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칭 사이 1인칭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by.이광호(영화평론가) 2024-05-21조회 2,467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사실은 우리는 서로가 필요 없어
알면서 서로가 이유 없이 그리울 뿐


- 크리스탈 티, 「낭만파A.I.」


나는 내가 어렵다. 어느덧 알람 없이 눈을 뜰 정도로 반복적인 주5일 출퇴근과 아침 공기가 몸에 익숙히 자리 잡았음에도, 그것만으로 나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령 근황을 묻는 이들에게 ‘직장인’이나 ‘회사원’이라는 말을 선뜻 건네는 대신, 이력서를 이곳저곳 찌르다 보니 기회가 닿아 어찌어찌 일을 하는 중이고 천만다행으로 장기 백수 타이틀은 면했으며 입에 풀칠은 하고 있다는 식으로 장황하게 답을 하게 되는 식이다. 대답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사코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결국 나의 태생적 기질에서 튀어나오고야 마는 저 대답의 자조적 뉘앙스가 듣는 이에게 작은 부담을 안겨 실례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저 말이 치장된 겸손처럼 보여 이 사람은 모두에게 친절한 척하는 위선자라고 판단되는 것은 아닌가, 한편으로 간단한 질문에 간단히 답하지 않고 무언가 해명하는 사람 마냥 주절거리는 모양새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아가 나는 왜 이런 모습마저도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에 대해 말하는 일은 내게 중대하게 다가오고 중대하게 여긴 바로 그 탓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감이 없고, 요즘 말로 하면 찐프피(INFP 100%)다. 갑자기 류현진 투수의 이야기를 다룬 책 제목이 떠오른다. 생각이 많으면 진다…… 졌다.

이런 기질은 ‘영화평론가’로서의 나에게도 예외 없이 들러붙어 있다. 공식 지면으로 불릴 만한 부산영화평론가협회를 통해 등단했음에도, 여전히 나는 나를 영화평론가로 소개하는 것이 어렵다. 사실 그 때문에 이 청탁을 받은 뒤 오랜 시간 내적으로 씨름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해 그냥 곤란함을 드러내기로 했다.

다만 분명한 입장도 있는데, 먼저 직업으로서의 평론가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의 영화 평론계가 등단 이후 생계를 영위할 정도의 지속적인 활동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 길을 생계로 정했다면, 외부 강의든 메일링 서비스든 독자적인 지면 생성이든, 치열한 부가 활동으로 수익을 창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어떤 방식의 활동이든 기초가 되는 것은 ‘자기PR’인데, 그런 점에서 나는 시작도 못하고 멈춘다. 멋지게 자기 소개하는 능력이 내게는 부족하고, 부족한 능력은 부족한 욕구에서 온다. 커리어를 쌓는다거나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내게 뒷전이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겸손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를 소개해보라는 충고도 종종 들어왔지만, 그 사려 깊은 마음에 부응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고민은 언제쯤 확신이 될 수 있을까? 아직까지 분명한 것은, ‘1인분’의 문제가 내게 큰 동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이런 고민이 ‘취미로서의 평론가’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이어진다. 세상에. 취미로서의 평론가라니.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나도 겁이 난다. 그런데‘-가’를 떼고 ‘취미로서의 평론’이라고 하면 조금 괜찮다고 느낀다. 내게는 행위 자체와 행위자라는 그 차이가 일단 중요한 것이다. 영화를 마주한 나의 그 비언어적 체험에 다가가고자 일단 적어내리고, 좀 더 가까워지고자 이 단어가 아닌 저 단어를 고르고, 때로는 영화를 보고 한 대 맞은듯한 저릿함을 표현하고자 미사여구를 나열하는 대신 간명한 문장으로 아등바등 매듭지어보려는, 그 치열한 감탄과 반목의 과정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좀처럼 자신을 갖지 못하는 나에게는 항상 ‘1인칭’의 문제가 다른 무엇에 앞서는 것이며 그와 씨름하다 어떤 단계에 다다르고 나면 종종 뿌듯함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금 더 분명해지고 싶다.

