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클린트 이스트우드, 2016

by.정지연(영화평론가) 2016-12-15조회 7,712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이상한 일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2016)(이하 <설리>)에는 단 한 명의 죽은 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설리>는 2009년 1월 15일, 전 세계에 알려진 실화 사건에 기반한 일이다. 이 사건이 세계적인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55명을 태운 민항기가 사고로 인해 비상착수를 했는데, 승무원 한 명의 경미한 부상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죽거나 실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죽을 수 있었으나, 모두가 살아남게 된 사건. 미디어와 대중들은 그 기적적인 ‘생존’에 열광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반대로 그들 누구도 ‘죽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같은 말인 것 같지만 방점이 다르다. 어떻게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진부한 응답은 기장 설렌버거(설리)의 영웅담에 그치겠지만, 이스트우드는 자꾸만 현실에선 벌어지지 않았던 설렌버거의 실패를 상상한다. 

<설리>에 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이전 그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죽음’을 기록하는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지속된 그의 초기 서부극은 ‘죽은 자’가 귀환해 복수를 가하거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영화였다(<평원의 무법자High Plains Drifter>(1973) <페일 라이더>(1985)).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지는 영화들은 아예 유령학에 가까웠다. 이 유령학의 핵심에는 현재로 침입해오는 과거의 망령들, 죄의식, 혹은 죽은 자를 증언하는 강신술사가 등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의 모든 영화에서 등장인물은 죽음을 맞이하거나 사라졌다. 가령 <미드나잇 가든Midnight In The Garden Of Good And Evil>(1997)과 <히어애프터>(2010)는 죽은 자와 대화하는 자들에 관한 영화이다. 산자와 사자의 공존, 죽은 자들은 현세를 떠나지 못하고 자꾸만 말을 건네거나 복수를 감행한다. <퍼펙트 월드>(1994)나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는 등장인물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화자들의 기억 혹은 편지에 관한 영화이다. <미스틱 리버>(2003)는 죽음이 예정된 자들의 벗어날 수 없는 잔혹한 숙명적 세계에 관한 영화이며,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어버린 <그랜 토리노>(2008)는 아예 장례식으로 시작해 그 자신의 죽음으로 마감하는 ‘비가’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그의 최고작들로 언급되는 <용서받지 못한 자>(1992)나 <아버지의 깃발>(2006)은 영웅 신화를 해체하는 영화임과 동시에 ‘과거’의 망령 혹은 죄의식이 현재를 증언하거나 기억의 책무를 남기는 영화들이다. 그 과정에는 무수한 죽음들이 필연적으로 수반됐다. 2010년대, 그의 필모그라피는 흡사 바이오그라피 시네마에 가까웠다. 미국의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던 FBI의 에드가 후버를 그린 <제이. 에드가>(2011)나 이라크 전쟁에서 활동한 미군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에 관한 <아메리칸 스나이퍼>(2014) 그리고 이번 영화, 허드슨 강의 기적을 그린 <설리>까지. 특히 <제이. 에드가>나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주인공의 ‘죽음의 순간’이 중요한 작품들이다. <제이. 에드가>에서 후버의 죽음은 무서운 권력을 창출하고 지배했던 역사적 인물의 비장함이 아니라, 자신의 침대 아래로 처박힌 한 인간의 늙고 추레한 살덩어리, 죽음 그 자체의 쓸쓸함에 관한 소묘였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라크 전쟁이 만든 미국적인 영웅의 정당성과 딜레마, 그러나 결국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던 그 이라크 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살해당하고 마는 삶과 정치의 아이러니를 피력하는 작품이었다.

