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가 부러운 까닭 <바보사냥>(김기영, 1984)

by.이우빈(영화기자) 2024-06-19조회 1,215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토끼가 부러워. 고민이 없거든. 자기라는 것이 없고 그저 토끼라는 것밖에 몰라.” 

- <바보사냥>(김기영, 1984) 중


토끼를 부러워하는 세 남녀가 토끼섬을 찾아 떠나고 있다. 이게 웬 깜찍한 발상인가 싶은데 실상은 꽤 심오하다. 세 주인공 중 두 남자 강식(배규빈)과 홍익(김병학)은 정신병동에서 이제 막 탈출한 사람들이고, 한 여자 석호(엄심정) 역시 만만찮게 특이하여 통상적 대화가 잘 안 통하는 인간이다. 여하튼 세 사람이 왜 토끼섬을 찾느냐 하면 그곳이 이들의 이상적인 대안 세계인 탓이다. 강식은 공해 공포증으로 인해 인간의 손이 닿은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완연한 원시의 자연 사회를 원한다. 그 방법이라 하니 무인도에 벌과 토끼만 풀어 놓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생태계를 자생시킨단 것이다. 사회에 살면서 자살 강박에 시달리던 홍익은 강식을 따라 토끼섬을 쫓고, 탄광 마을에서 아버지를 잃은 석호도 둘을 따라나선다. 이 괴기한 여정과 인물들의 특이함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영화평론가란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영화기자로서 영화평론가란 분들을 자주 만난다. 아마 대한민국의 모든 직업 중에 영화평론가들과 가장 자주 이야기하고 만나는 직무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래서 ‘비평, 안녕하십니까’에 연재를 청탁받았나 싶기도 하다. 청탁을 덥석 물어버리고 “영화비평가의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는 ‘비평, 안녕하십니까’의 기획 의도를 들은 뒤엔 꽤 놀라버렸다. 지난해 12월 무렵인가에 영화평론가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기획해 본 적 있는 탓이다. 평소 자주 만나는 영화평론가께 이 다큐멘터리의 시놉시스를 얘기하자마자 “그런 걸 왜 만들어요···”라며 아주 작은 반발을 듣긴 했으나 지금도 그 꿈엔 변함이 없다.

그들의 일상이 개인적으로 너무 궁금하다거나 그들에게 기막힌 사연이 있어 보여서는 아니다. 자고로 영화는 재밌어야 하는데 그들의 일상을 찍는다면 분명히 재밌는 무언가가 나올 것 같단 확신이 있었을 뿐이다. 영화평론가들이라 하여 모두가 항시 재밌는 사람이라는 등 완전한 공통점을 갖고 있진 않다. 모든 편의점 점주님이 똑같은 사람은 아니듯 모든 영화평론가를 하나로 묶기는 다소 어렵다. 굳이 공통점을 도출해 보자면 대개 자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정도일까. 그들이 <바보사냥>의 강식처럼 극심한 공해 공포증에 시달려서는 아닐 것이고, ‘비평, 안녕하십니까’에서 박예지, 이광호 평론가가 먼저 밝혔듯 다소간의 현실적인 생활상에 결부한 문제일 순 있겠다. 또 굳이 찾아보자면 수상할 정도로 카톡 답장이 느리고 전화를 안 받는단 정도일까. 특히 원고 마감에 관한 연락이라면 더욱더···.

또 영화평론가들은 각자의 의견이나 취향에 꽤 강고한 편이다. 겉으론 조용조용, 다소 유순해 보이며 실제로 아주 친절하신 평론가조차도 맘속의 칼을 갈아 글 쓸 때가 많다. 놀랄 때가 잦다. 이 강고함에서 평론가 개인 간의 지극한 차이가 나타나고, 이것이 바로 진정 재밌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치킨집에서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고 칠 때 평론가 A는 절대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며 양배추샐러드만 우걱우걱 먹고 평론가 B는 무조건 바삭한 게 좋다며 치킨의 껍질만 뜯어 먹는다. 당황한 영화기자 한 명은 결국 닭의 맨살만 먹게 된다. 눈치를 보던 B가 “기자님 이거 맛있으니까 드셔보세요”라며 치킨 껍질을 주섬주섬 건네준다. 그래서 잘 받아먹고 맛있다고 대답하면 막상 상대가 실망해 버리는, 그런 신묘한 일을 종종 겪어본 적이 있다. “그런 걸 왜 만들어요···”라니.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퍽 과장한 우화이지만 이 우의의 골자야말로 영화평론가란 업의 중요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왼쪽부터 강식(배규빈), 석호(엄심정), 홍익(김병학)