1인칭. 나만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남과 다른 나의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나를 소개하고 개성을 뽐내는 것. 자신을 어필하는 과정에서 1인칭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단초가 된다. 타인에게 '나'의 일상을 보여주는 브이로그 콘텐츠의 지배적 양식이 1인칭 시점인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보여주는’ 일이란 이 사동적 표현이 담지한 대로, 무엇보다 내가 남을 의식한다는 역설을 전제로 한다. 너를 보는 나의 눈은 항상 너의 눈에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종종 ‘나의 시선’ 대신 ‘나만의 시선’이라는 표현을 선택하는 우리의 습관은 그 자명한 사실을 강조한다. 나만의 시선. 나는 이 앞에서 종종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적에, 듣고 싶지 않았지만 사려 깊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인해 기어코 듣고 말았던 한 마디를 떠올린다. “그래 알았어. 내 취향이야. (꺼져)”

각자의 취향이 넘쳐흐르는 동시대의 풍경은 코로나를 기점으로 무한히 확장되었으며, 이는 곧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의 동반사멸로 이어졌다. 게다가 이를 문제라고 느끼는 불편함은 그 자체로 ‘나’의 고된 일상을 짓누를 뿐이니, 이 자리를 채우는 건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유튜브 알고리즘 서비스일 것이다. 어쩌면 뜻이 맞는 쪽으로 향한다는 취향(趣向)은 이제 가능성의 벡터를 상실하고 내 몸에 배어있는 냄새와 다름없게 되었으니, 차라리 취향(趣香)으로 고쳐읽는 편이 쇼츠와 릴스로부터 도파민을 수혈받는 이 시대에 더 그럴듯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내게 평론은 감정과 욕망을 늘어놓는 취향의 잔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과 욕망에 흠뻑 취하면서도, 대체 그 만족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혹시 그곳에 정반대의 그림자가 도사리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그 어둠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원천은 아닌지…… 비유컨대 평론은 빛과 어둠을 오간다는 점에서 고도의 긴장을 요구하는 작업이며, 나를 간섭하는 외부가 없다면 발생하지 않는 기쁨이다. 이것이 분명하다. 더 분명히 하면, 이것이 나의 취미다.

아, 들려온다. 그게 무슨 취미냐, 취미란 그보다 가벼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레와 같은 성원이. 이런 취미의 자리는 하루빨리 ‘연구’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듯, 몇몇 이들은 내게 “대학원 안 가세요?”라고 묻거나, 처음 듣는 각종 영화 이론서와 철학서를 줄줄이 열거하기도 했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그 자리를 어색하게 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응답하며 읽은 척하기도 했다. 미안합니다. 한편으로 이 ‘연구’의 반대편에 있는 ‘애정’과 마주하며 그 과도함에 질식할 뻔하기도 했다. “이 영화 봤어요? 저 영화 봤어요? 그 영화 봤어요?” 혹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다면 어디 가서 봤다는 소리 하지 마라!” …… 다시 고백한다. 미안합니다. 저 그 영화 본 적 없고, 이 영화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봤어요. 하지만 당신의 즐거움을 뺏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종종 뇌가 멈추거나 숨이 막혀 거짓말을 하는 나약한 관객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사과합니다.

맨눈의 감상과 두뇌의 관찰, 사적 일기와 시네마의 역사, 시네필리아와 학자의 틈바구니에서 여전히 허우적대는 내 모습을 보며 한 편의 영화를, 아니 인물을, 아니 얼굴을 떠올린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속 한병태. 일찍이 인터넷 서핑에 익숙했던 나는 초등학교 시절, 좌우가 잘려나간 화면비와 일본어 자막이 달린 버전으로 이 영화를 만났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화질. 다행히 한국영상자료원이 박종원 감독과 진행한 복원 작업을 통해 이제는 깨끗한 화질로 만나볼 수 있고, 나 역시 오랜 매혹의 정체를 얼마간 더듬거릴 수 있었다.

