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크롤러 댄 길로이, 2014

by.정한석(영화평론가) 2015-12-24조회 7,830
나이트 크롤러

* 이 글에는 <나이트 크롤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이트 크롤러>의 후반부에는 상황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장면이 한군데 있다. 심야의 격렬한 추격전 끝에 경찰들의 차가 전복되고 살인자의 차도 부서져 도로에 나뒹군다. 밤새 일어나는 말초적인 사건사고 현장을 촬영하여 방송국에 넘기고 돈을 버는 주인공 루(제이크 질렌할)와 그의 조수가 살인자의 자동차 곁으로 재빠르게 다가간다. 루가 먼저 다가가지만 그는 이내 몇 발짝 거리를 두고 멀어지면서 조수를 향해 어서 빨리 저 사람을 가까이에서 찍으라고 재촉한다. 하지만 조수가 다가가자마자 살인자는 총으로 그를 쏘아 살해하고는 차에서 내린다. 몇 발자국 앞에는 루가 카메라를 들고 그를 찍고 있다. 

이때 그 납득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살인자는 몇 초간 루를 잠시 노려볼 뿐 발포하지 않고 뒤돌아선다. 그리고는 잠시 후 뒤 따라 오는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한다. 왜 그런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느 관계도 없다. 주인공의 목숨이 부지되는 그 흔한 장면에서처럼 상대방의 총알이 떨어졌기 때문도 아니다. 살인자가 곧 이어질 경찰들과의 총격전을 위해 총알을 아껴야 한다고 찰나에 판단한 것이리라 추정하는 건 그의 냉철함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눈앞에 있는 루의 조수를 당장에 쏘아 죽인 사람이 아닌가. 그는 냉철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루를 쏘지 않고 얌전히 뒤돌아섰는가. 이 장면의 의문스러운 불투명이 이 영화의 흥미로움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이트 크롤러>는 루에 관한 영화다. 그는 심야의 유혈 낭자한 사건 사고들을 하이에나처럼 쫓아다니며 찍어서 방송국의 아침 뉴스 프로그램에 넘기고 돈을 챙긴다. 장물이나 훔쳐 팔던 중이었는데 우연히 사고 장면 촬영분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걸 두고 루는 사업을 시작했다고 꽤 근사하고 자부심 넘치게 표현한다. 우린 그의 과거를 전혀 모르거니와 그가 혼자 사는 반미치광이라는 사실 외에는 현재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미치광이 루 역할을 맡아 열연한 배우 제이크 질렌할의 연기를 칭송하는 평가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섬세한 연기를 선보였고 독창적인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다만 <나이트 크롤러>가 배우의 열연과 캐릭터의 완성 측면으로만 접근될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예컨대 <나이트 크롤러>는 같은 L.A.의 밤을 배경으로 했던 한 편의 액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마이클 만의 <콜래트럴>이다. 의외로 <콜래트럴>의 빈센트(톰 크루즈)와 <나이트 크롤러>의 루는 여러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빈센트가 L.A.라는 거대 도시에 무지한 이방인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두 인물이 이 도시의 밤을 밤새 헤매고 다닌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들의 활동 시간은 전적으로 밤의 시간이다. L.A.의 밤이라는 배경을 <콜래트럴> 이후에 이렇게 실제적으로 차갑고 적막하며 정신질환적인 정서로 그려낸 영화는 흔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콜래트럴>의 빈센트, <나이트 크롤러>의 루

