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몽> 촬영 현장, 감독 유현목과 배우 박수정.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만희를 옹호한 유현목,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다
1965년 초 <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이만희, 1965) 사건으로
이만희 감독이 옥고를 치르고 반공법 위반 혐의 조사가 진행되며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도중 또 하나의 검열 관련 사건이 발생했다. 1965년 3월 23일,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 본부가 신문회관에서 주최한 ‘은막의 자유’라는 세미나에서의 유현목의 발언이 문제 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현목은
헌법 제14조에 의해 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규정되어 있음에도 “후진국이면서 ‘미묘한 사정’에 처해있는 나라의 국민은 아니 작가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라며 당대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의 일단을 내비쳤다. 이와 같은 발언이 정권 당국자를 불쾌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다음의 인용 구절들이 문제가 되었다.
또 이를 즈음해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로서 반공사상을 보다 고차원적인 면에서 제공․주입할 시점에 놓여 있다.
일련의 반공법 위반혐의 사태는 이러한 때의 변화에 대해서 외면했거나
아니면 편협적인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 애국행위라 해둠이 옳을 것이다…
최고의 예술은 최고의 정치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그래서 생명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반공이라면
언제까지나 영화예술의 차원을 높여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영화예술의 차원 높은 표현의 수단을 빌지 않고 국시를 최고로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주1
- 유현목,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 3. 24.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운운이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의 감독 이만희가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된 정황을 겨냥하고 있음은 누가 보더라도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특히 “반공을 국시로…” 운운의 발언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1965년 초 반공법 위반 혐의로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상영이 중지되고 감독이 투옥되었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감독이 투옥된 첫 번째 사례다.
발표 후 3개월 반이 지난 7월 13일 유현목은 서울 지검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문제 삼은 대목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일 수 없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체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였다. 또한 그가 그간 감독한 <
오발탄>(1961), <
잉여인간>(1964), <
순교자>(1965) 등 일련의 영화 역시 문제가 되었다.
*주2 이러한 검찰의 입장 발표로 인해 유현목은 반공이 한국의 국시임을 부인한 감독으로 이후까지 유명해졌다. 당시 원문이 없는 상태에서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검사가 인용한 이 워딩이 정확한지 의문이 든다. 당시 기사의 축약본에서 유현목은 반공이 국시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있고, 이후 판결문 역시 검찰의 논고 내용을 인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검찰 측이 문제를 과장하기 위해 인용문을 왜곡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 검찰이 근거로 삼은 법규는
반공법 제4조(“찬양 고무 등”)였는데 이는 이만희 감독에게 적용되었던 조항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이 입건을 발표한 시기가 상당히 절묘하다. 반공법 위반과 함께 음란죄로 동시에 기소될 유현목의 연출작 <
춘몽>(1965)이 개봉 중이었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춘몽>의 검열과정
유현목의 연출작 <춘몽>은 일본영화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의 리메이크작으로 원작 자체가 상당한 수위의 노출을 포함하는 문제작이었다. 애초 유현목은 이 영화의 파격적 노출 수위가 부담되어 거절하였으나 표현상의 전권을 부여하겠다는 제작사 측의 설득으로 결국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주3 치과에 들렀다 잠이 든 남성이 꿈속에서 병실에 있었던 여성이 치과의사에게 육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그녀를 구해내고자 하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과 노출,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케 하는 실험성으로 주목받았다. 그 검열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우선 이 영화가 일본영화 <백일몽>의 번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남아있는
<춘몽>의 서류철에 포함된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라는 내무 보고 문서를 통해 보건대 남아있는 제작신고 서류 이전(1964년 12월)에 이미 “일본인 원작 ‘백일몽’ 제작신고”가 접수되었으나 이듬해 1965년 1월 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반려되었다. 아마도 일본 원작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5년 2월 16일에 원작을 개작한 후 <춘몽>으로 제목을 바꾸고 제작신고가 되었으나 4월 22일 공보부는 다시 <백일몽>의 표절이라는 점과 내용이 비속하다는 점을 들어 반려하였다. 이에 제작사는 “전위적인 영화 표현”이라는 작품의 취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열네 군데의 수정 사항을 기재한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이후 공보부는 제작신고를 수리하였다.
