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어 있지만 웃는 얼굴로 <원점>(이만희, 1967), <제보자>(임순례, 2014)

by.김철홍(영화평론가) 2025-02-26조회 206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비평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보면 늘 표정이 어두워지게 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아보려 한다. 밝은 얘기를 하고 싶다. 나는 지금 웃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또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한 남자가 어둠 속에서 등장한다. 이만희 감독의 1967년 작 <원점>의 오프닝이다. 양복 차림의 남자는 서류 가방을 든 채 건물의 지붕 위를 걷는다. 그는 곧 옥상을 통해 건물에 잠입하여 어떤 중요한 서류를 훔치는데, 그러다 이를 방해하는 악당을 만나 몸싸움을 펼치게 되고, 결국 그 자를 살해하게 된다.

이 13분짜리 오프닝 시퀀스에는 이게 전부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상한 부분들이 많다. 그에 관한 자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정성일 평론가가 목소리 코멘터리를 남긴 KOFA코멘터리극장 영상을 통해 확인하면 좋을 것이고,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특별한 부분은 악당의 사인이다. 영화에서 악당은 ‘끼임사’한다. 남자를 잡으려다가 건물 문 앞의 내려오는 셔터에 얼굴이 끼어서 말이다. 끼인 얼굴의 표정은 밝지 않지만, 나는 지금 이 장면을 떠올리며 킥킥거리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장면의 웃음 포인트는 이 끼임으로 인해 남자가 자신의 본 목적인 서류를 챙겨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악당이 셔터에 끼이는 순간, 남자의 서류 가방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셔터와 딱딱한 서류 가방 사이에 악당이 끼는 바람에, 남자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원치 않는 살인을 저지른 것도 억울한데, 그로 인해 자신의 작업에 실패까지 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더 눈길이 가는 것은 분명 악당이다. 악당은 비록 범인을 잡는 것에는 실패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니 자신의 얼굴을 내려오는 셔터에 바쳐(또는 받쳐), 회사의 중요한 기밀이 유출되는 것을 막아낸다. 영화는 그의 끼인 얼굴을 잠깐 동안 보여주는데(그리고 곧이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이 오른다)… 아, 나는 지금껏 본 영화 중에서 이토록 짠한 악당의 퇴장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것일까. 과연 무엇을 위해 그곳에 자신의 얼굴을 밀어 넣었던 걸까. 대체 그 페이퍼엔 무엇이 적혀 있던 것일까.
 
악당과 몸싸움을 하기 직전, 페이퍼를 훔치려는 양복 차림의 남자(석구)

페이퍼에 적힌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땐 웃게 되지만, 비평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늘 어두운 표정을 짓게 된다. 비평 같은 걸 쓰려고 할 때 내 얼굴은 마치 어디에 끼인 듯한 표정이 되곤 하지만, ‘페이퍼에 무엇이 적혀 있었던 것일까’ 같은 비평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상상을 할 때는 만면에 미소가 번진다. 예전엔 그 끼인 자리에서, 영화와 현실 사이의 비좁은 틈에 내 큰 머리를 억지로 들이민 채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면, 언젠가부턴 그냥 자연스럽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곳에서 출발해 보려 노력하고 있다. 그게 내 작업과 미래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따져보는 건 이제는 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비평에 대해 생각할 때는, 그에 관한 걱정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표정이 어두워지는 거고, 또다시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등장하는 거고, 그러면 나는 황급히 13분 뒤로 넘어가 끼임사한 또 다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런데 바닥에 누워 있는 이 남자. 처음에 등장한 양복 차림의 그 남자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앞서 얘기한 <원점>의 오프닝은, 분명 두 인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결국 한 명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나와, 또 다른 나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기서 나는 중요한 페이퍼를 훔치러 잠입한 남자이기도 하고, 그걸 막기 위해 싸우는 악당이기도 하다. 훔치는 데 실패한 사람이기도 하고, 지키는 데 성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에 성공하고 무엇에 실패한 것인지, 보고 싶지만 동시에 보고 싶지 않은 그 내용이 무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실 더 알고 싶은 건 정성일 평론가의 페이퍼에 무엇이 적혀 있을까이다. 그가 진행하는 영화 토크 행사에 한 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궁금해할 그 두꺼운 A4 페이퍼 뭉치를 훔치고 싶다. (그라면 지금까지 작성한 모든 페이퍼들에 표지를 붙여 오래된 캐비닛에 연도별로 보관하고 있지 않을까?) 그걸 보면 뭔가 깨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이를 막으려는 또 다른 내가 있다. 다른 사람의 페이퍼를 절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나. 그리고 다른 사람의 페이퍼를 보지 않은 채 온전히 나의 방법으로 써낸 나의 페이퍼를 읽고 있는 내가 있다. 그는 웃고 있다. 그럼 정성일 평론가는 <원점>의 코멘터리 원고를 쓸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페이퍼에 적힌 내용보다 그가 그걸 적을 때 지은 표정이 더 궁금하다.
 
   
페이퍼를 훔치려는 남자(훔치는 데 실패한 사람)와 그를 막으려는 악당(지키는 데 성공한 사람)

나의 원점을 떠올리면 씨네21 사무실로 당선 인터뷰를 하러 갔던 날이 생각난다. 속으론 정말 기분이 좋았지만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주 가끔은, 비평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다가 평소보다 더 어두운 표정이 지어질 때는, 그 인터뷰를 하러 가지 않았어야 했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임순례 감독의 <제보자>(2014)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박해일이 연기한 탐사보도 PD 윤민철이 하는 대사다. “제보자 마음 바뀌기 전에 인터뷰부터 따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본 영화 속의 나만 알고 있(다고 믿)는 무언가를 다른 이들에게 ‘제보’하는 것이 영화평론가가 하는 작업이라면, 나는 애초에 그 제보를 하지 않아야 했거나 했더라도 인터뷰를 하지 않아야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혼자만의 작업으로 만족하지 않고 인터뷰를 해버렸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기에, 자꾸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음 바뀐 평론가의 얼굴을 떠올린다. 언젠가 마주칠지도 모르는 그 얼굴을 상상하면, 표정이 영 밝을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속으론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던 때가 훨씬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마음도 왔다 갔다 하고 표정도 이랬다저랬다 했지만, <원점>은 13분 지점에 멈춘 채 그대로 있다. 이쯤에서 <원점>의 결말이나 다른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겠으나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아보려 한다. 그게 궁금하다면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 영상을 보시기를 권한다. 대신 나는 웃는 얼굴로, 내가 선택한 이 끼인 곳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께 묻는다.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계시는가. 그 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으신가. 나의 페이퍼에 어떤 말들이 적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앞으로 내 캐비닛에 쌓아 놓은 재밌는 제보 거리들을 공개할 수 있는 자리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기꺼이 얼굴을 들이밀 준비가 되어 있다.

 
<제보자> 중



김철홍(영화평론가) l 영화에서 봤다고 하면서 이상한 말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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