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푸는 한국영화사 미스터리] 한국영화 '야인시대'

by.이수연(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2024-05-31조회 1,771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2022년 노만 선생님의 생애사 구술 인터뷰를 진행하며 굉장히 흥미롭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하여튼 그때 내 임화수 씨를 처음 알게 됐고, 임화수 씨는 또 젊은 나를 굉장히 좋아했어. (웃음)
그래서 보통 우리가 아는 임화수하고는 전연 달러. 주먹이지만 굉장히 뭐라고 그럴까, 겸손해요. 
 


노만(영화평론가, 2022, 90쪽)


아마도 위 발언에서 ‘보통 우리가 아는 임화수’란 SBS 드라마 <야인시대>(2002~2003) 속 캐릭터로서의 임화수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 51.8%, 평균 시청률 30%를 찍었던 이 드라마에서 임화수라는 캐릭터는 픽션적 상상력이 더해지긴 했지만 그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각종 ‘썰’들을 대체로 반영하고 있고, 또 해당 역을 맡은 배우의 살벌한 연기 덕에, 시청자들에게 아주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에 비열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위 구술에서 이어지는 “겸손해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모르는 사이에 ‘겸손’의 뜻이 바뀐 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국제영화》 1959년 7월호 속 임화수

하지만 임화수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평가는 1950년대 활동했던 영화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양반이 스태프들한테는 잘했어요. 거기서 말썽 일으킨 거는 저, 돌아가신 김희갑 씨 때려가지고선 갈비가 부러졌다,
그때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스태프들한테는 난 잘했다고 생각을 해요. …
또 영화에 투자도 많이 하고요. 이런 얘기하면 뭐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도 영화산업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난 생각을 해요.


- 이도원(편집, 2004)

내가 생각하기에 임화수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본질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성격이 나뻐,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원래 깡패 출신 아니에요? … 나는 임화수의 덕을 많이 본 사람이에요.


- 박진수(조명, 2007, 53~54쪽) 

아주 연예계에선 임화수라고 하면 알아줘야돼, 그때. 뭐 배우고 뭐고,
연예계에 하여튼 가수고 뭐 할 거 없이 임화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그렇게 돼 있었다고, 그 당시에.
근데 임화수 씨하고 나하고는 아무런 마찰이 한 번도 없었고. …
그리고 임화수는 배운 게 없지마는 머리는 잘 돌아가고 약았어.
그때 그래가지고 무슨 문화부장관인가, 응? 박마리아 여사한테 가 붙어가지고
그때 문화부장관인가 뭐 발령이 났다가, 사건이 터져가지고 고만뒀든가, 아마 그렇게 됐어.
그 얼마나, 그 사람 위대해. 위대한 사람이야. 학교 못 다녀도 그런 정도로 했다면, 응.

 

- 이지룡(배급, 2012, 171쪽)

그러나 위 구술에서 중요한 것은 ‘정말 임화수가 괜찮은 사람이었느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어떻게 1950년대 활동한 영화인들에게 임화수가 깡패이면서도 ‘위대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었는가이다. 

사실 구술자들이 임화수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중 일부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에 기대고 있다. 즉, 자신이 개인적으로 덕을 봤거나, 그와 특별히 마찰을 겪지 않아 그의 나쁜 점을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구술자들이 이야기하는 그에 대한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기억을 조금 우회하면서 한국영화사에서 그의 ‘공적(功績)’이라고 이야기되는 것들이 어떻게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는 1950년대 중후반의 한국영화 산업을 이해하는 것과도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앞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한국영화의 역사가 ‘임화수’라는 한 인간을 통과하며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통일된 방향이 아니라 마치 빛이 프리즘을 지나 여러 갈래로 굴절해 뻗어나가는 것처럼 다양한 결과들로 귀결될 것이다. 


깡패는 왜 ‘극장’을 좋아했을까?

그럼 먼저, 임화수와 영화산업에 접근하기 이전에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내가 영화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꼬꼬마 시절에 <장군의 아들> 시리즈(임권택, 1990~1992)를 볼 때도, <야인시대>를 보면서도 항상 궁금했던 것은, ‘왜 저 사람들은 자꾸 극장 앞에서 싸우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싸움에 적당한 장소로서 극장 앞에 공터가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김두한’ 하면 ‘우미관’이라는 극장을 떠올리는 것처럼 당시 깡패들은 이상하게 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장군의 아들>(임권택, 1990)의 한 장면. 오른쪽에는 김두한의 주 활동무대인 ‘우미관’이 보인다.

