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2020년대 전후 시네필 커뮤니티와 영화 속 대화에 관한 단상

by.김신(영화평론가) 2024-11-21조회 437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나는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감상을 즐기기 시작했으며, 2010년대 후반 즈음해서 비평에 보다 진지하게 몰두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비평을 쓰는 일이 내 정체성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2010년대까지는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란 내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그리고 정확히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반추해보건대, 내가 20대를 통과하며 겪어온 삶의 주요한 분기점들이 내가 영화와 비평을 대하는 관점, 그리고 그 관점의 변화와 불가분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느낀다.

나뿐만 아니라 다수에게도 그렇겠지만, 내게 있어 비평이란 언제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밀접한 활동이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본인의 작업과 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 걸 민망해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 꺼리곤 하지만, 나는 내가 과거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는 걸 즐기곤 한다. 글의 문체와 내용, 그리고 그것들이 문자로 새겨졌던 순간의 어룽거리던 공기를 떠올리며, 나는 글을 썼을 당시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구와 만나거나 멀어져 가며 걸어왔는지 하나 둘 반추해보곤 했다. 때때로 흔적으로나마 내 안에 남아 희미하게 가물거리고 있거나, 아니면 사라져버려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느끼는 시절의 잔재를 감촉하며, 그 시절의 감각이 어떤 식으로든 내가 써온 글 안에 박물학적으로 새겨져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자각하면서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나의 글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하는 말, 그가 써온 글에 투영된 시대의 감각에 관해 생각해보곤 했다. 한국영화 몇 편에 대한 생각과 함께, 국내 비평계에 대한 소견을 밝혀야 하는 이 지면에서 이런 이야기로 말을 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코로나 뉴노멀을 기점으로 영화 이후의 미디어가 급격하게 확산해가는 국면에 서 있는 지금의 영화계와 비평계를 떠올려볼 때, 그 공동체가 맞이한 급격한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 중 하나가, 나와 주변의 사람들이 말하거나 쓰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은밀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때때로 우리 시대의 영화 속 대화가 변화하는 양상과도 상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글에 대한 청탁을 받은 직후, 나는 즉각적으로 내가 몇 년 전 경험했던 그러한 대화의 유형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최근의 비평계는 물론 일부 문화예술계가 처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에피소드일지 모른다고 느끼며 곱씹었던 그 대화는 몇 년 전, 내가 한 영화제에서 짧게 일했을 당시에 발생했다.

영화제가 진행되던 어느 날, 스태프 한 분이 갑자기 불미스러운 상황이 생겨 긴급한 공지를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기이한 점은 그분이 사람을 불러 모아놓고도 자꾸 미적거리며 본론으로 단도직입하지를 않는다는 점이었다. 잠시 “음… 어…” 와 같은 말이10초간 이어진 이후에 결과적으로 내가 들은 말은 이랬다.
 

“아, 그…… 여러분 이게 제가 직접 말씀을 드리기는 좀 뭐한데…… 혹시 얼마 전에 약간 논란이 된 적 있는 그거 아시죠?”


……? 나는 이게 당최 무슨 모호하기 그지없는 말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이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3분의 1 정도가 맥락을 전부 다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아, 네네~! 그럼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떠나갔다는 것이다. 그러자 스태프분은 이렇게 말을 이으셨다.
 

“아아… 아시는 분들도 있으시구나!
그럼… 최근에 어떤 분이 그 일이랑 관련해서 약간 문제제기를 하셨었는데 혹시 그건 아시는 분도 있으신 거죠~”


나를 포함한 몇몇은 이게 대체 무슨 화법인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또 몇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까 별 건 아니지만, ‘그거’만 좀 신경 써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걸 더 이상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려고 하셨다. 이에 나를 포함한 몇 분이 당황해서 방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신 건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부연 설명을 요청해서 겨우 내막을 듣게 됐다. 이야기인즉슨 이랬다. 영화제가 개최되는 장소와 관련해서 최근에 SNS에 문제를 제기한 포스트가 올라왔으니 영화제 차원에서 공식적인 대처를 하기 전에는 가급적 관객들 앞에서 ‘그거’에 관해 입을 담지 않도록 신중해달라는 말이었다. 당시에 SNS를 하지 않던 나, 그리고 평소에 영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지 않던 여타의 스태프들이 대화의 맥락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체 그분은 그런 얘기를 왜 그냥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셨던 걸까? 이미 내가 말한 이야기에 그 답이 암시돼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 같은 걸 늘어놓지 않아도 알아들을 사람은 대강 알아들을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거”, “저거”라고만 말해도 대강 맥락을 파악할 정도로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사람이 ‘실제로’ 다수이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을 시도하거나 요청할 필요성 자체가 사멸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술계나 비평계에서 오가는 소식이라는 게 알만한 사정을 공유하는 내부자들에게(만) 다 알려져 있어 별도의 대화나 인식론적 합의를 거칠 필요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전제가 다수에게 묵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접하는 알고리즘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외주화하는 것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해왔던 시대를 지나, 이제 애초에 그런 인식에 합의하지 않은 이가 본인의 내집단에 존재하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 시대. 그래서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가 동반사멸”(이광호)한 시대. 온라인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그…… 어…… 음… ‘거기’(비평계)에서 이런 경향이 더 만연해졌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체감상 이런 경향성이 본격적으로 심화된 기점이 2018년에서 2020년 사이라고 느낀다. 그 시기는 내 친구와 지인들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SNS 계정을 옮겨가던 시기였으며, 무엇보다도 현재까지도 예후적인 여파를 남기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발하며 스마트폰이 일상적 시민의 사회적 관계를 보다 미시적이고 근본적인 수준에서 재편하던 시기였다. 특별히 그 시기 즈음해서 내가 경험한 영화제 일화를 언급한 이유는, 그 스태프 분께서 구사하시던 화법이 어느 순간부터 전혀 예외가 아니게 됐다는 점을 블로그나 각종 SNS의 공론장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영화비평에 처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2010년대 초중반 무렵의 블로그·페이스북 문화와 이 시기 블로그·인스타그램에서 유저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비교하면 그런 폐쇄적 경향성에 입각한 아주 확연한 차이가 발견되곤 한다. 가령 코로나 전후 블로거는 물론 공식적인 지면에 글을 쓰는 평자들조차 본인의 내집단에서만 통용되는 맥락이 남에게도 당연하게 수용될 거라고 전제하는 것은 물론, 그 내집단 밖에 위치한 이들과 애초에 소통을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상정하는 폐쇄적인 화술을 구사하기 때문에 객관화된 언어로 토론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일단 대체 무슨 상황이나 맥락을 지칭하는 건지 알아듣기조차 어려운 상황을 자주 마주하곤 했다. 가령 “이 얘기를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말해진 얘기들”이라고 말하며 본인이 염두에 두고 있는 맥락과 그 맥락에 관해 본인과 내집단이 느끼는 감정이 다른 독자에게도 선험적으로 합의돼 있다고 상정하면서도 도통 본인이 말하는 그 얘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아 공론장에 피로감을 유발하는 서브트위팅과 수동공격적 표현들, 혹은 “이렇게 말하면 분명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 텐데", “보나마나 어떤 식으로 반응할 특정한 부류들”과 같은 표현을 통해 본인의 입장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조차 사전에 다 예측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례들이 여기 해당한다.