1970~80년대를 거쳐온 유명 시네필 한 분(평론가 C)의 주위로 젊은 영화평론가 몇몇이 모인 자리에 있던 적이 있다. C 선생님은 영화평론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강고한 ‘베팅’임을 역설하셨다. 특정 영화에 대한 지지와 비판을 확고히 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자신이 틀렸다면 판돈을 모두 잃을 결사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 한번 닭고기를 안 먹기로 했다면 아무리 입에 집어넣어도 안 먹어야 한다. 살면서 처음 듣는 의견이 아닌 데다가, 독립 영화잡지를 출판했을 때 영화 저널리즘의 본질은 비판과 발굴 두 개뿐이라고 말하고 다닌 전적도 있기에 아주 신선한 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말씀으로 들었을 땐 감상이 남달랐다. 원래 알고도 안 하는 것이 가장 나쁜 법이다. 혼자 반성하던 때와 직접 혼났을 때의 차이가 극명했고, 이 ‘베팅론’의 현재적 가능성을 속으로 남몰래 타진해 보기도 했다.

이 가능성의 타진이 혼자만의 고민은 아닌 듯싶다. 송경원 씨네21 편집장은 팟캐스트 ‘조용한 생활’을 통해 말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의 완성도에 주목하는 시네마의 시대는 지났고,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의 해석 과정이 가장 중요”해졌단 것이다. 강덕구 평론가를 필두로 모인 팟캐스트 ‘회랑’에서도 엇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제는 어떤 영화나 예술을 대하는 원본성의 경험이 자기 자신에게만 남아있다. 내가 느낀 경험만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배경에서 모든 비평가의 글은 점차 에세이로 변할 것”이란 맥락이다. 요컨대 이광호 평론가의 말처럼 “취향은 이제 가능성의 벡터를 상실”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이 취향을 글과 이론으로 견고하게 정제해 특정 영화를 정전으로 수출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워진 시대다.

그러나 위와 같은 한계를 거꾸로 매달아 바라볼 수도 있겠다. 영화평론가들의 자아란 C 선생님의 말씀처럼 여전히, 심지어 더욱더 비대해질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객관적으로 남을 설득하기가 아주 무용한 상황일 때, 본인의 생각과 세상의 여론이 서로를 너그러이 흡수할 수 없을 때야말로, 모호한 타협을 요구하기보단 외려 세상을 매질하는 비평적 태도를 견지해야 할 수도 있겠단 뜻이다. 누군가를 크게 해치는 일만 아니라면야 지나치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자기 말만 하는 강식과 홍익과 석호들의 비평적 에세이가 읽고 싶달까.