물론 이때 제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돈이 되니까’일 것이다. 실제로 당시 극장은 아주 수지가 좋은 현금 장사였다. 임화수처럼 직접 극장을 운영함으로써*주1 수익을 얻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흥행업은 주먹 패거리들에게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나는 경리만 보고 돈만 계산하고. 표 받고 뭐하고 하는 거는 주먹이 댕겨요.
극장에 가면 극장마다 그 동네 깡패들이 있어. 그러면 이놈들은 날마다 극장은 상시출입이야.
지 맘대로 돈은 안 내고. 얘네들이 내려가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주먹이니까 딱 오면 “아, 형님 오셨습니까.” 절대로 그냥은 못 들어와. 

그리고 또 유명한 게 그 당시만 해도 지방 가면, 입장료가 500원이다 그러면 400원 가지고 와서 그냥 들어가려고 그런다고, 현찰로.
그러면 지금은 표를 찍고 그러지만, 여기 딱 궤짝이 있고 구멍이 뚫려있는데, 표를 받으면 여기다 넣는 거야.
그런데 이제 이 궤짝을 주먹쟁이가 깔고 앉아. 극장 직원이 표를 받아서, 돈도 받으면 그걸 그 궤짝에 넣는 거야.
이 궤짝이 그날 전체 수입이야. … 이걸 가지고 극장 사무실에서 쏟아 가지고 표는 표대로 돈은 돈대로 해서 다 계산을 해요.
그리고 ‘오늘 얼마가 들어왔다’고 극장에다가 먼저 들이민다구. 그러면 극장에서 마지막날 전체 수입이 얼마다 계산해서,
당시 극장이랑 3:7이야. 극장이 3이고 단체(공연/연극단을 말한다)가 7할 가져가는 거거든.
그렇게 계산해가지고 거기서 세금 떼고 돈 딱 주면 그걸 봉지에 다 넣고 계산서 딱 붙이고,
봉투를 딱 여매서 신주 모시듯, 잊어버리면 큰일나니깐. 그런 식으로 지방을 돌고 올라와요. 


- 김인기(제작/기획, 2004)

구술자 김인기는 임화수와 어린 시절 같은 집에 세를 들어 살았던 인연으로, 후에 성인이 되어 임화수가 연예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을 때 그의 회사 경리로 일하며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인기에 따르면, 극장마다 일명 기도(木戸, ‘문지기’를 뜻하는 일본어)라고 불리는 힘 꽤나 쓰는 ‘주먹’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역할은 입장권을 사지 않고 몰래 극장에 들어가려 하거나 과감하게 ‘자체 할인’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막고, 표나 돈이 다른 곳으로 새지 못하도록 돈통 지키는 일을 했다. 그리고 아마도 공연단과 함께 극장을 돌며 간혹 배우들에게 시비 거는 사람들을 때려주는 일도 했던 것 같다.
 
그때는 깡패들이 한몫을 한 게 있어, 흥행계에서는. 그런 일 많지.
배우가 유명하면 또 명동서 술먹고 놀다가도 얻어맞기 일쑤고, 댄스홀에서도 곤조부리고 그런 거지. 그런 거 많어.


- 황남(배우⋅제작/기획, 2004)

이처럼 극장의 기도 또는 수표주임은 극장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력이었는데, 이들을 지정해주는 것 역시 그 지역을 관리하는 주먹 패거리들이었다. 1950년대 명보극장 부사장을 지냈던 구술자 이지룡은, 명보극장의 수표주임으로 명동파 이화룡이 보내준 사람을 썼다고 말했다.
 
   
명보극장의 전경과 내부
 
이화룡이라고 있어. 무섭긴 이화룡이 더 무섭지. 이화룡이는 명동파야. 임화수는 종로파고.
근데 극장 하나 시작을 한다 하면은, 그 기도주임이라는거, 수표주임이야, 응?
(이화룡은) 바로 극장이 자기 극장인 거처럼 생각하고, “이 사장, 수표주임은 내가 보낼 테니까 그 사람 쓰시오.” 이렇게 된 거야. 