영화 완성 후 본편의 검열신청은 1965년 5월 1일(접수는 5월 24일)에 이루어졌다. 본편 검열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5월 26일에 있었던 초심에서 중앙정보부는 이 영화에 대한 재심을 판정했고, 5월 31일 재심에서 역시 허가를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공보부 자문위원회는 3개처 제한 후 상영허가를 하면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6월 5일 “당부에서 영화 춘몽에 대한 재심 결과 그 내용이 자학적 변태성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한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244조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공보부는 “본 작품이 외설이라 판단되는 부분을 대폭 삭제하고 상영허가 조치”할 것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 후, 상영을 허가했다.
(좌)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반려" (<백일몽>의 표절, 내용의 비속으로 제작신고를 반려한 문서)
(우) "방화 '춘몽' 상영허가 경위" (<춘몽>의 본편 검열경위를 기록한 공보부 내부 문서)
음란죄로 기소되다
지난한 검열과정을 거친 <춘몽>은 마침내 1965년 7월 3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가 개봉 중인 7월 14일 유현목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1966년 1월 4일 검찰은 유현목을 반공법 위반뿐 아니라 음화반포(혹은 제조) 혐의까지 더하여 기소하기에 이른다.
*주4 한 감독이 반공법과 음란조항 위반으로 동시에 기소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영화 사상 감독이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우는 이만희에 이어 두 번째, 음란죄로 기소된 것은 첫 번째 사례였다.
<춘몽> 개봉 당시 신문광고(《조선일보》, 1965. 7. 2.)
이 영화가 음화반포(제조)죄 혐의를 받은 구체적인 정황은 영화를 제작할 당시 신인 여배우를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만들어 그녀의 뒷면을 촬영, 음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혐의는 논쟁의 여지가 다분했다. 촬영 당시 신체의 앞부분은 가린 상태였고, 뒷모습의 누드를 담은 6초 정도에 해당하는 이 분량은 검열 신청 전 이미 감독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주5 즉 이 장면은 대중은커녕 검열관에게까지 공개되지 않은 장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검찰은 징역 1년 6개월 및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유죄 취지로 구형한다. 판결은 1년이 지난 1967년 3월 15일 내려졌는데,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유죄 취지로 벌금 3만원을 선고하였다. 반공법 위반 부분에 대해 법원은 “①유피고인의 연설내용이 적성국가를 이롭게 할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었고 ②영화 「7인의 여포로」에 대해서도 어느 특정 장면을 지적한 것이 아니며 단지 예술가의 일반자세를 논한 것이기 때문에 반공법 위반죄를 물을 수 없다”라고 판시했던 반면,
*주6 음화반포(제조)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유죄의 취지를 밝혔다.
이 영화는 상대방 여자에게 폭행, 린치, 전기고문 등 가혹한 행위를 하여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현상을 보고
또 이와 같은 행위를 당하고 남녀가 서로 성적인 자극과 만족을 얻는 것을 그린 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변태성욕자에게 기어 완전 나체로 달아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므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양식에 비추어 정상인에게 이상한 성적 자극을 주고 수치, 혐오의 감정을 일으키게 함에 족하다고 인정된다.
헌법에서 보장된 학문•예술 및 표현의 자유도 헌법 제32조가 정한 공공복리에 의하여 제한되고 이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므로
이 범위를 벗어난 권리행위는 권리 남용에 해당하여 헌법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주7
- 서울형사지법 판결, 1967년 3월 10일 선고.
이 판결에 대해 당시 언론을 비롯한 법조계와 예술계 인사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제가 된 장면을 검열 전에 삭제했다면 그것은 음화 반포로 볼 수 없고, 촬영 당시 불과 10여 명의 스탭 앞에서 나체로 여배우가 등장했다고 했던 점 역시 음란물의 전시에 해당할 수 없으며(제243조 관련), 해당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해도 검열 전 삭제된 이상 그것은 완성품인 영화라 볼 수 없으므로 음화 제조라 볼 수 없다(제244조)는 것이다.