U.S. Airways Flight 1549 [출처]huffingtonpost.com

그런데 <설리>에선 아무도 죽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 속 한 구조대원이 한 승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는 날입니다.” 아마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우연적이건 필연적이건(혹은 주인공이건 주변 인물이건) 그 어떤 죽음도 묘사되지 않은 건 이 영화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아흔을 바라보는 미국의 완전작가 이스트우드는 이미 알고 있다. 위대하고 두터워 보이는 삶들이 사실은 얼마나 위태롭고 우발적인 방식으로(혹은 필연적인 숙명으로) 죽음의 순간들과 공존하는지 말이다. <설리>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눈 건 고작 208초의 순간이었다. 설렌버거 기장도 말하지 않는가. “42년 동안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는데, 고작 208초의 시간이 나를 설명한다”고 말이다. 그 208초의 시간이 155명의 사람을 살렸고, 설렌버거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반대를 가정한다. 모두가 살아남았지만 모두가 죽을 수도 있었던 그 208초의 운명 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는 설렌버거의 비행기가 허드슨 강이 아니라 뉴욕의 마천루로 치달아 거대한 폭발과 함께 무수한 죽음을 발생시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물론 이 장면은 영화 서사 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아니다. 영화는 이내 그것이 주인공 설렌버거의 ‘악몽’임을 드러낸다. 미국의 영웅 설렌버거는 이 영화 속에서 ‘악몽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자’로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순간, 자칫 죽음의 208초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그 고통과 불확실성의 순간으로 영화 속 설렌버거는 자꾸만 소환된다. 조사위원회의 회의나 청문회에 불려 나가 그 시간을 진술하는 실제적 순간으로의 소환 외에도 그는 악몽과 환영, 기억의 방식으로 자꾸만 그 자리에 불려 나간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누운 잠자리의 악몽으로, 꺼져있는 TV의 환각으로, 그리고 심지어 젊은 여성이 그의 볼에 감사의 키스를 한 직후에도 그는 창밖 뉴욕의 도심 풍경을 보며 자신의 비행기가 빌딩으로 충돌해 화염에 휩싸이는 환영을 보게 된다. 설렌버거는 영화 속 대사를 통해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돌아가는 지점은 사고의 순간, 그 208초의 시간 속이다.

죽음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으며, 명백한 자기 확신과 명예율로 살아가는 단독자들. 이런 캐릭터는 고전기 서부극의 남성 영웅들이었다. 60년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르지오 레오네에 의해 그러한 반영웅 캐릭터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표면적으로 단일하고 명백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어떠한 내적 균열과 불안 혹은 자기모순에 찬 존재들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용서받지 못한 자>를 만들었을 때, 그 영화는 단순히 서부극의 90년대적 부활이 아니라, 자신의 스타 이미지(반영웅 아이콘)를 해체하는 영화였으며 서부의 신화를 탈신화하는 영화, 이상화된 영화적 시간을 현실의 시간으로 되돌리는 영화였다. <아버지의 깃발>은 그 정점에 있는 영화였다. “전장을 모르는 자들은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하지. 선과 악, 영웅과 악당,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2차 세계 대전 중 이오지마에서 벌어졌던 참상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노인은 후대의 젊은이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웅은 국가나 사회의 필요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며, 그 영웅으로 호명된 존재 자체도 그 신화 속에서 희생되어 가는 존재들이었다. 영화 속 이오지마에 깃발을 꽂은 영웅으로 조작된 인디언 아이라와 위생병 닥은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영웅의 거짓 선동 속에서 진짜 영웅들, 전장에서 무수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자리, 즉 “죽은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며 항변하곤 하였다. 

<설리> 역시 명백히, 이스트우드가 늘 묘사해왔던 영웅 신화를 해체하는 궤적에 있는 영화이다. 155명의 승객이 단 24분 만에 전원 구조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미디어와 대중은 즉각적으로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그를 대중사회의 영웅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 앞에 두려웠으며, 불안과 회의 속에서 자기 확신을 하지 못한 채로 ‘두려움의 반복강박’(꿈에서 같은 자리로 자꾸만 되돌아가는 악몽을 표현하는 프로이트 용어)에 시달린다. 아내와의 대화 속에서 그는, 어쩌면 위원회 결정에 의해 퇴직금과 연금을 박탈당하고 소유하고 있는 빚과 건물을 잃을지도 모르는 노후에 대해 걱정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155명 전원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잘못을 저지를 뻔했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과 책무감에 시달린다.