(질문) 수표주임은 임화수랑 이화룡이 보내주는 사람을 무조건, 모든 극장이 다 쓰는 거예요?

응, 대부분 아마 그랬을 거야. 내 알 건댄 그래.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착취해 먹는 게 아니고,
다 자기들 따르는 그 나름대로의 제자들이거든? 그러니까 밥벌이 하라고 취직을 시켜주는 거지.  
 

- 이지룡(제작, 2012, 170~172쪽)

그런데 이 정도뿐이라면 깡패들치고 매우 성실하고 건전하게 극장과 공존하며 수익을 나눠 갖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이 당시 깡패들이 극장으로부터 수익을 얻는 가장 주된 방법이기는 했지만, 좀 더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삼류관인께 한 푸로 4일간, 그러면 네(4) 푸로를 해야 돼.
회장이 한 푸로, 써금써금헌 놈 영화사 아무거나 그냥 공이로 갖다가 붙여먹고 많든 적든 수입 가져가.
그때 유지광이가 그다음 꼬붕이여. 유지광이가 대. 그러믄 인자 극장 앞 부근에 이런 놈 있어.
“사장님, 우리도 먹고 살어야 된다”고 …  그럼 9일을 뺏겨 갖고 21일 갖고 장사를 허니 미치제. 


- 전경섭(배급, 2007, 80쪽)

전경섭은 해방 이후 제국관(동방극장으로 명칭 변경)을 불하받은 형 전기섭의 밑에서 극장 운영을 배웠고, 호남 지역의 영화 배급일도 맡았었다. 이후 전기섭은 서울 동대문 천일극장을 운영하게 되는데, 천일극장은 광장시장 앞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평화극장과 매우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술자 전경섭은 천일극장이 평화극장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화수가 자신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천일극장이 이정재의 권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위 구술은 당시 이정재가 천일극장으로부터 어떻게 수익을 챙겨갔는지 설명하고 있다. 천일극장은 재개봉관으로 영화 한 편을 상영하면 평균 4일 정도 상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정재와 유지광, 그리고 그 밑에 깡패들이 영화사로부터 낡은 영화 한 편씩을 공짜로 가져와서는 극장에 상영하게 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수익은 자신들이 가져갔다. 그러면 극장 측은 한 달 중 열흘*주2 정도는 영업을 하고도 한 푼 벌어들이지 못하니,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극장 주변의 깡패들은 대체로 영화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대중오락으로서 인기가 있었던 영화 흥행을 이용해 쉽고 빠르게 현금을 챙기고자 했다. 그러나 임화수는 단순히 극장 경영을 돈벌이로만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단체를 조직하고, 더 나아가 영화 제작에 돈을 투자했으며, 영화 정책에도 관여하고자 시도했었다. 그의 이러한 영화산업에 대한 욕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국산영화면세조치에 대한 기억
 
그때 그 면세조치운동이요, 지금 그거를 어떻게들 평가할런지 모르지만,
사실은 임화수가 나쁜 짓도 했지만 좋은 짓도 했어요. 임화수가 그 국산영화면세조치를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 강대선(감독⋅제작/기획, 2004)

1950년대 영화 기자로 활동한 바 있고, 이후 영화 연출, 영화제작⋅기획을 했던 구술자 강대선은 임화수와 관련하여 그의 가장 큰 공(功)으로 ‘국산영화면세조치’를 꼽았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비오는 날이었어요. 내가 기억하기론 여름인데,
돌아가신 김승호란 배우가 있었는데,아주 유명한, 동남아시아를 석권했던 명배웁니다.
이 양반이 하얀 모시저고리를 입고 단성사 극장 흙탕물에 털썩 주저앉아서 땅을 쳤던 일이 있어요.
각 신문 사진기자들이 (담기에) 좀 좋아. 당대 최고의 스타가 말이지 비오는 날 말야
물구덩이에 앉아서 땅을 치면서, 또 연기는 좀 잘했겠어? (웃음) 연기자인데.
이거를 전부 그냥 사진을 찍어가지고 곽영주 경무관이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을 가리킨다)한테 드린 거라.
이 박사가 그냥 특명을 내려가지고 이기붕 씨가 손수 나서서, 말하자면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조치를 해줬지. 