이후에 부연하겠지만 나는 이런 식의 개별적 발언들을 일일이 비판해야 한다는 단순한 주장을 펼치려는 게 아니며(보다 현명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설령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발화의 태도만을 문제 삼는 차원을 넘어,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을 배태한 실질적인 원인을 지목해야 한다고 느낀다. 또 개인적으로는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차원에서만 글을 끝내고 싶지 않고, 우리가 적어도 영화와 픽션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지금 직면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을 비롯한 여러 한계로 인해 단지 내가 영화와 비평에 관심을 가져온 시기 동안 비평계와 영화계 내부의 커뮤니케이션이 고립되고 있다는 인상만을 중심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그와 관련해서 다시 말을 잇자면, 최근 몇 년 전부터 나는 예술 비평과 이론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책은 덜 읽고 비평계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접하는 분야의 텍스트나 1차 사료를 직접 파고들거나, 아니면 직접 예술과 무관한 공동체를 경험하자고 다짐하곤 했다. 이러한 실천은 물론 개인적 필요에 따라 수행했던 사항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하나는 블로그나 트위터 같은 각종 SNS 등지에서 전술한 것처럼 직간접적인 공격성을 함유한 언행을 발설하는 유저 혹은 평자들이 너무 증가한 상황으로부터 유발되는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런 분위기와 아울러 점차 폐쇄적으로 표준화되는 비평 글들의 관성에 저항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이 또한 새삼스러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엇비슷한 온라인 서점의 추천 알고리즘, 엇비슷한 SNS 계정으로부터 유사한 정보망을 공유하는 시네필 커뮤니티의 일원들이 한정된 반경과 관점의(가령 실증주의적 사료와 경제적 현실감각에 기반한 정치학적 통찰이 결여된 채 현대 프랑스 철학적 형식논리를 다루는 텍스트만 근친상간적으로 편식하기 때문에 현실과 복잡계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통찰이 아연할 정도로 단순해져버리는 경향성으로 대표되는) 글을 제출하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때로는 적잖은 평자들이 어디서 무슨 글을 읽고 특정한 문장을 인용했는지조차 투명하게 들여다보일 정도로(그걸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은 이전의 나 또한 그런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집단적인 지각의 반경이 수축되고 있다는 점을 체감하곤 했다.

실제로 가령 허문영과 앙드레 바쟁,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와 질베르토 페레스의 글을 탐독한 후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에 관한 아나크로니즘적 애착도를 형성하거나, 유운성 평론가가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리는 소식을 공유하는 다수의 시네필 집단은 종종 영화와 비평에 관한 정보를 얻는 몇 가지 디지털 채널을 일종의 단일 신경망처럼 공유하는 초개체 생물 군집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은 대개 서로 SNS를 팔로우하고 있으며, 팔로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 인터넷 포스트에 입력된 좋아요 버튼이나 댓글을 통해 서로의 흔적을 암암리에 인지하며 은밀한 친밀감과 경쟁심을 공유하는 내집단의 구성원으로 포집된다(이건 함부로 추측한 바가 아니라 내 주변의 여러 젊은 시네필과 비평가들에게 물어봤을 때 거의 다 동의한다는 답변을 들은 사항이다). 이런 생태는 그 자체로는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을 생성하는 문화적 요소로 기능하곤 하지만, 동시에 그 친밀감에 기반한 비평계 내부의 공론장이 점점 불가측한 변수를 수용하거나 건전한 합의를 도출하는 역량을 상실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개인은 온전히 정치적이거나 객관적인 자아의 일면만을 간직한 존재가 아니다. 그가 정치적 존재로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객관성의 영역에 노출되지 않는 사적 영역의 안식처가 불가결하게 요청된다. 하지만 그러한 공사 영역 간의 시공간적 구별을 어느정도 유효하게 전제할 수 있었던 전통적 공동체와 달리, 온라인 공간에서 2인칭적 친밀감의 정동은 네트워크 전반에 보다 탈중심적으로 산포되어 안식만이 아닌 통제의 효과를 산출하기도 한다. 바로 온라인 공론장에 소속된 내부자들의 친밀감을 거스르는 객관화된 논의가 발설되는 것을 강력하게 방지하는 검열의 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나를 포함한 영화계나 인문예술계 네트워크에 속한 평론가들은 본인 이웃들이나 팔로워들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는 논평은 ‘굳이’ 쓰려고 하질 않는다는 얘기다.

