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의 시대] 영화사 100년 중 단 한번의 경험 민간자율심의기구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의 등장과 해체

by.조준형(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2024-09-10조회 719
(좌) <젊은 육체들> 중 (사진: "Beat Girl. 1960. Directed by Edmond T. Gréville", MoMA) / (우) <오발탄> 중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혁명과 함께 영화검열 폐지가 가시화되다

1960년대는 한국정치와 사회의 거대한 격변과 함께 시작한다. 4월혁명은 이승만으로 상징되는 노쇠하고 부패한 옛 체제를 불과 한 달여 만에 파괴했고, 각 분야의 개혁 작업이 뒤따랐다. 이는 영화검열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5월 경이 되면 관에 의한 검열 폐지 주장이 본격화된다. 5월 6일 문교부는 이승만 정권 말기, 특히 3.15 부정선거 이후 강화된 영화검열로 상영 불허가 된 작품의 재상영을 검토하는 등 검열을 완화할 것이라는 취지를 밝혔고, 13일에는 관제 영화검열을 철폐하고, 영화계의 자율적인 위원회에 검열을 맡기겠다는 취지를 영화인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언급한다.

이후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외화배급협회(대한영화배급협회), 영화인단체협의회 등 3자는 관영 영화검열제도를 반대하고 자율적으로 영화계가 검열을 시행하기로 합의하는 동시에, 영화윤리위원회의 설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동구성안은 분란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워낙에 한국영화 제작자들과 외화수입업자들의 이해관계가 달랐던 데다,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 한국영화 제작 관련자들이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 외화수입쿼터의 일부를 한국영화제작계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외화 수입업자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는 갈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1960년 6월 15일 헌법이 개정되었다. 제2공화국 헌법은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를 규정할 수 없다”(28조)라고 규정하여 검열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또한 6월 27일 법무부는 “영화도 새 헌법상에 규정된 언론·출판 개념에 포함되므로 검열이나 허가를 할 수 없다”라는 유권 해석을 내렸다(《동아일보》, 1960. 6. 28). 이제 민간 주도의 심의 기관이 시급해졌다. 그러나 5, 6월 내내 골이 깊어진 제작자들과 수입자들은 각각 별개로 영화윤리위원회를 추진했다. 7월 2일, 영화배급협회는 외국영화윤리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별도의 윤리규범을 마련했고, 영화인단체연합회 및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7월 5일 영화윤리위원회창설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에 영화계 안팎에서는 통합된 영윤의 출범을 촉구하였고, 그 여망을 받아 7월 내내 통합된 기관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영윤의 설립과 정부와의 줄다리기

드디어 8월 5일,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이하 영윤)가 발족했다. 7월 28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영화인단체연합회, 외국영화배급협회, 극장협회 등 4개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연석회의를 열고, 8월 5일 창립총회를 열 것을 결의하였고, 5일 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회의실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는 규약과 규정을 통과시킨 한편, 위원장에 이청기, 부위원장에 이진섭, 전문위원에 이진섭, 허백년, 최일수 등을 임원으로 선출하였다. 윤리위원으로는 박계주, 조풍연, 백철, 허백년, 호현찬, 오영진, 선우휘, 한운사 등 영화계 안팎의 전문가 28명이 선임되었다. 영윤의 윤리규정은 국가 및 사회, 법률, 풍속, 성, 교육 등 6개 부문 22개의 세부 기준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일부에서는 이 규정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자승자박이 될 수 있고, 영윤이 권력기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위원장 이청기는 “말초적인 장면에 구애되는 좁은 단정을 피하면서 되도록 그 영화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주제정신의 건실성 여부에 대한 핵심적인 평가에까지 그 심의도의 범위를 아량껏 넓힐 것”을 약속했다(《한국일보》, 1960. 8. 18.).
     
8월 5일 공식 출범을 했으나, 실질적으로 영윤이 업무를 시작한 것은 9월 5일이 되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윤의 시작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영윤 출범 직후 검열을 제대로 하지 않고 사무국장이 독단으로 심의필증을 발급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회적 사건 외에 더 심각한 것은 문교부와 벌어진 일종의 권한 쟁의였다. 문교부는 영윤의 출범에 한국영화의 심의권을 넘겨줄 수는 있지만, 외국영화에 대한 적부 심의는 문교부가 지속적으로 맡아야 한다는 종전의 주장을 반복적으로 제기했다. 

