불어 닥친 저주는 유년의 평화를 영구히 부숴버린다. 그러면 악령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실패하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되는가? <팔로우>에서는 죽음이 딱 두 번 묘사된다. 첫 번째는 제이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 프롤로그의 이름 모를 소녀이고 두 번째는 제이에게 내린 저주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간 예전 남자친구 그렉이다. 두 죽음에서 눈길을 끄는 요소는 부모와의 관계다. 프롤로그의 소녀는 무슨 일이냐고 염려하는 아빠를 괜찮다고 안심시키고 혼자 도망친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는 순간 아빠에게 전화를 걸지만 “제가 엄마,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 못되게 굴었던 일들 미안해요.”라는 체념의 인사만 남긴다. 기이하게도 이 10대는 보호자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그렉을 습격한 악령은 심지어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양수 같은 물을 흘리며 다가와 섹스를 연상시키는 자세로 청년을 덮친다. 제이 역시 홀어머니에게 자신이 처한 위기를 설명하지 않고 나중에는 죽은 아버지를 모습을 한 악령에게 쫓긴다. <팔로우>의 아이들은 스누피 만화 「피너츠」처럼 어른이 실질적으로 부재하는 세계에서 자기들끼리 궁리하고 행동한다. 이 캐릭터들이 부모를 대하는 감정은 증오라기보다 아득한, 그리고 스스로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거리감이다. 

많은 10대 슬래셔 호러에서도 부모가 집을 떠난 사이에 참극이 일어난다. 그 영화들이 죽음의 게임에서 변수를 줄이고 편리하게 풀어가려고 부모를 배제했다면 <팔로우>의 폐쇄된 소우주는 10대 후반의 생활 감각을 표현하기 위한 시적 허용에 가까워 보인다. 나와 내가 선택한 소수의 친구 그룹이 온통 세상의 전부인 시절. <팔로우>를 보는 동안 나는 학교나 가족, 사회보다 자아, 그리고 친구들의 판단이 절대적 가치 기준이자 법이었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감정을 상기할 수 있었다. 동생 켈리와 소꿉친구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음에도 제이의 이야기를 무조건 신뢰하고 곁을 지킨다. 제이네 집 현관에는 마치 네 친구를 위한 듯 딱 네 개의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있다. 이 한시적으로 밀봉된 <팔로우>의 세계는 영화의 절묘한 톤과 디자인으로 완성된다. 예컨대 제이를 오래 짝사랑해 온 폴은 “왜 나는 안 되니?”라고 저주를 자청한다. 이것은 좋아하는 여자와 잘 수 있다면 앞뒤 가리지 않는 10대 남자아이다운 무모한 행동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이 장면에서 폴을 비웃거나 동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애절한 멜로로도 코미디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채 <팔로우>는 미숙한 열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한편 영화에서 최초로 악령의 존재를 의식하는 장면이 “인생을 바꾸고 싶은” 사람을 군중 속에서 지목하고 이유를 맞추는 게임을 계기로 끌려 나온다는 점도 성년 입구의 중대한 이슈와 연결돼 있다. 무엇보다 <팔로우>는 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어떤 특정 연대에도 속하지 않는 세계를 창조해 이 시절이 갖는 섬과 같은 속성을 시각화한다. 아이들은 분첩 모양의 e-북 리더로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70년대 옷을 입고 50년대 차를 몰며, 브라운관 TV로 흑백 특수촬영 SF를 시청한다. <팔로우>는 여자들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태연히 펼쳐지는 피터 스트릭랜드의 <더 듀크 오브 버건디>와 더불어, 영화의 이름 아래 독자적 규칙과 문화로 작동되는 리얼리티를 구축한 2015년의 영화다. 나는 왜 더 많은 영화가 대안적 세계를 발명할 수 있는 이 매체의 특권적 능력을 활용하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스무 살이 되려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그것’은 육체에서 해방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인간에게 평생 달라붙어 있는 섹슈얼리티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오르가슴의 별명은 ‘작은 죽음’이다- 있다.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이 시기의 맹목적이고 천진한 열정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윤리라고 믿는 듯하다. 영화의 결말에서 커플을 이룬 제이와 폴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는 듯 손을 꼭 잡고 경계하는 얼굴로 걸어간다. 둘은 대담하고 어리석게도(!) 더 이상 악을 세상에 전가시키지 않고 서로의 불침번이 되기로 결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팔로우>는 같은 디트로이트에서 촬영된 다른 영화의 제목과 조우한다. 다시,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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