일그러진 화질의 복원과 함께 일그러진 얼굴이 복원되었다. 나는 이 영화를 틈이 날 때마다 주변에 추천하고는 했는데, 그들의 첫 마디는 모두 동일했다. “어, 홍경인이다!” 그렇다. 우리는 영화 속 캐릭터 엄석대를 만나기 전에, 영화 바깥의 명배우 홍경인부터 만나는 것이다. 그는 무표정을 통해 엄석대가 된다. 방금 학교에 첫 발을 들인 한병태에게 급장 엄석대가 명령한다. “상고 머리, 이리 와 봐.” 하지만 서울 출신의 이 당돌한 녀석은 답한다. “할 말 있으면 쟤가 이리 와도 되잖아!” 처음 맞닥뜨렸을지 모를 저항 앞에서도, 엄석대는 상고머리를 지그시 응시할 뿐이다. 엄석대의 침묵과 무표정은 고압적 언행 없이도 모두를 통제한다는 점에서 그를 차별화하는 중심이 되고, 모르긴 몰라도 당시 엄석대를 연기한 홍경인은 그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홍경인은 메소드를 훌륭히 수행하며 엄석대가 된다. 이 세계의 분위기를 장악하고 이끈다는 점에서, 그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드라마적 주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 탓에 앞서 말한 것과 모순되지만, 나는 홍경인을 잘 모르는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거꾸로 홍경인을 보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어, 엄석대다!”
 

다른 한편, 이름 모를 수많은 아역이 화면을 채운다. 얼마나 많냐고? 유튜브에 접속해 이 영화의 설명란에 ‘5학년 2반 아이들’이라는 역할로 얼마나 많은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시라. 여전히 나는 저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화면을 채운 그들의 뒤통수와 앳된 얼굴에서 발생하는 힘은 느낀다. 때때로 저 ‘5학년 2반 아이들’ 중 몇몇은 이야기의 감초가 되기도 하지만, (김영팔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이들에게는 서사의 국면을 뒤집을 만한 개별적 플롯이 없다. 더불어 이 아이들이 비전문 배우들이었을 것이라는 심증까지 더해지는데, 그러고 나면 이들에게 ‘연기를 잘한다’라는 관습적 평가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 영화의 절정 부분, 새로 부임한 김 선생(“어, 최민식이다!”)이 엄석대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그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대목이 다소 간지럽다고 느끼는데, 사이다 같은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예요!”의 노골성에 덧붙여, 아이들의 목소리가 소위 말하는 연극톤에 가깝기 때문인 것 같다. 진지한 대목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귀엽다고 느끼면서 흐뭇해지는데, 요컨대 드라마를 벗어난 리얼의 기습에 웃음이 툭툭 새어 나오고야 마는 것이다. 차라리 아이들의 말과 몸짓은 엄석대가 장악한 공기에 상쾌함을 불어넣는 매력적 실패에 가깝다.

서로 다른 얼굴을 마주한 한병태는 어쩔 줄 모른다. 그는 시종 고개를 떨구거나 주위를 둘러본다. 음악시간. 선생님이 풍금을 켠다. 다들 노래를 따라 부르지만, 한병태는 아이들을 둘러본다. 엄석대를 바라본다. 선생님을 바라본다. 그러나 갈 곳 잃은 눈길은 결국 음악 교과서에 머물 뿐이다. 그의 방황하는 시선은 말꼬리를 흐리는 목소리와 짝을 이루며 한병태의 얼굴을 완성한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청소 검사를 합격 받고자 엄석대 앞에서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려는 그의 얼굴이 인상 깊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저 배우를 통해 원작의 인물들을 재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각기 다른 얼굴을 선연하게 포착하며 세계에 대한 직관을 심화한다.
 