문교부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문교부에 외화수입추천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보자면 외화수입추천의 절차는 검열의 절차와 다소 결이 다르다. 외화수입추천 절차는 기본적으로는 특정 외화를 수입해도 될 것인지에 대한 표현수위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수입되는 외화의 총량 관리(즉 영화의 질이 아니라 양적인 규제), 국가의 외환 관리나 무역 관리 과정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권한은 국가기관이 아닌 영윤으로 이관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화에 대한 실질적인 검열권(즉 상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권리와 수입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권리)이 영윤과 문교부에 애매하게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교부는 이 권한을 빌미로 외화에 대한 심의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였다. 
 
혁명 후 외화의 수입추천 과정을 규정한 영화및공연물 사무요강 (문교부 고시 132호)

이는 9월 초 영윤이 실제 업무에 돌입했던 즈음, 과도정부 시절에 만들어졌던 문교부의 영화사무요강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이 사무요강에는 “외화의 수입추천은 서류 심사 또는 실사 심사로 하며 심사기구 및 규정은 따로 정한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윤은 영윤의 심의권을 침해하는 조치라며 크게 반발했고, 문교부와 영윤의 사이에 끼어 이중의 심의절차를 밟아야 할 상황에 처한 수입업계는 영윤을 통한 일원화를 강하게 촉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일원화는 제도적으로 해결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교부가 처음부터 수입추천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기사들에 따르면 4월혁명 이후 대략 9월까지 문교부는 영화의 수입추천권을 거의 서류적으로만, 즉 형식적으로 행사해 왔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차타레 부인의 사랑>(마르크 알레그레, 1955) 등 사회적인 논란이 되는 영화들이 다수 수입되거나 상영금지가 해제되고, 이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조성되면서 반전되었다. 그 중심에 있던 영화는 1960년 10월 수입된 루이 말 감독의 <연인들>(1959)이었다. 이 영화의 불륜성과 외설성을 이유로 사회 일각에서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자 문교부 장관은 10월 4일, 이 영화에 대한 고발 조치를 통해 상영을 중지하겠다는 의견을 밝힌다. 또한 18일부터는 기존 서류 심사 위주의 수입추천 절차를 실사 심사로 실질화시키고, 관세법 126조(공안을 해치거나 풍속을 문란케 할 서적, 도화, 조각물, 기타의 물품은 수출 또는 수입을 금지한다)에 의하여 철저히 단속할 방침을 밝히기에 이른다.
 
<연인들>을 계기로 선정적 외화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일기 시작한다.
(“영화가는 불륜개방시대”, 《경향신문》, 1960. 10. 23.) 

이와 같은 문교부의 방침은 사실상 영화검열제도의 부활로 인식되었고, 영윤은 물론 당대 대다수의 언론들은 이와 같은 조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 사친회의 <연인들> 상영 중단 요구를 비롯 미풍양속을 해치는 영화의 상영과 광고에 대한 반대 여론은 무시 못할 정도였다. 문교부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 10월 말 이에 대해 실사 심의 후 문제가 되는 영화는 ‘컷’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수입추천을 하지 않고 수입추천이 거부된 영화는 재차 수입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강경한 방침을 밝혔고, 나아가 11월 초에는 외화 배급사 대표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음탕한 영화광고, 유인물을 첨부하는 것’까지 단속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젊은 육체들> 사건으로 룰이 정립되다

1961년 초 검열과 관련하여 또 다시 커다란 사회적 논란이 발생했다. 당시 젊은이들의 행태에 대한 선정적인 표현으로 세계적으로도 논란이 되었던 영국영화 <젊은 육체들>(원명 Beat Girl, 1961)의 수입 상영과 관련된 것이었다. 검열 폐지 이후 실질적인 검열의 필요성을 주창함으로써 문교부가 공세에 섰던 <연인들>의 경우와 달리, 이 영화의 수입·상영 논란에 있어서는 영윤이 공세적인 입장에 섰다. 1961년 1월 21일 영윤은 사회풍기 관계 전문위원 11인의 심의 결과 이 영화에 대해 전원 일치로 상영보류 결정을 내렸고, 수입 회사인 세기상사의 재심 의뢰로 열린 전원위원회에서도 9대 7로 상영보류 조치를 결정했다. 이는 4월혁명 이후 영윤에 의한 최초의 상영보류 결정이었다.

그러나 문교부는 이 영화에 대한 심의가 이루어지던 1월 28일 이미 상영신고필증을 발부해 버렸고, 이에 기반해 수입사인 세기상사가 영화의 개봉을 준비했다. 이는 2월 내내 한국사회에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윤을 무시한 문교부의 결정에 대한 비판은 물론, 기존 미풍양속을 해치는 외화의 수입 관행에 대한 비판, <젊은 육체들>이 주제로 삼은 비트 세대에 대한 소개, 영화에 대한 찬반양론 등이 물끓듯 일어났다. 검찰 당국은 2월 7일 이 영화에 대한 입건 방침을 세우고 조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문교부는 2월 15일 청소년 단속이 어려운 2, 3번관의 상영은 보류하고, 대사 여섯 군데, 화면 일곱 군데 등 320피트를 삭제한 채 이 영화의 상영을 허가했다.
 