천국과 지옥이 한꺼번에 있는 곳

이쯤에서 <바보사냥>의 두 남자를 재론할 수 있을 법한데, 두 남자의 기행이 전술한 비평적 태도와 매우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강식과 홍익은 토끼섬에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벌이에 매진한다. 한 번은 포장마차를 열었는데 식자재 거래처가 병아리를 참새라고 속이며 납품한 일을 알게 된다. 거래처 사장이 “요즘 시대에 어떻게 참새를 잡냐?”라며 다들 이렇게 장사한다고 넌지시 설득하지만, 삐약거리는 병아리의 목을 차마 비틀 수 없던 둘은 “병아리를 죽일 바엔 병원에 다시 들어가자!”라며 포장마차를 부수고 만다. 이 상황이 머릿속에서 변주돼 반가운 모습으로 재생된다. 요즘은 이런 게 영화라며 속삭이는 남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을 때, 버럭 화내며 극장에나 다시 들어가자고 외치는 불통 영화평론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두 남자의 돈벌이는 더 비극적인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소에게 억지로 물을 가득 먹인 뒤 한껏 매질하여 소의 살이 불게 만들어야 한다. 도축할 때 고깃값을 더 받기 위해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둘의 질문에 작업 현장의 선배가 “이게 기술이고 예술이야!”라며 일갈하고, 소의 눈망울을 보며 부모님을 떠올린 홍익은 ‘어머니 죄송합니다. 당장 저녁 먹을 돈이 없어 두들깁니다.’라며 속으로 한탄한다. 어디에선가 본 상황 같다. 영화란 늘 기술과 예술의 경계에서 몸체를 불려야 하는 매체이며 필연적으로 양쪽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 그 간극 속의 영화평론가들은 저녁 먹을 돈을 위해서 타자를 흠씬 두들겨 성미에 맞지 않는 글을 써야 할 상황에 들어서기도 한다. 그러면서 고해하듯이 뇌까리지 않을까. ‘시네마여 죄송합니다. 전 오늘 몇만 원의 고료를 위해 싫어하는 영화를 무난하다고 썼습니다···’
 
   
 
포장마차를 부수고 매질해야 하는 송아지를 바라보다가, 탄광에 다다른 강식과 홍익

강식과 홍익은 병아리의 경우와 비슷하게 결국 소의 매질을 그만둔다. 대신 소를 때리라고 시킨 사람들을 흠씬 두들겨 팬 뒤에 탄광 마을에 가서 광부 일을 시작한다. 그들이 들어간 어두운 무저갱은 흡사 극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탄광 마을의 한 아저씨가 이곳을 “천국과 지옥이 한꺼번에 있는 신비”의 공간이라 말하는데 이 선언이 신묘할 정도로 극장의 비유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비단 물리적 극장이 아닐지라도 영화광 각자가 뿌리내린 영화의 공간, 그곳이 독립예술영화관이든 골방의 컴퓨터 앞이든 멀티플렉스든 시네마테크든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온라인 커뮤니티이든 간에 그 어둠의 장소는 영화평론가들에겐 천국이자 지옥이 되기 마련이다. 이곳은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만끽하며 그것을 글로 재생산할 수 있는 유토피아이자,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끊임없이 세상에 설명하며 끊임없이 거부당해야 하는 디스토피아이기도 한 것이다.

“토끼가 부러워. 고민이 없거든. 자기라는 것이 없고 그저 토끼라는 것밖에 몰라”라는 석호의 귀여운 싫증엔 다음과 같은 홍익의 맞장구가 이어졌다. “그에 반해 사람은 자기의식이 있고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아니까 한없이 불행하군.” 그렇다. 영화를 향한 자기의식이 너무도 뚜렷하여 되려 불행을 마주하는 족속, 다시 비유하자면 억지로라도 닭의 살이 아니라 껍질만을 원해야 하는 사람들, 하여 자유로운 토끼를 은근히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 속성이 바로 영화평론가들의 주요 조건이자 가장 뚜렷한 공통점일 듯하다. 이 모순 속의 긴장에서 번지는 찌릿함을 다들 끊기 어려워한단 것 역시 비슷할 테다. <바보사냥>의 결말, 잦은 고초에도 홍익은 결국 토끼섬을 찾아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선다. 이 항해는 과연 타의 없이 자아와 자생만이 존재하는 곳을 향해 간 구원의 발로일까, 혹은 그저 타의에 떠밀려 도망치는 자의 흔들흔들 피난길일까. 둘 중 무엇이 됐든 우리도 결국은 섬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토끼가 부럽다.

 



이우빈(영화기자) l 친구가 없어서 영화 보러 다닌 1997년생.
씨네21》 기자. 2023년 《쿨투라》 영화평론 신인상.
독립 영화잡지 《섭씨 233》 편집장. 비평 웹진 《코아르》 필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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