비평이란 대개의 경우 상대적 객관성을 염두에 두며 세계를 더 자세하게 해석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반면 아렌트가 “보호받은 존재의 어둠”이라 이른 내밀한 공간은 그런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자아와 무관하게 완전한 의존성에 관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안식처로 기능한다(물론 성숙한 사람이라면 친밀한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킬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니 공적 담론장으로 기능하면서도 동시에 전적인 의존성에 관한 요구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SNS 공론장의 유저들은 점점 이웃이나 팔로워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글을 쓰지 않는다. 써봤자 어차피 토론 같은 건 일어나지 않고 그냥 어느샌가 줄어든 팔로워 숫자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렌트가 말했듯 개인이 소외를 유발하는 공적인 페르소나를 장착하기 이전에 전적인 의존성을 보장받아야만 한다면, 친밀감과 배치되는 담론과 정서를 배타적으로 받아들이는 네티즌들의 심경도 납득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가 가족이나 회사, 또래집단처럼 오프라인에서 안정적인 보살핌의 공동체를 구축하는데 실패한 상황에서, 온라인에서 친밀감을 찾으려는 유저들에게 “온라인에서도 객관적인 태도로 토론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후기 자본주의의 통치술에 굴복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마찬가지로 신중하지 못한 처사이기 때문이다(사실 나도 예전에는 좀 그랬다. 미안하다).

하지만 이 현상은 애초에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한 양면성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유저들이 친밀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온라인 공론장에서 객관적 논의를 창출하는 비평의 역량이 기능 부전에 처한다는 점 또한 솔직하게 시인해야만 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유에서인지 2010년대 중후반을 건너오면서 블로그의 댓글창 같은 곳에서 토론이 벌어지는 일을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유저들은 점점 좋아요만 누르거나 비밀 댓글만 달곤 한다. 2010년대 중반 즈음의 영화 비평 블로그들의 댓글창과 지금의 댓글창을 비교하면 그런 확연한 차이를 체감할 수 있다.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평자들도 애당초 건전한 토론이 발생하기 어려운 내집단의 분위기를 잘 알기 때문인지, 종종 논쟁적 사안이 발생해도 서로 상반되는 기조의 포스트를 올리는 식으로 수동공격적인 기싸움만 할뿐 본인이 당최 누구의 무슨 글을 염두에 두고 쓰는지는 절대 말하지 않는 상황을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어차피 이 공론장이란 대충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청자만을 선험적으로 상정한 채 발화되는 공간으로 변질됐기 때문에 이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이런 현상은 상기했던 것처럼, 합리적 의미를 공유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먼 정동적 소통에 입각한 폐쇄적 화술이 비평계 공동체 내부에 만연해지는 원인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식의 층위를 하회하는 신경학적 회로가 이미 통합돼 “그거", “저거”라고만 말해도 서로 다 알아듣는 상황에서 뭐하러 굳이 의미론적 담화를 조직하기 위한 의식적 노력을 기울인단 말인가?

아마도 최근의 예술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소수의 평자들의 글이 과잉된 영향력을 행사하며 폐쇄성을 조장하고 있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제도 비판이 이뤄졌던 상황 또한 이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평계가 폐쇄화하거나 고립된 현상이, 예술계 바깥에서 미디어와 산업적 환경의 변화가 불가항력적인 압력으로 작용하며 생산과 소비의 흐름을 급격하게 수축하거나 표준화한 후과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예술계 내부에 잔존하는 몇몇 권력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복잡계에 대한 시각을 결락한 표면적 진단이 될 수밖에 없다. 특별히 이 점과 관련해서, 나는 예술계 내부에서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 못지않게, 그 폐쇄성의 원인을 예술계 내부 제도, 혹은 상대적으로 넓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몇몇 평자들의 책임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주장들 또한 마찬가지로 예술계 내부 담론만 소비하는 이들에 특징적인 폐쇄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가령, 영화비평이 이전보다 훨씬 위기에 처했거나 고립된 상황의 원인이 정성일 평론가의 배타적인 태도나 《씨네21》 평론가들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했다는 익숙한 견해들을 참고해보도록 하자. 정성일 평론가가 가끔 왜 저러시나 싶을 정도로 유아론적이고 배타적인 면모를 내보인다거나(가령 최근에 <희생>(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6)이 개봉했을 때 그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숏바이숏과 같은 분석을 불허하는 신비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정교한 분석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다 틀렸다고 말했는데, 이건 틀린 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숏바이숏이 명백하게 가능한 유형의 작품이다) 《씨네21》에서 생성되는 비평이 종종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그 자체로는 타당한 지적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비평계가 수축한 직접적 원인이라고 규정하는 건 기초적인 경제적, 산업적 현실감각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부재하다는 점을 시인하는 처사다.