<설리>(2016) <아버지의 깃발>(2007)
가장 심플하고 명백해 보이는 이스트우드의 이번 영화 <설리>는 의외로 그의 가장 복잡하고 치밀하게 구조화된 걸작 <아버지의 깃발>과 같은 영화이다. 두 영화가 같다는 것은 서사적 구조와 테마, 그리고 ‘진짜’ 영웅들을 복권시키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설리>가 설렌버거의 악몽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깃발> 역시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노년의 닥(의무병 존 브레들리)의 악몽으로 시작된다. 꿈속에서 그는 2차 대전 중인 이오지마의 격전지에 홀로 서 있다. 고통에 찬 병사들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정작 그는 아무도 없는 전장에 홀로 서 있다. 그는 텅 빈 전장에서 두려움과 죄의식에 눈물을 흘리다 잠에서 깨어난다. 죄의식과 두려움의 반복강박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은 이제 진짜 역사와 기억을 증언해야 한다. 이스트우드는 그 방법론으로서 ‘플래시백’을 사용한다(이스트우드의 주된 수사학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플래시백은 과거와 현재를 서사적으로 연결하는 기능주의적 장치이지만, 이스트우드에게 플래시백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복권이자 진실의 구조이다. 그리고 때로는 죽은 자의 기억이자 증언이며 죄의식의 공유기법(서사적 시각화)이기도 하다. 

먼저 <아버지의 깃발>은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소급하는 영화이다. 3명의 영웅 중 닥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과거의 시간을 추적하고, 살아남은 생존자들로부터 2차 대전 중 벌어진 진실을 추적하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증언과 기억에 따른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당시 이오지마의 영웅으로 위장된 아버지들이 결국 어떻게 국가로부터 이용당하고 버려졌는지, 그 과정에 그 아버지들이 어떠한 부대낌과 죄의식을 평생 강요당해야만 했는지를 기록한다. 파편적인 증언들은 영화의 중반부에 이르러 조각난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의 진실로 그림이 그려진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가 걸작에 반열에 오른 진짜 이유는 영웅 신화의 진실을 폭로해서가 아니라, 진실의 순간 이후에 맞이하게 될 ‘애도와 상기’의 시간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아이라는 거짓된 깃발 퍼포먼스의 강요에 “죽은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말한다. “전장에서 내가 한 건, 내가 본 건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난 영웅이 아니다.” 이 말과 함께 그는 국가에 의해 버려진다. 영화는 후반부 영웅으로 호명됐으나, 그 거짓 신화에 홀로 저항하고 거부했던 닥의 죽음을 묘사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닥의 아들은 “세상에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릴 위해 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한 방식”으로서, 즉 애도의 방식으로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의 맨 마지막을 닥의 소망이미지로 대신한다. 잘려나간 시체들의 무덤이 아니라, 혹은 누군가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할 수 없는 전장의 두려움이 아니라, 평화로운 해변에서 아름다운 청춘의 모습으로 일군의 병사들이 자유롭게 수영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닥의 시선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과 함께 오는 진짜 이오지마의 영웅들(평범한 군인들, 영웅 신화에 이용당한 병사들), 그리고 참혹한 전장의 풍경들.

<설리>는 테마와 구조의 유사성을 공유하지만 정반대의 방식으로 같은 영화이다.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이며, 국가나 조직의 필요에 의해 영웅으로 조작된 사기극이 아니라, 오히려 회사로부터 손실의 책임을 강요당하는 일개 항공사 기장에 관한 영화이다. 국가나 대의명분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이 자신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는 책무에 관한 영화이고, 그 과정의 완결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회의하고 두려워하는 보통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죽음을 이용해 영웅으로 올라서는 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통해 소소한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수주의자로 낙인찍힌 이스트우드의 세계는 종종 남성 마초이즘과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적 이상을 찬미한다는 점에서 불편한 지점이 내재하지만, 그러나 우파 파시스트로 매도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시선과 태도가 존재한다. (심지어 한국적 정치 프레임에서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평가한다면 우파는커녕 좌파 극단주의자로 매도될지도 모른다. 전쟁의 광기와 불모함, 국가 권력의 폭력과 기만, 정치적 조작을 폭로하는 영화들, 기계적 시스템의 비인간성에 저항하는 영화들, 심지어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들이지 않은가) <설리>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그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수행해내는 소시민들의 일에 대한 책무와 공동체적 연대로부터 진짜 영웅성을 발견해내려는 의지의 영화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 설리는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나’라는 영웅이 아니라, ‘우리’(승무원들, 승객들, 구조대원들)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책무와 연대에 대해 언급하고, 엔딩 크레디트에 진짜 설렌버거를 통해 “155는 그저 생존자의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의 집합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설리>는 죽음을 통해 진실을 피력했던 이스트우드가 이번엔 죽음에 거의 가 닿을 뻔했던 삶의 순간으로부터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삶과 희망은 이스트우드에겐 낯선 화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죽음과 절망의 반대극이라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이다. 게다가 여전히 이 영화에서도 그는 젊은이들의 치기가 아니라 삶을 오래 살아낸 노장의 원숙함과 혜안이 사건을 해결하고, 냉정하고 수학적인 기계적 시스템의 세계(비행 시뮬레이션)가 아니라 ‘휴먼 팩터’라 말하는 인간적인 판단과 선택을 신뢰한다.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기자는 이스트우드와 톰 행크스에게 트럼프 선거기간,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작업할 수 있었는가를 질문했다. 이스트우드는 잘 알려진 대로 공화당원으로서 트럼프를 지지했으며, 톰 행크스는 민주당 지지자였다. 이스트우드는 자기가 겪어온 역사적 시기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의 변화과정을 언급하며, 적어도 그는 사람에 따라 다른 정치적 의견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한다. 이에 기자가, 타인의 정치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점에서 당신은 ‘리버럴리스트’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수긍했다. 