   

 
불타버린 재와 같이, 어린 시절의 곤혹스러운 표정은 무기력과 공허로 변모해 어른 한병태의 얼굴을 뒤덮고 있다. 당시의 까까머리 아이들은 몰라볼 정도로 저마다의 직업과 풍채, 목소리를 가진 보통 어른이 되었지만, 김 선생의 매질로 추방되었던 엄석대는 단지 무성한 소문과 근조화환으로만 그 존재가 환기되며 진정한 신화가 되었다. 그 사이의 한병태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 뿐이다. ‘엄석대’ 이름 석 자가 적힌 화환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병태는 느지막이 자리를 뜬다. 힘없는 발걸음 위에 내레이션이 얹힌다. “… 내가 사는 오늘도 여전히 그때의 5학년 2반 같고, 그렇다면 그는 어디선가 또 다른 급장의 모습으로 5학년 2반을 주무르고 있을 게다.” 우수와 권태에 젖은 한국영화사의 남성이 (또) 완성되는 순간이다.

뚜렷한 자리 없이 곤혹스러움으로 세계를 지탱하고 다시 보게 하는 한병태가 주인공이라는 점은 퍽 인상적이다. 그의 곁에는 김영팔이 그때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함께하지만, 여전히 한병태는 방금 전학 온 학생처럼 쭈뼛거린다. 그는 김영팔과 5학년 2반 시절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대신, 입을 닫는 쪽을 선택한다. 3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마치 김영팔은 과거에서 시간 여행을 한 듯 그때 그 얼굴로 이곳에 있는데, 용의주도한 캐스팅이 암시하듯 한병태는 30년 전 김영팔의 해맑은 얼굴을 보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동이 틀 때까지 침묵을 지킨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갖은 고초를 겪는 와중에도 항상 곁을 함께했던 김영팔과의 재회도 그에게는 고민거리였던 것일까?

물론 한병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또 하나의 낯섦과 충돌을, 나아가 변화를 마주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는 대화를 통해 과거를 갱신하는 대신, 적당히 견딜 만한 자신의 정서에 몸을 맡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런 선택을 지지하기라도 하듯, 우연히 엄석대를 마주치는 원작의 결말 대신 그의 존재를 간접화하는 방식으로 중년 남성 한병태의 비극적 파토스를 한 층 강화한다. 그렇게 한병태의 세계는 굳세어진다.
 

자기만의 정서로 침잠하는 한병태를 보면서, 이상하지만 자주 영화를 보고 가끔 쓰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언제부턴가 “영화는 이제 재미없다”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꺼내고 다녔다. “나는 시네필이 아니야”라고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모종의 관객과 나를 구분하는 오만함을 부리기도 했다. 나아가 “영화 보다가 인생 망했다”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뒤 “영화를 진짜 좋아한다는 것은 뭘까?” 하는 관념에 빠지면서 진짜 망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몇 번 망한 적이 있다.

언젠가 어떤 영화글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내 옆에서 같이 영화 본 사람이 쓴 것 같은” 글이 좋다고 답한 적이 있다. 요즘따라 떠오르는 말이다. 과잉정보의 시대에 사전지식 없는 관객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연구자와 평론가와 시네필과 직장인 모두 한 편의 영화 앞에서 벌거벗은 관객이 된다는 공상에 자주 빠진다. 이와중에 대한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렇게 하나 둘 극장이 사라지면, “내 옆에서 같이 영화 본 사람”도 사라지겠지. 그렇다. 나는 혼자 영화를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가 원칙 없이 상영관과 방구석, 스크린과 모니터, 소셜미디어와 극장 로비에서 환멸과 행복을 오고 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영화 평론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용을 쓰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다. 나는 내가 어렵다. 그래서 네가 궁금하다. 호기심과 질문을 던지는 일이 도박에 가까운 시대라고 느끼지만, 그럴수록 네가 궁금하다. 물음표를 껍질로 두른 확신의 언어가 난무하는 탓에, 네가 궁금하다. 영화 평론은 애정과 연구만을 결과로 남기는 양자택일의 바벨탑이 된 걸까? 모르겠다. 나는 이리저리 치이는 당구공이 되어 어디론가 오갈 뿐이다. 여전히 영화가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홍상수)이라면, 영화를 닮은 그 몸짓을 1인칭이라 부르고 싶다.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비평의 편지'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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