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화가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 유명 연예인과 셀럽을 초청해 개최하는 VIP 시사회라는 것이 있다. 관객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 위한 홍보 수단의 하나로, 영화는 이곳에 참석한 셀럽의 사진 한 장만으로도 대중에게 그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다. 그런데 VIP 시사회라는, 나름 효율성 높은 이 홍보 방식은 언제부터 도입된 걸까? 굳이 홍보 목적이 아니었더라도,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는 시사회는 언제부터 개최되었던 것일까? 영화 <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의 시나리오 작가,
니시키 모토사다(西龜元貞)의 컬렉션을 들여다본 순간부터 이런 궁금증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1910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니시키 모토사다는 1924년, 조선총독부 위생과에 부임한 부친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중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고등학교를 나왔고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대학을 중퇴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경성일보 학예부 기자로 취직했다. 니시키는 여기서 조선영화계의 여러 인물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덕분인지 이후 그는 영화의 길을 걸으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 <
수업료>(최인규, 방한준, 1940)를 기획했고, <집없는 천사>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이 외에도 이 시기에 그가 시나리오를 쓴 작품 중 현재 필름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
병정님>(방한준, 1944)이 있다.
*주1
고려영화협회 단체사진(1940년 여름께 추정)_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1열] 최인규(좌1), 김학성(좌2), 김신재(좌3), 이창용(좌7), 강홍식(좌8), 니시키 모토사다(좌9),박기채(좌11)
[2열] 방한준(좌5), 심영(좌7), 왕평(좌8) [3열] 임화(좌6), 서광제(좌7)
2005년과 2008년, 니시키 모토사다의 유족, 니시키 유리코가 기증한 그의 컬렉션에는 그가 조선에서 활동했던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의 조선영화 관련 사진들이 모여 있다. 일부는 그가 기획했거나 시나리오를 집필했던 <수업료>, <집없는 천사>, <
우르러라 창공>(김영화, 1943) 관련 사진들이고 일부는 경성일보사 학예부의 조선영화 담당 기자로 재직할 당시에 수집했을 것으로 보이는 사진들로, 총 21편의 영화에 대한 것들이다.
(좌 상단부터 시계 방향) <집없는 천사>, <우르러라 창공>, <한강>, <도생록>
_시나리오 작가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 조선영화 편
<
도생록>(윤봉춘, 1938), <
한강>(방한준, 1938), <
무정>(박기채, 1939), <
복지만리>(전창근, 1941) 등, 대부분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 영화인지라 그가 생전에 소중히 간직했을 이 사진들은 잃어버린 영화에 대한 상상을 무한히 자극한다. 와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바로 영화 <무정>의 시사회에 참석한 원작자
이광수와 주연배우
한은진, 감독
박기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무정>의 공식 개봉 하루 전인 1939년 3월 14일, 지금의 서울 중구 을지로 4가에 위치한
황금좌(黃金座, 국도극장의 전신)에서 개최된 시사회에는 춘원 이광수를 비롯해 각 방면의 인사 백여 명이 참석했는데,
*주2 박기채 감독은 이 시사회를 위해 이광수에게 의전 차량까지 보냈다고 전해진다.