이 세계가 구조주의나 포스트구조주의처럼 인문예술계에서나 유행하는 담론이 설명하는 권력관계로 축소될 수 있다는 생각은 문약하기 그지없는 젊은 인문예술학도들의 머릿속에서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복잡계가 작동하는 현실의 이치와는 제대로 조응하지 않는다. 중산층이나 인문예술계 바깥에 지인이 몇명만 있어도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정성일 평론가와 《씨네21》이라는 잡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른다. 그들을 포함한 다수의 국민이 비평을 덜 읽게 된 이유는 이 나라 정부와 동시대 산업이 직장생활하고 퇴근해서 유튜브 보는 게 편한 생체리듬을 구조화한 영향력이 훨씬 크지, 그들이 피곤함을 무릅쓰고 골치 아픈 영화를 보거나 비평을 읽기로 결심한 다음, 한달에 원고료를 20만원 남짓 받을까 말까한 《씨네21》의 평론가들이 광고에 밀려 잡지 맨 뒷쪽에 있는 A4용지 2페이지짜리 분량의 비평 지면에서 하고 싶은 말 다 잘라내고 짤막하게 써낸 글이 설득력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언어라는 매체만 다루거나 인문예술계 담론에만 익숙해서 바깥 분야에 문외한인 이들은 이 업계가 고사 직전인 이유가 자체의 잘못에서만 유래했다고 오인하곤 하지만, 사실 객관적 관점에서 보면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책이나 글 같은 건 본질적으로 무기력한 매체다. 그렇기에 유명무실하게 남아있는 잡지나 제도들은 비평의 위기를 촉발한 근본적 원인이 아니라, 이미 외부의 산업적, 경제적 불가항력이 가해진 상황에서 겨우 생존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계든 어디든 예술계 내부자들의 폐쇄성을 필요 이상으로 과격하게 비판하는 이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본인조차 마찬가지로 폐쇄적 시각에 빠져드는 나선에 갇히게 된다. 예술계나 비평계에서 실질적인 원인을 초래하지도 않았으며, 그 원인에 관해 책임지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인식을 외면한 채 상황의 책임을 안쪽으로만 돌리며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데, 사실 그 윤리적 책임 자체가 환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내가 말한 이런 얘기조차 그렇게까지 새로운 통찰은 아니다. 적당한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는 평자들은 다 알고 있지만 내가 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공격적인 팔로워들 심기를 거스르기 싫어서 방 안의 코끼리를 못 본 척하듯 침묵하고 있을 뿐.

비슷한 맥락에서 버나드 조지건은 인문학계가 기술권력이 지배한 작금의 현실에 대해 파급력을 행사하거나 유의미한 해석을 제출하기 어렵게 되면서부터, 산업적으로 파생된 여러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간과한 채 세계를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등 인문학계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담론 간의 사상적 대립으로 축소시키는 현실 인식을 확산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이 글에서는 비평계 공론장이 점차 고립된 상황, 그리고 그게 고립된 원인이 비평계 내부에 있다고 말하며 또 다른 고립이 생성되는 상황의 원인을 몇몇 평자들의 책임으로 환원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그러한 경향성의 근저에 놓여있는 이면의 맥락을 간단하게만 말하고자 한다. 그 후 그 현상이 동시대의 영화에서도 상호연관된 증상을 발현하고 있다는 점을 짚고자 한다. 물론 KMDb 영화글이라는 알만한 사람만 알고 있는 페이지에 게재될 이 글 또한 한정된 유형의 군상에게만 도달할 가능성이 농후하겠지만, 지금 나는 결론을 전제하는 그런 식의 경향을 문제시하는 글을 쓰고 있으므로, 이 문장 이후에는 더 이상 무슨 무슨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는 식의 문장은 불가피한 설명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제할 계획이다.


오프라인에 앞서는 온라인의 우위와 선취매개라는 경향성

위에서 내가 언급한 사항을 염두에 둔다면, 나는 내가 처음 영화를 접했을 때 소속되곤 했던 공동체와 작금의 변화한 공동체를 비교해보며 한 가지 대표적 차이를 거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사람들이 영화나 텍스트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흐름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향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전복되고 있다는 상황이다. 박은하 기자는 언젠가 80년대생과 90년대생이 각각 경험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차이를 변화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학과 선배들이 프리챌 커뮤니티에 가입하라고 했어요.
반면에 지금 세대들은 대학에 가면 “너 오유하니, 아니면 일베하니?”라고 묻겠지요.
즉 과거에는 오프라인을 경유해 온라인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많았다면, 지금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정체성을 확인하는 식이지요.”


