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영상 스며들기] Archives-Korea_1930-1940_식별놀이.zip 제임스 헨리 모리스(J. H.Morris), <Archives Korea 1930-1940>

by.김기호(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2024-07-05조회 1,002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Archives Korea 1930-1940>(이하, <AK>)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는 이 영상을 남긴 제임스 헨리 모리스(J. H. Morris, 1871~1942)의 생애를 중심으로 지난 글에서 충분히 소개했다. 조악한 화질의 시각자료와 모호한 문헌으로 흐릿하게 전해지던 당시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송두리째 담은 이 필름 릴들을 보면, 이것이 과연 개인적인 취미의 수준이었는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어쩌면 평생 남몰래 하나의 세계관을 발전시키고 그에 관한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던 헨리 다거(Henry Darger, 1892~1973)와 같은 ‘이름 없는 예술적 수행자’의 범주로 그를 이해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행히도 모리스씨는 좋은 아키비스트는 아니었다. 그저 친구들과 저녁 식사 후에 영사기에 걸고 함께 담소를 나누거나,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커피를 마시며 홀로 감상하는 정도로 필름을 관리하면 됐을 것이다. 모리스 정도 되는 사람이 이따금 필름 앞뒷면이 뒤바뀐 채 스플라이싱(필름 이어붙이기)되는 줄을 설마 몰랐을까? 화면의 좌우가 뒤집혀 영사되는 것 정도가 무슨 큰 대수라고. 한 이벤트에 대한 푸티지들이 여기저기 나뉘어 붙어 있는 것도 다 알고 놔둔 것일 테다. 굳이 푸티지들을 다 자르고 정리하여 다시 이어 놓을 필요까지야 있겠나, 나중에 혹시 재편집할 일 있을 때 제대로 따다 붙이면 그만이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렇게 설렁설렁 하는 것이 푸티지 재사용이 빈번했던 무성영화필름 시대의 흔한 관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컷들 사이에 적당한 메모가 적힌 리더필름이라도 삽입하든지 간략한 개요들을 따로 정리해서 적어놓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배부른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는 말이다. 

결국, 100년쯤 후에 조선인들의 후예가 이 엄청난 영상자료를 발견하고 기뻐서 흥분할지 답답해서 흥분할지 알 리 없는 이 위대한 은둔의 수행자는 필름 외에 다른 어떠한 단서도 남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AK>에는 아직 식별되지 않은 인물, 장소, 건물, 사건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이를 알아내기 위한 추리와 발품 팔이 과정 자체는 괴롭지만 뜻밖에도 미묘하게 즐거운 중독성이 있다. 나는 이런 행위를 ‘식별놀이(Identification Game)’라 부르고 있다. 늘 대수롭지 않은 정보 하나를 밝혀내려 아등바등하는 것이 이상한 집착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사소한 정보 때문에 장면 전체의 숨겨진 맥락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이야기가 입체적인 버전으로 ‘리부트(reboot)’되는 경우가 있다. 식별놀이는 이 맛에 한다. 아는 지식이 많을수록, 아는 문헌이 많을수록 난이도가 쉬워지겠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느긋하게 과정을 즐기면 된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영상 속에서 누가 모리스인가?’에 대한 추론들도 이런 과정의 결과이다. 이 글에서 한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겠다.


식별 미션 : 1930년대 탑골공원에 정말 어린이 놀이터가 있었나?

일제의 공원화 사업이 가지는 이중성에 대해서는 여기서 깊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어쨌든 일제는 「조선시가지계획령」(1934)을 기점으로 각 지역의 「시가지계획공원안」에 의해 근대식 공원녹지계획을 수립, 추진했고 경성부는 이보다 조금 이른 1930년, 「경성도시계획서」에 ‘아동공원’을 별도 분류 항목으로 처음 언급했다. 탑골공원의 경우 1932년 12월에 관리주체가 총독부로부터 경성부로 넘어가면서, 이듬해 하반기 즈음에는 ‘아동유희구’(놀이터 기구들) 설치 등의 개수공사를 통해 아동공원으로 재개장했으리라 추정한다.