- 사족(그러나 <설리>가 올해의 베스트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 

이스트우드는 <설리>에서 허드슨 강의 기적으로부터 2001년 9.11의 트라우마를 상기한다. 민항기가 뉴욕의 빌딩과 충돌하며 빚어진 참상의 이미지들은 이 영화 속에서 설렌버거의 악몽으로 재현한다. 두 재난은 모두 뉴욕이 주인공이었으며, 하나는 수천 명의 삶을 앗아간 재앙으로, 다른 하나는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삶의 미래로 이어졌다. 허드슨 강으로 비상착수하기 이전에 상황들, 설렌버거의 악몽과 환상, 그리고 실제 비상착수 당시 민항기가 강으로 저공 비행하는 순간의 위기를 직감한 불안한 목격자들의 시선 쇼트들은 명백히 9.11의 트라우마이자, 208초가 갈라놓은 죽음의 잠재적 이미지들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고기에 간신히 탑승했던 한 청년의 말처럼 ‘오늘은 해피엔딩’으로 귀결됐다. 불과 25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1,200명의 구조자들이 사고기 주변으로 몰려왔다. 아침 출근 선박들과 전문 구조요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객을 가장 먼저 탈출시킨 승무원들의 행동들. 실제로 설렌버거는 승객들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침몰해가는 항공기 내부를 두 번이나 들어가 혹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승객들을 살펴봤으며, 제일 마지막에 빠져나왔다. 

이 순간 우리에게 <설리>는 어쩔 수 없이 세월호와 겹쳐지고, 슬픔과 회한의 시간으로 내몰린다. 모두가 살아나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300여 명의 삶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미국의 출근 선박들이 사고기 주변으로 제일 먼저 달려갔던 것처럼 우리도 주변 어선들이 제일 먼저 달려가 그나마의 생존자들을 구출했지만, 그냥 거기서 멈춰버렸다. 제일 먼저 도망친 선장과 승무원들, 납득 불가능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건과 시간이 아직 그곳에 침몰해있다. 위정자들의 음모와 태만, 폭력이 여전히 거기에 있다. 이스트우드는 모두가 살아남은 허드슨 강의 기적으로부터 혹시 발생할지도 몰랐을 참사의 이미지, 죽음의 이미지를 자꾸 상기하며 현재의 희망에 대해 역설하지만, 우리는 그 반대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시대의 알레고리)에 따라 그 자리에서 수장당한 300여 명의 죽음에 대한 무력한 방관자로서의 트라우마, 죄의식과 분노.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이스트우드와 반대로 죽음 속에서 가상의 구원을 그려내는 것이다. 어느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으로 시작된 ‘희망의 고래(아이들을 제 몸에 실어 날아오는 고래 일러스트)’가 SNS에서 공유되고, 촛불을 든 광화문에서 가상의 증강현실로 등장하고, 다시금 어느 건축가에 의해 실제 ‘고래와 아이들’ 풍선으로 등장하기까지, 우리는 그저 가상의 상상물을 구축하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위한하고 기억하고 애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스트우드는 <제이. 에드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과 좌파 이념에 대해 폭력적인 척결을 자행했던 에드가 후버의 말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개개인이 소중하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다. 삶은 인간이 만든 시스템을 초월하는 의미를 지닌다.” “도덕이 무너지면 선한 자는 아무것도 못하고, 악한 자는 번창한다. 모든 시민들은 자신의 가정과 아이들에 대한 위협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과거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 사회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절대로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결코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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