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내 사랑 도리스 되리에, 2016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16-12-19조회 4,332
후쿠시마 내 사랑 스틸이미지

<후쿠시마 내 사랑Gruße aus Fukushima>은 독일 감독 도리스 되리에의 신작이다. 국내의 씨네필 관객들은 도리스 되리에를 아마도 여전히 <파니 핑크>(1994)라는 로맨틱 코미디로 많이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되리에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그 작품 이후로도 극장용 영화뿐만 아니라 TV 영화, 다큐멘터리, 문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15여 편 이상의 영화를 연출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꾸준히 자신의 영화세계를 구축해온 중견작가가 되었다. 되리에는 <파니 핑크>에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관계에 서툴고 어설퍼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여성 캐릭터를 낙천적이고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특별한 재능을 보여 왔다. 그 외에 그녀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특징으로는 <내 남자의 유통기한Der Fischer und seine Frau>(2005)과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Kirschbluten-Hanami>(2008)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과 충돌을 들 수 있다(특히 일본 문화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유명하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유쾌한 소동극을 만들며 해방적 순간의 찰나적 즐거움을 선사하곤 한다. 

고백 하나를 하자면, 사실 나는 되리에 영화를 한 번도 온전히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사회에서 배제되고 비가시화된 여성들이나 서로 다른 소수자들 간의 우정과 연대를 끈질기게 그려온 그녀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해소되지 않는 불만을 가져왔다. 되리에 특유의 낙관주의가 유발한 순진함은 그녀의 인물이 겪는 좀 더 구조적이고 심각한 갈등을 개인들 간의 위로나 오리엔탈리즘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간문화적 조우의 클리셰로 손쉽게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내 사랑> 역시 이런 비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요 몇 년간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였고, 그야말로 ‘사사롭게’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도리스 되리에가 던지는 ‘작가성’에 대한 질문 때문이었다. 되리에는 우리가 흔히 ‘작가적인 것’으로 범주화하는 관습적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진지하지만 날카로운 성찰, 냉정한 거리 두기, 비극적 영웅주의, 폭력적 위험을 감수하면서 극단을 추구하는 예술적 의지, 묵직한 울림,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이라는 성별 같은 것 말이다. 반면 그녀는 여성 감독이고, 사안을 가볍게 다룬다고 가정하는 ‘로맨스가 섞인 소품 드라마’와 코미디의 장인이며, 심각한 상황에서도 낙천적이고 유쾌한 태도를 유지하고, 고독한 영웅보다는 늘 우정이나 연대에 집중하며, 때로는 둔감한 문화적 클리셰를 사용한다. 하지만 정말로 되리에의 친밀한 낙관주의와 유쾌한 코미디는 진지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기에 부적절한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코미디를 만들어낸다면 정말로 작가적인 것 아닌가? 일관된 작품세계를 구성해온 그녀는 왜 작가로서 진지하게 잘 논의되지 않는가?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다룬 <후쿠시마 내 사랑>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주는 영화다. 놀랍게도 되리에는 몇 년 전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대규모의 비극적 재난을 코미디로 다룬다. 심지어 이 영화에는 실제 지진 당시의 푸티지가 간헐적으로 삽입되기도 하다. 그럼에도 집단적 트라우마와 코미디를 융합해 ‘트라우미디(traumedy)’ 또는 재난 블랙 코미디를 만들어낸 그 상상력과 대범함은 놀랍다. 