*주8
이에 검찰과 유현목 감독은 공히 항소하였고, 항소의 결과는 다시 2년이 훌쩍 지난 1969년 10월에 나왔다. 당시 항소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법 합의 2부는 반공법에 대해서는 역시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영화예술에서도 예술성과 음란성이 양립될 수 없으며 아무리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라도 음란성이 있을 때는 외설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취지로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주9 비록 선고유예이긴 하지만 유죄가 판결된 것이다.
<춘몽> 중 한 장면
반공과 음란의 결합
“은막의 자유” 세미나 발표와 <춘몽>을 엮은 이 사례는 한 재판 대상에 반공과 음란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단순히 우연한 별개 사건에 대한 병합 재판의 사례일까? 아니면 일정한 연관관계에 의해 검찰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일까? 굳이 음모론의 입장에 서지 않더라도 두 사건의 연관성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세미나 발표의 불온성을 문제 삼고 싶었던 검찰의 입장에서 해당 사건만으로 사법적 처벌이 내려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비슷한 시기의 <춘몽>에 대한 음란죄를 함께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검찰은 이러한 『춘몽』에 대한 판결에는 대체로 만족했다.
유감독을 반공법 위반으로 다루다가 우연히 인지하여 부산물(?)로 기소했던 것이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산물인 반공법 위반 부분이 무죄가 되었으니 시무룩…
- “춘몽의 일장춘몽, 음화라고 유죄판결 나오게 된 사연”, 《신아일보》, 1967. 3. 16.
‘주산물’과 ‘부산물’을 나누고 있는 위 인용문은 당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권당국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말하자면 반공법을 비롯한 사상 혹은 사회적 문제는 정권당국이 ‘주’되게 관심을 가진 영역, 풍속은 ‘부’수적인 관심을 가진 영역이라는 의미일 터다. 이는 당대에 사상통제가 엄격히 이루어졌던 반면 풍속에 대한 검열은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있었다는 검열 연구자들의 인식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두 주제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풍속에 대한 통제는 사상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거나 구실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효과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은막의 자유”와 <춘몽>의 병합 사례라 할 것이다.
검열은 최종적으로 인적 통제를 통해 완성된다. 검열의 최후의 수단이자 목표는 창작자를 향해 있다. 그것은 단일 작품에 대한 검열과 달리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사건의 유죄 판결 이후 동료인
김수용은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 판결이 있은 이후 표현에 많은 심리적인 제한을 받게 되어 부득이 예술적으로 필요한 러브신이나 나체 면의 제작이 위축될 것 같다”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주10 그러나 이러한 위축은 유죄를 선고받은 음란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
주1.
이 기사에 실린 내용은 발표문의 원본이 아니라 축약본이다.
주2.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은막의 자유 발표”, 《동아일보》, 1965. 7. 14,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 7. 14,
“만물상”, 《조선일보》, 1965. 7. 15 등.
주3.
“인터뷰, 40년만의 감개무량한 복원, <춘몽>의 유현목 감독”, 맥스무비, 2004. 7. 29.
주4.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음란죄의 근거로 삼았던 조항은 형법 제243조(음화등의 반포)였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감안컨대 음화 등의 제조를 규정한 244조 역시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법 제 243조는 “음란한 문서, 도화 기타 물건을 반포, 판매 또는 임대하거나 공연히 전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44조는 “전조의 행위에 공할 목적으로 음란한 물건을 제조, 소지, 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주5.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열 전 삭제했다는 기사와 나일론 네글리제를 입힌 같은 신의 다른 대체 장면을 썼다는 기사가 병존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정황 서술의 구체성을 감안할 때 아마도 후자가 진실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주6.
“영화 춘몽 음화로 판결, 유현목 감독에 벌금 3만원 선고”, 《한국일보》, 1967. 3. 16.
주7.
김재훈, 「음란성 개념 변화에 관한 연구: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100쪽.
주8.
“영화 춘몽의 법 적용 시비, '공개 전 삭제... 유죄론 보기 힘들어'”, 《조선일보》, 1967. 3. 21.
주9.
“춘몽은 '외설영화', 유현목 감독 선고유예”, 《서울신문》, 1969. 9. 25.
주10.
“법 이전의 검열기구 활용을, 표현에 심리적인 제한”, 《동아일보》, 1967.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