그가 2010년대 전후의 상황을 염두에 두며 지적한 소통 과정의 역전을 나 또한 지난 10년 동안 체감하곤 했다. 내가 2014년에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오프라인에서 학과 친구나 선배들이 그 당시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던 <그녀>(스파이크 존즈, 2013), <가장 따뜻한 색 블루>(압델라티브 케시시, 2012),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웨스 앤더슨, 2014)과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같이 보러 가자고 제안해줬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야 나는 각종 영화제 수상작과 걸작 목록을 검색하며 온라인으로 관심사를 확장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 또한 그렇게 알게 된 영화에 관한 정보를 다양한 지인에게 소개해주는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나는 내 주변에 약 열다섯 명의 영화평론가나 영화기자의 MBTI를 알고 있는데, 그중에 외향형은 나밖에 없다), 원래 영화나 비평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다크 나이트>(크리스토퍼 놀란, 2008)처럼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를 좋아하던 친구의 취향을, 내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2010)나 알랭 기로디의 <호수의 이방인>(2013)을 좋아하는 취향으로 바꿔놓은 경험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물론 그때의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영화에 관한 정보를 접했던 과정에서도 온라인의 선험성이 끼치는 영향력을 온전히 삭제할 수는 없을 것이고, 내가 예술과 관련된 학과에 다니고 있었다는 특수성을 배제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영화와 예술에 관한 정보를 접하는 흐름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벡터를 띠고 있었다.

현실에서 영화 얘기를 하는 사람이 드물어진 오늘날 이 벡터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이제 시네필 취향이라고 선험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지인이 아닌 이와 서울아트시네마 같은 공간에 동행하는 일은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오프라인 공동체에서 영화에 관한 정보를 접하는 일이 시네필이나 비평가가 되고 싶다는 자의식의 계기로 작용하는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사정은 비슷한지라 누군가가 종사하고 있는 분야에 관한 전문지식을 사전에 섭렵하지 않으면 국적이 똑같더라도 외국인과 다름 없을 정도로 대화가 교통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2007)에서 어느 미국인과 폴란드인이 각자 자기만의 언어로 떠들어대며 의사소통에 실패하는 장면을 봤을 때, 나는 저 괴상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오늘날 나의 현실감각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느끼곤 했다.

부분적으로 이 상황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공동체의 문제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자아와 친밀감조차 고도로 정보화된 사물 인터넷 경제의 선험성에 의존하게 된 현상과 밀접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범세계적 물류 경제와 디지털에 기반한 고부가 가치 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세계가 우리의 현실에 나타내는 변화 중 하나는, 이전에는 자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일상과 사회적 관계의 물질성에도 보다 많은 지식이 축적된다는 점이다.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는 경제학 서적의 제목이 의아스럽지 않은 것은 물론, 미국 연준의 반응을 참조하지 않으면 부장님의 기분을 이해할 수조차 없는 세계. 그래서 우리의 취향과 일상적 감각조차 대역적 질서와 불가분한 맹약을 맺은 세계. 대학 동아리 같은 현실의 공동체에서 상대적으로 무매개적이었던 우정을 기반으로 성립할 수 있었던 시네필 공동체가 2010년대를 지나오며 점점 사전에 영화와 커뮤니티의 정보망을 공유하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하기 어려워지는 현상 또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동시대 영화의 상황으로 우회를 하자면, 이 변화는 개별적인 영화들 안에서도 의미심장한 징후를 발현하곤 한다. 가령 이제 가령 세르주 다네가 말한 것처럼, 영화 안에서 역사와 사건에 방점을 두는 “지리학의 영화”와 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연의 시청각적 물성에 주목하는 “지질학의 영화"라는 이분법적 계열을 구분하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 자연, 그리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 자체가 전지구적으로 편재한 비즈니스 모델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를 증거하는 예시로, 최근으로 올수록 비판적 성찰의 도구로 기능하는 고도의 전문지식을 학습하지 않는다면 동시대적인 물질성을 재현하는 예술적 과제조차 점점 어려워지는 현상이 관측되고 있다. 가령 내게 2010년대 이후의 지경학적 환경에 관해 가장 놀라운 감각을 제공해줬던 두 걸작, 노엘 버치와 앨런 세쿨라의 <잊혀진 공간>(2010)과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당나귀 EO>(2022)가 모두 나이가 든 남성 지식인 거장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두 영화는 모두 초국적 자본주의의 연결망에 지배된 이 세계의 물질성을 경이로울 정도로 감각적으로 도려낸 보고서다. 하지만 여러 국가의 경계를 초월해 주유하는 카메라의 동선은 세계의 지형학을 고도로 객관화한 지성의 산물이므로, 더 이상 역사적, 지리학적 통찰과 분리할 수 있는 지질학적 감수성을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좌 상단부터 시계 방향, <잊혀진 공간>(사진: “The Forgotten Space”, IMDb),
<당나귀 EO>,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묘>

올해에도 비슷한 경향은 의미심장하게 나타나서 장재현의 <파묘>(2024)나 하마구치 류스케의<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처럼 땅을 주제로 삼는 개봉작에서 토착적 지질과 무관한 고도로 지식인적이고 전문가적인 캐릭터가 등장해 작위적 위화감을 선사하곤 했다(물론 우리가 이미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어진 세계에 실제로 서식하게 된 상황에서 그런 황당한 작위를 전략적으로 도입하는 방식을 기성의 비평적 관점에 따라 비판하는 작업이 과연 얼마나 유의미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반면 그런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에의 접근성과 서사적 감각의 숙련을 결여한 채 유튜브 숏츠를 마구자비로 넘기는 듯한 디지털 기기의 마취적 혼돈에 노출된 젊은 창작자들은 점점 자신이 위치한 장소의 물질성조차 오롯이 담아내길 버거워하는 경향이 발견되곤 한다. 여러 장소와 형식을 부단히 오가지만, 그중 어디에도 융화하지 못하는 청년 몽상가의 일상을 다룬 양근영 감독의 <모르는 이야기>(2023)는 그런 경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례일 것이다. 물론 그 무력감을 촉발한 원인 자체가 기성세대가 빚은 세계의 질서에서 유래했으므로 그 성취도가 미비하다는 점만을 근거로 젊은 창작자들을 비판하는 것만이 온당한 논의는 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다시 오프라인이 온라인 공간에서의 정보를 재확인하는 하위적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논점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일상적 순간의 대화에서조차 유튜브 콘텐츠나 <흑백요리사> 같은 온라인 콘텐츠를 보지 않으면 오프라인 대화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을 종종 직면하곤 한다. 비평계에서도 온라인 공간의 선험성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점점 오프라인 지면의 영향력을 초월하고 있기에, 잘 알려진 잡지의 고정된 지면에서 글을 쓰는 한 평론가 또한 SNS 계정을 만들지 않으면 영향력을 확산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압력을 느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지금부터는 이런 종류의 온라인의 선험성에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된 논의를 떠올려보도록 하자.