*주3 그만큼 이날은 무척이나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다. 이 특별한 날의 행사는 지금으로 치면 ‘VIP 시사회’라 해도 무방할 테지만, 당시 언론은 이를 ‘시사회’라는 보통의 용어로 소개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이 특별함을 강조할 용어가 딱히 없었던 까닭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한 이래로 일반인 대상의 시사회라든지 관계자 시사회(지금의 기술 시사회), 언론 시사회 등이 개최되었다는 소식은 왕왕 보도되었지만, <무정>처럼 유명 인사들을 대거 초청한 시사회는 당시에 흔하게 목격되는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정> 시사회에 참석한 한은진, 이광수, 박기채(1939년 3월 14일, 황금좌)
_시나리오 작가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 조선영화 편
어찌 되었든 이 특별한 날의 분위기는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의 이 사진에서도 여실히 전달된다. 배우 한은진이 입고 있는 두툼한 외투는 3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꽃샘추위로 코끝이 시렸을 그날의 날씨를 짐작하게 한다. 다소 경직돼 보이는 한은진과 박기채 감독의 표정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당대 최고의 작가, 춘원과 함께 앉은 데서 오는 긴장감과 훗날 근대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기록될 소설 「무정」을 영화로 만든 데서 오는 결연함 등이 교차하는 표정이지 않았을까. 더욱이 이 작품으로 스크린 데뷔식을 치른 배우 한은진에게는 긴장감과 결연함 사이 어디쯤의 감정이 더욱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같이 성대한 시사회가 개최될 정도로, 영화 <무정>은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된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동시대인이라면 반드시 읽었어야 할 소설 「무정」을 원작으로 한 만큼 소설 팬들이 영화에 거는 기대가 컸고, <무정>을 제작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이하 조영)는 조선영화계에서 최초로 설립된 주식회사로, 고려영화협회와 함께 영화계를 이끌어갈 기대주로 주목받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영은 창립 제1회 작품 <무정>을 홍보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크랭크 인(1938년 3월)과 크랭크 업(1938년 7월) 소식, 평양 로케이션 촬영 소식, 현상과 녹음, 편집을 위한 일본 도쿄 출장 소식 등이 일간지에 틈틈이 단신으로 보도되었고, 크랭크 업 후인 같은 해 10월에는
최남용과 장세정이 주제가를 취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등,
*주4 영화 <무정>에 관한 소식은 1938년 한 해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적극적인 홍보는 작품에 그만큼 자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그 같은 자신감은 영화가 한창 촬영 중이던 1938년 5월, 대중문화잡지 《삼천리》에 <무정> 시나리오를 공개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주5
여기서 다시,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 속 <무정> 시사회 사진으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사진은 2008년, 유족 니시키 유리코의 이름으로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될 당시 “조선영화주식회사” 이름이 인쇄된 낡은 봉투에 다른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담겨 있었다. 봉투 겉면에는 경성일보 학예부 니시키 모토사다에게
김정혁이 보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조선영화주식회사 발행 봉투 (한구영화박물관 상설 전시 자료)
이는 경성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 중이던 니시키가 조영 소속으로 <무정>의 시나리오를 윤색한 김정혁에게 받은 사진이라는 말이며, 역으로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언론 홍보를 위해 경성일보사에 보낸 사진이라는 의미이다. 실제 발행된 《경성일보》에 실리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근대문학의 거장 춘원 이광수와 전도유망한 엘리트 감독 박기채, 촉망받는 신예 배우 한은진이 함께한 이 사진은 여러모로 특별한 순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전례 없이 특별한 순간에 이들이 느꼈을 긴장감과 결연함을, 언젠가 이 영화를 보게 될 우리도 느끼게 될까? 1939년 영화 <무정>의 필름이 우리에게 돌아올 날을 기다려본다.
***
주1.
니시키 모토사다의 이력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KMDb 컬렉션, “시나리오 작가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 조선영화 편”에 수록된 이화진의 「해제: 니시키 모토사다와 조선영화」를 참조할 것.
주2.
“<무정> 봉절 15일부터 황금좌에서”, 《동아일보》, 1939. 3. 16., 5면.
주3.
춘원, “영화 <무정>으로 공개장, 감독 박기채 씨에게 보내는 글”, 《삼천리》 제11권 제7호, 1939. 6. 1., 132쪽.
주4.
“무정의 주인공 주제가를 취입”, 《조선일보》, 1938. 10. 22., 4면.
주5.
이광수(원작), 박기채(각색), “토-키 씨나리오, 무정”, 《삼천리》 제10권 제5호, 1938. 5. 1., 275~2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