<AK>에는 정확히 식별할 수 없는 장면들을 포함하여 공원 풍경이 심심찮게 포함돼 있다. 이 중, (당시 탑동공원으로 더 많이 불렸던) 탑골공원으로 추정되는 장면은 흑백 시퀀스 두 군데, 컬러 시퀀스 한 군데가 있는데, 모두 아이들이 미끄럼틀, 회전그네, 정글짐, 시소 등을 타고 노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장면 1] <AK> 01:01:25 부근 [장면 2] <AK> 01:01:40 부근

[장면 3] <AK> 01:02:01 부근 [장면 4] <AK> 01:02:57 부근
 
[장면 5] <AK> 03:37:54 부근 [장면 6] <AK> 05:10:30 부근

* [장면 3], [장면 4]는 과거 컬러 규격 중 하나인 코다컬러(Kodacolor lenticular) 방식으로 촬영했으므로 화면 전체에 미세한 세로줄이 보임.
따라서 기본적으로 흑백 프린트지만 이를 전용 영사 시스템으로 영사하여 컬러를 구현했었음. [장면 6]은 코다크롬(Kodachrome) 촬영본임.

대략 그럼직하더라도 기본적인 정보부터 맞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큰 억측의 발단이 된다. 영상의 장소가 1930년대 탑골공원인 것, 그리고 이때 탑골공원에 정말 놀이터 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증빙할 근거를 모을 필요가 있다. 제일 만만해 보이는 [장면 5]부터 추리를 시작해 보자.
 
[장면 5] <AK> 03:37:54 부근 장면


존재와 위치 검증

[장면 5]에는 담장 너머 ‘公園屋(공원옥)’이라는 곳의 간판에서 ‘釀造場(양조장)’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 업소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공원 담장 놀이터와의 연관성 등은 그 어떤 활자 기록이나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었지만, 1925년에 태어나 인사동과 종로 3가 인근에서 살았던 아동문학가 어효선 작가(1925~2004)가 1990년 시점에서 1930년대 생활을 회고하여 남겨 놓은 책 한 권이 큰 도움이 됐다. 
 
(...) 그 옆이 공원 뒷문인데 동문과 같다. 지금까지 오른쪽 담을 끼고 돈 셈인데,
뒷문을 보고 서서 왼쪽은, 연못이던 것을 메우고 만든 어린이 놀이터였다.
그네, 미끄럼대, 시소, 뺑뺑이, 정글짐, 철봉틀이 있고, 모래밭이 있었다. (...)

 
- 어효선(글), 한영수(사진), “탑골 공원과 뒷문 밖(발췌)”, 
『내가 자란 서울 : 1930년대 서울 살림 엿보기』(2판), 대원사, 2003.
(...) 공원 담 밑 길에서 인사동 큰길로 나가다가, 오른쪽 끝에 '공원옥'이라는 선술집이 있었다.
자리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술을 먹게 된 간단한 술집이다.
저녁 때 이 집에서 고기, 생선 따위를 굽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서 아이들의 입맛을 다시게 했다.
드나드는 문에는 세 폭의 천을 위쪽 3분의 1쯤만 이어 박고, 아래쪽은 갈라진 짤막한 휘장을 걸었다.
이 휘장 한 폭에 한 자씩 '公園屋(공원옥)'이라고 써서, 간판으로도 썼는데,실상은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가린 것이다.
사람이 드나들 적에는 이 휘장을 젖히거나 쳐들게 된다. 이 휘장을 차면이라고 한다. (...)


 - 같은 책, “선술집과 장전(발췌)”

그러니까 이 분의 회고에 따르면 [장면 5]의 장소가 탑골공원인 것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기억’이 100% 신뢰도의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것에만 의지하여 식별놀이를 종결지을 수는 없다. 이번에는 시선을 살짝 돌려 이 장면의 오른쪽에 일부만 보이는 벽돌 건물에 주목해 보겠다. 전체 외양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건물이 혹시 북촌 한옥마을 등 조선인을 위한 개량 한옥 단지의 개발자이자 민족사업가였던 ‘건축왕’ 정세권(1888~1966)이 자비로 건립한 조선물산장려회관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종에 알고보매 그(주: 정세권)는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특히 깊어서 조선물산장려를 몸소 실행할뿐더러
장산사(獎産社)라는 조선물산을 판매하는 상점을 탑골공원 뒤에 두고
조선산의 의복, 양복을 장려하고 《실생활》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야 조선물산장려를 선전하는 이인 줄을 알았다.

 - 이광수, “成造記”, 《삼천리》 제8권 제1호, 1936. 1. 1, 242쪽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재점화를 주도했던 정세권의 활약과 그러한 헌신의 상징인 낙원동 회관 건립에 관한 자료는 2017년 발간된 김경민 서울대 환경계획학과 교수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위즈덤하우스, 2017)와 프레시안에 기고했던 칼럼들에 상세하게 정리돼 있다. 이에 따르면 그 회관은 “낙원정 300번지에 위치한 3층짜리(또는 옥탑 층까지 포함하여 4층이라고 말하기도 함) 붉은 벽돌 건물”이었고, 당시 신문 보도 내용과도 일치한다.