리처드 그루신은 언젠가 9.11 테러 이후 미디어에 보편화된 경향을 “선취매개premediation”라는 용어로 명명한 바 있다. 9.11 테러는 글로벌 세계의 지정학적 불화가 선진국 시민의 일상적 생활공간 안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린 상징적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미래의 모든 일상적 위협마저 사전에 제어하려는 욕망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심화됐다. 잠재적 범죄자를 사전에 제압하려는 경찰력에 관한 영화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의 흥행, 그리고 각종 방위 산업과 보험 산업, 제약 업계의 성장은 그러한 제어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사건들이다. 그루신은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핵심적 요소로, 핸드폰이나 노트북과 같은 개인용 디지털 기기의 출현을 거론한다. 영화가 대중에게 이미지를 보급하던 20세기의 과거에 이미지란 롤랑 바르트와 앙드레 바쟁의 말처럼 재현하는 과거의 흔적을 기록하는 매개체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는 일기예보를 하듯 미래의 주식시장, 미래의 기후위기가 우리에게 끼칠 영향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고지해준다. 그리고 그런 정보의 송신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미래의 위협을 사전에 고지받는 것을 허가한 스마트폰과 노트북과 같은 개인용 디지털 기기들이다. 대중적인 예술작품에도 이 같은 선취매개적 욕망에서 비롯된 시대정신은 은밀하게 투영된다. 그래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와 <재벌집 막내아들>(2022)의 진도준(송중기), 그리고 이 분야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도박마: 거짓말 사냥꾼 바쿠>의 마다라메 바쿠처럼 미래에 발생할 변수를 사전에 전부 다 예측하는 비현실적인 수싸움에 능란한 캐릭터들이 동시대 시민의 문화적 자아 이상형으로 출몰하곤 했다.

선취매개라는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공간의 물질성과 사회적 관계를 경험할 때도 사전에 온라인에 집적된 정보를 거쳐가는 현상을 해명하는 데 유용하다. 그리고 그러한 취사선택에 기반한 온라인 공동체들이 점점 고립되는 상황 또한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2020년대에도 완전히 유효한 진단이라는 점을 증거하는 대표적 사례는 바로 코로나19가 확산한 이후 MBTI 검사가 폭발적으로 유행한 상황이다. 코로나19와 MBTI는 서로 우연의 일치로 같은 시기에 확산된 사건이 아니다. 코로나 뉴노멀은 미래에 발생할 감염의 확률값을 사전에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일반화된 세계관이었고, 이는 오프라인에서 조우할 인격체의 행동반경을 예측 가능한 범주로 파악하려는 온라인 MBTI 검사의 일상적 용법과 구조적으로 상통한다. 그리고 미래의 불가측한 변수를 제압하고자 하는 두 욕망을 부채질한 요소는 때마침 방역을 목적으로 스마트폰의 활용을 확대한 정책적 차원의 조치였다. 이는 정확히 9.11 테러 이후 핸드폰의 존재가 선취매개라는 미디어적 경향을 보편화했다는 그루신의 논점과 상통하는 현상이다.

물론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그루신이 글을 썼던 시기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으로 암울해지고 확정적으로 변함에 따라, 최근 들어서는 비관적인 미래의 확률값으로부터 눈을 돌린 채 보다 현실적인 순간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구를 투영한 콘텐츠들이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시민들이 더 이상 기후위기나 정치 뉴스와 관련한 추상적 현안과 거국적 이상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워크맨>의 오해원이나 <솔로지옥2>의 덱스처럼 일상적 순간의 욕망과 책임에 현실적인 방식으로 충실한 캐릭터들의 소박한 정감에 열광하는 현상 또한 그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미래의 불가측한 위협을 제어하려는 선취매개라는 경향 또한 결국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를 둘러싼 위협이 적어도 현실적으로 제어 가능한 수준으로 여겨지는 시기에만 한정적으로 출현하는 현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자본주의의 오래된 풍요가 마침내 종식을 고하는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 선취매개라는 경향이 점점 약화되는 국면을 목도할지 모른다. 사전에 예측하거나 제어할 여력도 없이 밀어닥치는 온갖 위기에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서, 잠재적 위협을 방지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매몰돼 있는 것만큼 현실적이지 못한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런 측면을 감안하면서도 지면의 한계상 선취매개의 영향력이 끼친 파장에 관해서만 취사선택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그것이 적어도 내가 영화와 비평에 관심을 가져온 지난 10년 동안의 온라인 환경에서는 상대적 보편성을 지니고 지속됐던 현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전도된 영화 창작의 과정에 대하여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오프라인에서 상호작용하기보다는 온라인에서 선취매개적 경향에 입각한 커뮤니케이션을 경험해온 우리 세대의 특징이, 오늘날의 영화 안에서도 의미심장한 변화를 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기했던 것처럼 한때 우리가 오프라인을 중심축으로 데이터와 정보의 수집을 확장하던 시기가 과거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20세기의 영화사적 진보 또한 대체로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됐다고 말할 수 있다. 누벨바그와 네오리얼리즘의 작가들이 스튜디오 시스템을 거부한 채 거리로 뛰쳐나가 보다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를 포착했듯, 그리고 오토 플레밍거의 <돌아오지 않는 강>(1954)에서 뗏목을 타고 계곡을 누비는 장면이 베르너 헤어조크가 아마존에서 직접 찍은 <아귀레 신의 분노>(1972)에 이르러 훨씬 야만적인 생동감을 띠게 됐듯, 영화사에서 진보적 실천이란 곧 오프라인 현실로 나아가 보다 확장적인 물질성을 수집하는 방향으로 특징지어지곤 했다.