<비트걸> 제한 상영중지 명령 문서 (“외국영화 <비트걸> 상영중지의 건”, 문교부, 1961. 2. 18.)

이 사건은 영윤과 문교부 간의 감정적인 대립에 가까운 반목을 불러왔음은 물론 영윤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수입추천 단계에서 문교부의 실사 심의, 상영 단계에서 영윤의 심의라는 이중의 심의를 감당해야 하는 외화수입사들의 불만은 영윤의 무용론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언론이 문교부의 독단과 검열의 부활 움직임을 비판하는 한편. 영윤의 유지와 강화를 지원하면서 문교부의 입장은 곤란해졌다. 이와 같은 논란 끝에 문교부와 영윤은 3월 중순 다음과 같은 합의에 이르게 된다. 
 
문교부와 영화윤리위원회 전국위원회는 당면한 영화정책에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1. 외국영화 추천심의는 문교부 주최 아래 영화윤리위원회와 함께 한다. 
2. 외화 통관후의 작품심의는 영화윤리위원회측에서 한다. 
3. 외국영화 수입추천을 심의할 때 문교부와 영화윤리위원회 사이에 합의가 안되었을 때 영화윤리위원회측의 전원위원과 문교부가 위촉한 심의위원이 합석하여 심의한다. 
4. 예고편, 선전자료등을 통관추천심의할 때는 문교부와 영화윤리위원회가 합동심의한다. 
5. 신문광고, 극장간판, 선전탑 등의 단속은 영화윤리위원회에서 한다(《조선일보》, 1961. 3. 15.).

이와 같은 합의안은 문교부가 독점해왔던 외화 수입추천 심의를 문교부와 영윤이 함께 수행한다는 점에서 영윤의 입장에서는 진일보한 성취였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4월혁명 이후 오랜 기간 모호한 채로 유지되었던 외화의 수입과 심의절차의 행정 과정이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을 거쳐 새롭게 시작해야 할 영윤의 역사는 채 두 달이 못 돼 발생한 5.16 쿠데타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쿠데타 이후 계엄사령부는 사전 검열을 부활시켰다. 1961년 5월 15일 이전 신고필증을 받고 상영 혹은 공연 중인 영화·연극에 대해서는 사전 검열을 면제했지만, 신고필증을 받았더라도 상영 혹은 공연되지 않은 작품에 대해서는 사전 검열을 받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영화계는 쿠데타 직후 사회가 안정되면 영윤이 부활되기를 고대했으나, 이는 희망사항으로 남고 말았다. 검열은 부활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민간의 자율에 의한 심의제도는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영윤: 짧지만 중요한 역사적 경험 

영윤의 수립에서부터 기관의 운영, 해체에 이르는 대략 8~9개월의 짧은 기간은 다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관권이 배제된(물론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한국영화의 검열사에서 거의 유일한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하녀>(김기영, 1960), <오발탄>(유현목,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등 한국영화사를 수놓는 명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4월혁명과 영윤에 의한 자율적인 심의의 성과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좌) 제한 사항이 없이 발급된 <하녀>의 상영허가서(1960. 11. 1.) / (우) 제한사항 1개로 발급된 <오발탄>의 상영허가서(1961. 2. 14.)
(더 많은 서류는 "검열서류 컬렉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 )

그러나 앞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보았듯이 영윤의 시절이라고 해서 모든 영화가 자유롭게 상영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교부에 의한 수입추천권이 실질적인 검열 기제로 작동하였음은 물론, 심지어 영윤이 자체적으로 영화의 상영을 보류하는 결정까지 내릴 정도였다. 이는 민간에 의한 자율적인 심의가 모든 영화의 자유로운 상영에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한 영화의 수용 여부는 단순히 검열의 자율성 여부뿐 아니라 사회단체나 수용자들의 여론, 혹은 영상에 대한 감각의 한계선, 즉 망탈리떼(mentalite)에 의해 더욱 중요하게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오랜 기간 권위주의 정권을 겪으며 검열의 가장 중요한 변수를 국가로 두어왔던 한국영화사 연구의 흐름이 놓친 부분이기도 하다.

나아가 비록 등급 “서비스”를 표방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관영 심의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계의 현실에서, 영윤의 경험은 한국영화 심의 체제의 미래를 고민할 때 반드시 복기되어야 할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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