문제는 이 ‘지번’이었는데, 일제강점기의 지번 체계가 광복 이후 얼마간 유지됐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지만, 최소한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지적원도상의 지번과 현재 지번의 위치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대략 영상의 건물 위치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앞의 책에서 추정한 위치와도 일치한다. 그 외에는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지번이 표시된 그 어떤 지도에서도 낙원동 300번지를 찾을 수 없었다. 지면상 지번이 생략돼 있거나 디지털 사본 화질이 떨어져 식별이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낙원동 300번지에 대한 자료 조회 비교
(좌) "지번입서울특별시가지도(地番入서울特別市街地圖)", 대한서림(1958)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300번지는 생략되어 있다.
(중) “지적원도”, 조선총독부(1917) / 국가기록원 지적아카이브 제공 : 토지조사사업(1910~1918)으로 확인된 300번지의 위치를 볼 수 있다.
(우) 현재(2024) 지적도 등본상의 300번지도 동일한 위치로 추정되며 도로 지목으로 할당돼 있다. 


사진과 영상의 비교, 촬영 상황의 재구성

보다 직접적인 근거는 회관 건물의 외양이 포함된 자료일 텐데, ‘이것이 회관 모습이다’라고 밝히는 자료는 사진이 실린 신문기사 1건과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 《장산(獎産)》(1931년 2월호) 표지 정도이다. 문제는 [장면 5]의 벽돌집이 일부만 나온 데다가 건물의 측면이라는 점이다. 외양의 특징적 유사성 정도는 확인할 수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 다른 자료가 발견되고, 교차 검증이 되고, 나아가 새로운 정보까지 낚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여전히 이것을 ‘사실’이라 말할 수 없다.

이를테면 1950년대 이후의 사진 및 영상자료들도 교차 검증에 도움이 된다. 특히 공중 촬영 사진을 찾는다면 좋을 텐데 지형지물이 잘 구분되는 경우가 흔치 않다. 아마도 공중 촬영한 사진 중 이 글의 관심 사항인 공원 북서부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연합뉴스의 도광환 기자가 1953년 6월에 촬영한 사진인 것 같다. (오마이뉴스는 이 소스를 게재를 허가받아 고화질로 공개 중이다.) 이것만으로도 [장면 5]의 벽돌 건물이 회관이 맞다는 것과 화면에 보이는 부분이 건물의 측면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장면 5]는 공원 서문 쪽에 가까운 담장 근처의 미끄럼틀 장면이 분명해졌다. 또 다른 쓸 만한 자료는 김천길 기자(전 AP통신)가 1956년에 촬영했다는 공중사진이다. 여기서는 북문 쪽에 더 가까운 공간에 그네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이때는 회관 옥상에 1층을 더 올린 것을 볼 수 있다. 
 
북문 쪽 공간과 관련해서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 중인 <조선의 애국일>(1940) 중 물산장려회관, 공원옥, 공원 내 놀이기구(정글짐)를 동시에 담은 장면이 있다. 팔각정 쪽에서 석탑 뒤의 공원 북서부를 비스듬히 바라보고 찍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제작, <조선의 애국일>(1940) 4분 22초 부근. 가운데 ‘공원옥’이, 탑 오른쪽에 물산장려회관의 측면 일부가 보인다.
‘공원옥’ 간판은 비스듬히 왼쪽 프레임 밖을 바라보고 있다. 즉, 이 화면은 [장면 5]에서 담을 따라 북문에 더 다가간 곳이다. ‘공원옥’ 앞에 정글짐이 보인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항들을 가지고 <AK>의 ‘탑골공원과 인근으로 추정되는 장면들’을 다시 보면 장면들 사이의 공간 관계를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단, [장면 4]의 장소는 탑골공원 외부인 것 같다. 처음에는 이 부근에 3층 이상 벽돌 건물이 흔치 않을 것으로 보아 여태껏 어느 자료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물산장려회관의 뒷마당이 아닐까 추정했으나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는 못했다.
 