디지털이 보편화한 이후, 오프라인에서의 경험을 온라인의 선험적 기준에 종속시켜 온 최근의 세대는 이 방향성을 반대로 역전시킨다. 말하자면 현실의 물질성을 접하기에 앞서 온라인에서 ’현실이라고 상정되는 어떠한 상(像)’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선취매개적으로 구성한 뒤, 그 상을 영화적 현실에 역투사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작업의 방향성이 “오, 어제 어디를 갔는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런 구체적인 경험을 했어. 그럼 그 고유한 감각을 담아낸 영화를 만들어볼까?”가 아니라, “오, 어제 어떤 영화나 인터넷 게시물을 봤는데 내가 저 정보들이 비추는 현실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현실이란 아마 ‘대체로’ 저것과 비슷할 것으로 ‘예상’해. 그러므로 나도 내가 본 그 대체적인 상을 영화라는 결과물로 출력해볼까?”라는 식으로 창작의 과정이 역전되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미 20세기 후반의 서브컬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작가들이 현실을 참조하지 않은 채 작품 속 시뮬라크르적 기호를 재생산하는 경향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사례가 바로 츤데레와 같은 캐릭터의 ‘모에’ 요소다. 신죠 카즈마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 녀석은 분명 그러한 일을 할 거야’라는 확률분포를 여러 겹 겹쳐놓은 것”으로 정의한 모에 요소란 21세기의 시초에 이미 선취매개적 국면이 창작자의 작업 과정으로 스며든다는 점을 알리는 사례였다.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가 애니메이션과 게임 속 추상적 캐릭터들에 한정해 분석을 전개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더 이상 애니메이션과 실사라는 기준 또한 사실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을 경계를 획정하는 절대적 준거가 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지도 어플에서 검색한 후 맛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오프라인에서 직면할 경험을 온라인을 통해 시뮬레이션적으로 정위하는 절차가 일반화된 세계를 살고 있다. 이에 따라 현실 자체도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것이라기보다, 이런저런 예상가능한 확률값을 근사치에 가깝게 추상한 존재로 축소되는 경향이 생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미 20년도 전에 페드로 코스타는 새로운 세대가 점점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 영화 이외의 것을 참고하거나 경험하지 않는 경향을 문제적으로 지목한 바 있다(물론 이런 주장은 이미 그보다 더 전에 다른 이들도 주장했지만). 어째서일까? 아무리 예술적 창조에서 상호참조나 오마주가 낯설지 않아졌으며 그것들이 그 자체로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좋은 예술작품이란 다른 작품을 보고 ‘뭔가 이런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가가 세계를 보는 태도와 방법을 배워 나만의 시각으로, 내가 관심 있는 세계를 바라본 주관으로부터 비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시네필들이 열광하기 좋은 의미 불명한 수사학일 뿐이며, 예술작품이란 결국 고유한 주관과 세계가 맺는 긴장으로부터 비어져 나온 부수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근래의 전도된 영화 창작 과정에서 사진적 이미지란 경험적 현실(혹은 구체적 사료)로부터 도려낸 물질적 대상이라기보다, 창작자의 머릿속에 내재된 ‘현실이란 어떠할 것이다’라는 추정치를 근삿값에 가깝게 출력해낸 정보로 나타난다. 그때 사진적 이미지의 물질성이란 지표적 단독성을 보증하는 요소라기보다 이미지의 확률론적 추상성을 은닉하는 날조된 하드웨어로 기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포착된 현실의 존재를 기록한다는 사진적 이미지의 제작 과정이란 이제 미래에 경험할지 모르는 현실에 대한 확률론적 관념을 사전에 투영한 결과물로 전환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점에서 나는 2020년대 전후의 영화적 이미지를 ‘사진적 이미지’라기보다 ‘확률론적 이미지’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오늘날에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표방하는 사진적 이미지조차 확률론적 이미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면모를 노출하곤 한다. 가령, 필름 시대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환기하기 위해 시공간적 경계를 무화하는 디지털 미디어의 속성을 의뭉쩍게 누락한 <패스트 라이브즈>(셀린 송, 2023)가 이런 사례다. 박동수 평론가는 <패스트 라이브즈>에 관한 예리한 비평에서 극중 노라(그레타 리)가 향수하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 해성(유태오)이 실재하는 인격체라기보다 한국계 미국인인 셀린 송의 머릿속에서 한국에 관한 향수어린 관념을 추상적으로 육화한 존재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추상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는 해성을 연기한 유태오 배우가 한국인인데도 불구하고 셀린 송에 의해 쓰인 어색하기 그지없는 번역투 대사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 더해서 박동수는 해성의 직업과 생활세계의 구체적인 정체성이 탈각됐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실제 한국을 살아가는 개별적 인격체라기보다 셀린 송-노라라는 작가적 자의식이 배태한 인위적 피조물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기준만으로 한 편의 영화에 내재한 가치를 온전히 폄하할 수는 없겠지만, 동시대의 여러 영화 속 캐릭터들이 구체적인 인격적 속성을 결여한 채 작가가 상상한 어떤 관념의 복화술 인형으로만 제시되는 현상은, 그들이 현실에서 작가들이 직접 경험하고 취재한 존재하기보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정보를 확률론적으로 추상한 결과물이라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작년에 개봉한 <너와 나>(조현철, 2022)에서 기괴하기 그지없는 이물감을 발한 박정민 배우의 배역 또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극중에서 하은을 스토킹하다가 적발된 후 하은의 동급생들과 언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어 나 잘생김~ 어 너 못생김~ 어 너 남자친구 없음~”이라는 푼수 같은 대사를 내뱉는 그는 시종 하나의 고유한 역사를 간직한 인격체가 아니라, 적당한 타이밍에 찌질한 스토커를 플롯에 외삽하고 싶다는 감독의 욕구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현된 추상적 존재로 나타난다. 물론 모든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감독의 욕구에 따라 구현된 존재이므로 진정한 문제는 그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다. 핵심은 오늘날의 미디어적 조건이 창작자가 현실을 접하는 생활감각을 변형시킴으로써, 캐릭터에 고유하고 독자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역량을 점점 쇠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냥 각본을 대충 써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문제를 확률론적 이미지의 패러다임에서 조감한다면 보다 구체적인 해명이 가능하다. 영화적 현실을 구현해 기댓값을 넘어서는 고유한 인식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인식을 영화적 현실에 역투사하는 제작과정이, 영화적 이미지를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관념적으로 종속시키는 양상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겨울 이야기>
 