두 인물 사이의 더 흥미로운 유사성은 이들이 완벽하게 흥정의 달인이며 요설가라는 점이고 그것이 종종 그들의 내재된 광기를 번뜩이게 한다는 점이다. 흥정은 대개 자부심으로 가득한 요설에 의해 그들 쪽으로 유리하게 성사된다. 빈센트가 흑인 재즈 뮤지션을 살해할 때 그가 펼치는 내기의 흥정(빈센트는 자신이 내는 재즈에 관한 문제를 맞히면 살려주겠다고 흑인 뮤지션을 꼬드긴다)은 루가 사람들을 상대할 때마다 발휘하는 그 비열한 사업수완으로서의 흥정과 요설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상 루는 조수가 총에 맞아 죽도록 고의적으로 일을 꾸민 것인데, 그 이유가 바로 ‘자신이 가르쳐 준 흥정의 기술로 도리어 자신에게 (급료를 올려 달라는) 흥정을 걸어 왔다’는 점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둘 다 각자의 사업 때문에 밤을 헤매고 있는 것이지만 그 사업의 형태가 사실은 둘 다 청부업이라는 점이다. 빈센트는 살인 청부업을 하고 루는 촬영 청부업을 한다. 다르게 표현할 때 둘의 사업의 연관성은 더 확실해진다. 둘의 사업은 어원적으로는 같은 일이다. 빈센트는 밤새 사람들을 쏘고(shoot) 다니고 루는 밤새 사람들을 찍고(shoot) 다닌다(그리고 이 어원의 동일성은 우리가 제기한 후반부의 그 의문스러운 장면에서 정확히 어떤 효과를 발휘하고 만다). 빈센트가 지나간 자리에는 루가 오게 되어 있다. 이들이 바로 잔인한 도시의 밤을 완성하는 부패한 가상의 짝패일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다. 결국 빈센트는 L.A.의 지하철 안에서 쓸쓸하게 싸늘한 시체로 죽어 갔고 그는 밝고 따뜻한 햇볕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반면에 루는 수사관의 엄포에도 끄떡하지 않았고 이야기를 거짓으로 꿰맞췄으며 밝은 대낮에 제 발로 경찰서를 나와 사업을 번창시킨다. 하지만 이 차이는 귀결의 차이에 해당할 뿐이다. 두 인물의 다른 귀결은 왜 일어나게 된 것인가 재차 물을 때 다음과 같은 점이 핵심이 될 것이다. 자신의 세계와 대상에 대한 지배력 혹은 통제력을 지닌 것인가 그렇지 못한 것인가. 빈센트는 상실했으나 루는 성취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빈센트의 사업은 맥스라는 운전기사를 지배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균열을 맞는다. 루는 완전히 반대된다. 조수가 반기를 일으키자 그 즉시 살인을 꾸민다. 루는 처음에 어떠한 지배력도 통제력도 지닌 바 없었지만 그것을 무섭게 성취해간다. 그런데 어떻게 성취해갔느냐가 정작 중요하다. 그가 다루는 세계와 대상 즉 사건사고의 현장에 대한 연출력을 총동원하면서다. 의외로 <나이트 크롤러>의 서사적 핵심은 루는 얼마나 본질적으로 사악하고 끔찍한 괴물인가 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루는 어떻게 현장에서의 조작적인 연출력을 증대해 가는가에 있다. 그 연출력 증대의 궤적을 따라 그의 악함은 저절로 강조되는 것이다. 이 연출력에의 강조야말로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루가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연출력이란 기껏해야 사소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현장의 경찰들이 윽박지를 때 그는 자신의 촬영이 허가받은 것이라고 거짓말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에 루가 젊은 부부의 집에 잠입해 들어갔을 때를 보자. 그는 벌써 대담해진다. 부부가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루는 냉장고의 외관에 붙어 있는 사진들의 배열을, 시청자가 상상적 서사를 알아서 일으키도록, 보기 좋게 조작한다. 현장의 사물을 연출하는 것이다. 동시에 집 마당에 서 있는 부부를 적절한 극적 앵글로 포착하기도 한다. 이어지는 다음 사건에서는 차량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의 시체를 차 쪽으로 일부러 끌어와 더 참혹한 이미지 구도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이제 그의 연출의 영역은 단지 소도구의 배치가 아니라 효과적인 프레이밍으로 확장된다. 이즈음 루는 방송국 뉴스 담당자에게 자신이 “프레이밍에 신경을 쓰고 있다”며 그로써 오히려 안팎의 경계를 허물고 시청자들의 시선을 화면에 더 오래 잡아끌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루의 연출력은 끔찍할 정도로 과감해진다. 가령 도시 외곽 부유층 백인 저택에서의 일가족 살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루는 인명을 구하려 들기는커녕 현장성 포착이라는 미명하에 죽어 가는 사람들을 방치하고 카메라를 돌린다. 일종의 사건의 방치라는 간접적이지만 치명적인 연출법을 행하기 시작한다. 도주하는 범인들을 일부러 신고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이어서는 더 과감한 연출법이 가해진다. 살인범들이 있는 곳을 경찰에 알려 총격전을 유도하고 미리 기다리다 그것을 찍는 것이다. 간접적인 방치가 아니라 직접적인 유도의 기술이 유용되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질문했던 장면이야말로 루의 연출력이 최고조에 달한 장면이다. 왜인가. 이 장면은 사건 이후의 순간도 아니고, 사건에의 방치도 아니며, 유도도 아니다. 루, 자신이 몸소 나서서 살인하는 장면을 적극적으로 연출하고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의 이 악랄한 연출력을 가장 반기는 것은 역시 루와 거래하는 텔레비전 뉴스 책임자 니나(르네 루소)다. 자신들이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루가 영감을 주는 것 같다며 니나는 결국 감동하여 말한다. 그때 자신들의 일이란 더 자극적이고 더 참혹한 이미지로 가득한 방송, 그녀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목이 잘린 여인이 소리치며 달리는 것”과 같은 이미지의 완성이다. 

따라서 우리가 질문했던 장면에 이르러 우린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왜 상대는 그때 루에게 총을 쏘지 않은 것인가. 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쏘지 못하는 것이다. 루의 카메라가 상대방의 총보다 더 과격하고 힘이 세며 상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루의 연출력이 상대의 살의보다 더 강력하고 악랄하기 때문이다. 더 센 짐승 앞에서 물러나는 약한 짐승처럼 상대는 돌아선다. 루가 카메라를 든 자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마치 총을 들고 겨누고 있는 것처럼 상대에게 맞서고 있다. 따라서 물러서지도 않고 도망갈 기색도 없다. 마치 그의 손에 들린 카메라로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죽일 수도 있으리라는 당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론 카메라가 당장에 눈앞의 상대를 쓰러뜨리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루의 카메라가 상대방의 총보다 훨씬 더 센 것이다. 총이 카메라를 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든 자가 총을 든 자를 존재론적으로 제압하고 있는 상황. 이것이 두 악한이 마주하여 일으키는 이 장면의 흥미로움이다. 

우리는 총을 쏘는 것과 카메라로 찍는 것이 하나의 단어(shoot)로 계열화될 수 있음을 미리 지적했다. 사람을 쏘고 다니는 남자와 사람을 찍고 다니는 남자가 이 순간 격돌하였을 때, 이 영화에서라면 가치의 면모에 있어서 동일하게 악한 두 인물이 격돌하였을 때, 쏘는 자는 찍는 자에게 결코 대항하지 못한다. 루의 찍는 행위가 연출이라는 전체에 직접적으로 해당한다면 상대의 쏘는 행위란 루의 그 연출 계획안에 들어 있는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 카메라와 총 사이에 놓인 악의 완력 관계는, 이 영화에서 루가 행하는 카메라의 악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 잔혹함인지 역설하고 있다. 어느 날 아무런 정보도 예고도 없이 그저 좀 대강 보아도 되는 스릴러이겠거니 하고 보게 된 <나이트 크롤러>에서 문득 내가 접한 매혹의 지점들이 바로 이상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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