독일 여성 마리는 자신의 잘못으로 결혼을 망치고, 상실감을 치유하고자 후쿠시마에 온다.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불안정한 마리는 ‘Clowns4Help’ 소속의 광대로 지진 피해 지역의 피난민들을 위로하는 자리에 자원한다. 그러나 광대 공연은 거의 대부분 여성 노인들로 구성된 캠프의 피난민들과 소통되지 않고, 마리는 좌절감에 빠진다. 되리에는 서로 다른 문화 간의 불통을 낯선 세계에서의 외국인의 이질감을 일방적으로 전시하는 ‘번역불가능성(lost in translation)’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서구 1세계 백인 여성의 위선이 그녀 스스로를 어떻게 함정에 빠뜨렸는지를 부조리 코미디를 통해 드러낸다. 마리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자를 찾는 정서적 하이에나다. 그녀는 공연에서 냉정한 반응을 얻은 후 마을의 중과 사케를 마시며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곳에 있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여행의 이유를 털어놓는다. 개인의 고통이 가장 커서 자기 상처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자신의 영향력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이 서구의 백인 여성은 자신의 도움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도, 그럴 만큼 약해 보이지도 않는 피난민들과 애초에 조우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웃음’은 뛰어나게 표현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한 성찰 또한 깊이 있게 서사화된다. 로우 앵글의 바스트 쇼트로 어색하게 개별 인물들을 포착하는 방식은 환경의 부적응자가 된 주인공들의 당혹감을 만화적 프레임으로 표현한다. 이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낯선 땅과 언어와 사람들에 둘러싸인 마리만이 아니다. 자신의 일상적 공간이 방사능측정기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제한금지구역이 되고 유령이 출몰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사토리 또한 환경의 부적응자가 된다. 광대는 스스로를 희화하하며 공연하는 동안에는 자신을 보고 웃을 권한을 타자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마리는 자기 중심성과 힘의 우위를 놓지 않는다. 마리가 진정으로 광대가 되는 순간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폐허의 집으로 돌아간 사토리와 함께 기거하면서부터다. 그 집에서 마리는 게이샤였던 사토리에게 끊임없이 타박을 듣는다. 어설프게 마루를 닦고 차 마시는 법을 교육받을 때,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힐난을 들을 때, 그리고 마리가 “You are elegant”라고 사토리를 칭찬하자 “You are like elephant”라는 어이없는 답을 들을 때. 힘의 역학 관계가 바뀌면서 마리는 의도치 않게 사토리와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그러나 흑백의 단조로움과 불협화음의 묵시론적인 피아노와 전자음들은 마리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사토리의 무례함을 불쾌하거나 우스꽝스럽지 않은 시적 부조리로 승화한다. 특히 절제되어 있고 단호한, 작은 몸의 나이든 아시아 여성과 일본의 전통적 가옥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덩치와 발걸음을 지닌 거침없는 몸짓의 젊은 백인 여성의 신체언어가 문화, 세대, 지역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관찰하는 카메라는 그야말로 스펙터클하다. 여성의 신체언어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그것의 사랑스러운 활용은 심지어 문화충돌 클리셰의 진부함을 가볍게 넘겨버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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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독성 폐기물을 담은 검은 비닐봉지들이 가지런히 대칭을 이루며 쌓여있는 가운데 인형, 가구, 침구 등 일상의 흔적이 흩어진 초현실적, 묵시론적 폐허를 배경으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 둘 사이의 우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함께 집 앞의 나무에 매달려있다 쓰나미가 덮치면서 쓸려나간 애제자 유키를 사투 속에서 자신이 밀어낸 것 같다고 토로하는 사토미의 비통함과 죄책감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재난의 여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삶은 왜 계속되어야 할까? 영화는 그 답을 절대로 마리가 찾도록 하지 않는다. 그 답은 오히려 사토리에게 있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되리에는 반핵 피켓을 들고 발전소 앞에서 시위를 하는 나이든 일본 여성들의 다큐 사진을 몽타주해 보여준다. 이 비극은 단순한 자연적 재앙이 원인이 아니다. 마리가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투덜대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떠나는 것처럼, 일본 3.11 재난도 인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살아갈 삶도, 미래로의 시간도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송전탑 반대 시위에 나선 밀양 할머니들처럼 이 여성들은 삶의 터를 떠나지 않고 책임을 지고 바꿔나가고자 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미래의 연대기」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말한 것처럼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은 공범자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이 직접적으로 오마주하고 있는 <히로시마 내 사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알렝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히로시마와 느베르라는 공간으로 은유화 된 두 남녀, 침묵을 매개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시간여행, 기억과 영화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 등 진지하고 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후쿠시마 내 사랑>은 침묵의 자리에 여성신체의 언어를, 시간여행에 실수를 인정하고 미래를 책임지려는 나이든 여성들을, 영화이미지의 존재론에 웃음에 대한 성찰을 놓는다. <후쿠시마 내 사랑>의 코미디와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연대하는 여성들 간의 연대는 <히로시마 내 사랑>의 침묵의 미학과 묵직한 성찰만큼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곧 오랜 경력 속에서 장인의 능숙함과 지혜를 갖게 된 한 작가가 어떻게 어떤 순간에도 낙관주의를 잃지 않는 코미디의 대가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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