전술했듯이 이 경향이 배태한 대표적 증상은 작가 자신의 생활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사회적 인격체를 그릴 때 위화감이 들 정도로 생활감과 디테일이 부족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변화 중 하나는 오늘날의 작가들이 점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대화를 쓰는 능력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안에서 대화라면 의미로 충만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진정으로 탁월한 작가적 자질은 아무런 의미론적 쓸모가 없는 대사를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려있다. 가령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1990)에서 토미(조 페시)가 “funny how?”라는 의미 불명한 말을 연발하며 헨리(레이 리오타)를 윽박지르는 장면, 그리고 에릭 로메르의 <겨울 이야기>(1992)에서 펠리시(샤를로트 베리)와 막상스(미셸 볼레티)가 느베르의 길가를 산책하며, 아무런 의중도 없이 마주치는 간판과 사물의 명칭을 무심코 중얼거리는 순간들. 이 대화들은 어떤 서사적 효용과 주제의식도 부재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이 지금, 이곳에서 어떤 확률론적 추상성으로 흩어질 수 없는 단단한 시공간적 구체성으로 빛난다는 감미로운 잔향을 새기고 간다. 마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론적 환원을 거절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것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으로 존재한다는 단독성의 확신을 남기는 절대적 순간처럼 말이다.

한 가지 밝혀두자면 나는 위에서 디지털과 현실의 경계를 이분법적으로 획정한 뒤 전자에는 물질적 속성이 탈각되어 있다는 단순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마거릿 모스가 텔레비전을 통한 소통에 고유한 물질성과 친밀감이 깃들어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도 디지털 기기에 단독적인 소통의 물질성이 종종 스며든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메신저를 통해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지인들과 대화하거나 이모티콘이나 말장난을 주고받는 상황에서 분명 의미론적 제약을 초과하는 반언어적 활력과 친밀감이 발생한다고 느낀다. 또, 이 글만 보면 내가 선취매개적 경향 때문에 MBTI 검사를 뭐 대단히 나쁘게 생각한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는데, 일상에서 나는 애인이나 친구나 지인들과 MBTI 얘기를 안 하는 날이 없을 지경으로 과몰입하고 있다. 핵심적인 것은 단순히 우리 시대에 고유한 문화적 산물이 그 자체로 쓸모없다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에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일체의 단독성과 물질성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그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익숙하게 받아들인 세대가, 대체로 시공간을 3인칭적으로 조감하는 영화적 현실을 인위적으로 구현하려고 할 때 일종의 작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이행하며 나타나는 변화는 이런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쩌다보니 상황에 대한 비관적이고 익숙한 진단만 늘어놓은 것 같은데 벌써 주어진 지면을 상당히 초월해버렸다. 확률론적 이미지, 그리고 그것의 현존과 공명하는 공론장에서의 ‘확률론적 대화’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은 내가 여기서 간략하게 기술한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이런 국면에서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몇 가지 구체적인 미학적 실천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여유가 된다면 그에 대해서도 쓰고 싶지만, 지금은 이미 웹페이지로 읽기 불편할 정도로 내게 주어진 분량을 너무 많이 초과해버렸으므로,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김신(영화평론가) l 시각예술, 비평과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다. 진지한 얘기를 가볍게 하고 싶다.
영화주간지 《씨네21》을 비롯한 곳에 종종 영화비평을 기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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