<AK> 등 영상 속 촬영 장소와 시점의 추정 
배경으로 활용한 자료는 “탑동공원 각소 수선지(之)도”의 일부이다. 공원 내 배치 상황으로 보아,
조선총독부가 경성부에 공원 관리사업을 이관하기 전인 1910. 8.~1932. 12. 사이에 제작된 지도일 것으로 추정한다.


식별 놀이는 원래 엔딩을 보기 힘들다

지금까지 모은 자료와 식별된 정보를 바탕으로 촬영 시기도 어느 정도 좁힐 수 있다. 위 장면들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촬영됐다고 가정한다면, 조선물산장려회관이 준공된 1931년 9월 이후의 장면이다. 다시, 놀이기구가 보이므로 경성부 관리 이관 후 아동공원으로 재개장한 시기, 즉, 최소한 1933년 하반기는 지난 시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자료들를 찾는 중에 한가지 변수를 발견했다. ‘경성상공협회 회관이 낙원정 300번지 외 1호의 2층 양옥집으로 이전했다’라는 1936년 9월 23일자 기사가 있다. 물산장려회관의 300번지를 지번분할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물산장려회관과 상공협회관은 거의 붙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사에는 회관 건립 의연금을 기부한 사람 명단 중에 ‘정세권’이 있다. 결정적으로, 이보다 앞선 6월의 기사에는 상공협회관의 외양을 스케치한 그림이 실려 있는데, 납작한 2층짜리 상공협회관 건물 뒤로 보이는 실루엣은 물산장려회관의 탑층 있는 쪽 모습과 유사하다. 다시, 아까 소개했던 김천길 기자의 탑골공원 공중사진(1956)을 보자. 물산장려회관 뒤로 방금 본 상공협회관의 일부와 유사한 2층 건물이 그림자가 드리워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이것이 물산장려회관이 맞고 [장면 6]에서 상공협회관 왼쪽으로 빼꼼하게 보이는 흰 건물이 물산장려회관의 공개되지 않은 뒷 측면 모습이라면? 이 장면의 촬영 시기는 1936년 9월 이후로 늦춰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충분히 지쳤으므로 이 부분은 앞으로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자. 사실 <AK>에 사용된 필름의 엣지코드(edge code)로부터 필름 제조 연도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실 촬영일과 1~2년 이내의 오차로 시기를 추정할 수 있지만, 아직 모든 장면에 대해 심층 분석을 한 단계는 아니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다만, [장면 6]과 같은 코다크롬 규격은 1935년에 처음 출시됐고 <AK>에서 사용된 제조 연도가 가장 이른 코다크롬 필름은 1936년산이라는 점만 말씀드린다.


식별 정보로 봉인 해제된 영상 다시보기

이제 <AK>의 이 장면들은 더 이상 탑골공원 느낌의 어느 공원에 놀이터가 있고, 조선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놀고 있는 덤덤한 장면일 수만은 없게 됐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탄다. 해가 지면 북촌의 저임금 조선인 노동자들이 담장 너머 선술집에 모여들어 막걸리로 시름을 달랠 것이다. 일제의 견제로 힘을 잃은 지 십 년이 넘은 물산장려운동을 되살려 보겠다고 ‘건축왕’ 정세권이 자비를 털어 만든 물산장려회관이 공원 옆에 우뚝 서 있지만 그 한 사람의 힘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새로 생긴 놀이터는 내선일체 구호만큼이나 공허하다. 아마도 이 모든 맥락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정동에 거주한 지 40여 년 되어가는 한 이방인 사업가는 화려한 남촌의 풍경이 아닌 쇠락한 북촌의 정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오, 주여. 이들을 보호하소서.’

탑골공원과 인사동 인근은 어쩌다 보니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장소로서 변화무쌍한 이력을 지니게 됐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테지만 문헌에 남지 않았다면 서서히 희미해지다가 사라질 것이다. 영상은 그 최후의 보루이다. ‘식별놀이’는 나뉘어 묻혀 있는 기억들을 채굴하고 원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증명’의 대가로 받는 ‘소소한 즐거움’이라는 가상화폐 같은 것이 아닐까.


<덧붙임>
1. 직접 게재하기 어려운 사진 및 기사 자료는 부득이하게 링크로 대신했습니다.
2. 일제강점기 공원 정책과 관련한 내용은 다음 문헌을 참고했습니다. 
 - 조세호, 김영민, "경성부 도시계획서 상의 공원녹지 개념과 현황의 변화 양상", 『한국조경학회지』 vol.47, no.2, 2019, 117~132쪽.
3. 각종 자료를 무료로 공공에 개방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 서울역사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국가기록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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