- 강대선(감독⋅제작/기획, 2004)

구술자가 이야기하는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영화배우 김승호는 당시 임화수가 경영했던 한국연예주식회사 소속 배우였다. 즉 임화수는 자기 회사의 소속 연예인을 이용하여 극적인 그림을 만들어냈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곽영주를 통해 이 그림과 함께 ‘국산영화면세조치’에 대한 청을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전달했다는 것이다.
 

영화 <해떨어지기 전에>(강대진, 1960)에서의 배우 김승호.
구술자가 말하는 상황과 대략 비슷할 것 같은 사진을 골라보았다.

구술자의 증언이 너무 극적이고, 눈앞에 그려질 듯 생생해서 하마터면 덜컥 믿어버릴 뻔했다. 그렇다고 구술자가 말하는 상황 자체가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약간 기억의 왜곡이 작용한 듯 보인다.*주3 사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국산영화뿐만 아니라 흥행물에 대해서도 입장세 인하 요구는 꾸준히 예술인들에 의해 주장되어왔다. 그 결과 국산영화제작 진흥의 일환으로 1954년 3월 31일 공포⋅시행된 입장세법에는 ‘국산영화에 대해 입장세를 면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다시 말해 임화수가 극장 및 연예단체 운영자로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조치는 이루어져있었으며, 그는 오히려 이러한 특혜조치에 따른 이득을 누리기 위해 영화계로 영역을 확장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게다가 김승호가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동남아시아 영화시장에 이름을 알린 것도 1957년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이 동남아에 수출되고,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최우수희극상을 받은 뒤부터였다(물론 이전에도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연극계에서 더욱 이름이 높았다). 따라서 강대선이 기억하는 저 화려한 퍼포먼스는 적어도 1958년 이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주4 

비록 몇 가지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기억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위 구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임화수라는 인물이 ‘김승호’라는 명배우를 동원할 수 있는 힘과, 동시에 국가 최고 권력에 닿을 수 있는 ‘끈’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영화계에 들어와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해외 진출 시도와 실패

임화수는 영화계에 첫발을 딛는 동시에 과감하게도 해외로 진출했다. 많은 당대의 영화인들이 꼽는 그의 두 번째 ‘공적’이 바로 이 해외와의 합작 시도이다. 그는 1957년 한국연예주식회사에 소속된 배우와 스태프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갔다. 홍콩에 도착한 이들을 맞이해준 것은 동남아 지역에 대규모 극장 체인과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있는 유명 영화사 쇼브라더스였다. 
 
처음에 홍콩에 도착을 했더니, 트랩에서 내리는데 정말 배우생활 60년 동안에 그런 카메라 세례를 받아본 건 처음이야.
TV기자라든가 잡지사, 신문사 기자들 한 50명이 트랩 밑에서 후레쉬를 터뜨리는데, 정말 야! 정신이 없더라구요.
… 그날 저녁, 우리가 파티 저녁을 먹는데 그쪽 뉴스에 “한국배우들 도착” 그리고 합작영화 소개가 뉴스 시간에 나오더라구.
그러니깐 그때부터 우리 일행들은 좀 흥분이 되고, (웃음) 새롭게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왜냐하면 아시다시피 50년대 우리 영화계는 아주 빈약했고,
또 촬영현장 가도 카메라래든가 조명이래든가 여러 가지 기재가 아주 구닥다리였고. …
근데 가서 촬영현장을 보니까 쇼브라더스의 스튜디오라든가, 조명기구, 카메라 그리고 기술적인 그 흐름이
아, 역시 우리가 처음 보는 그런 환경에서 연기한다는 게 참 신기스러울 정도로, 변화를 느끼게 됐죠.


- 윤일봉(배우, 2015, 11~12쪽)

영화 <이국정원>(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의 스틸컷. 왼쪽이 구술자 윤일봉이다.

쇼브라더스 측에서는 일찍이 1956년부터 한국 정부에 자신들이 보유한 영화와 한국영화를 교환하는 방식의 무역 거래를 요청해왔다. 이 시기 쇼브라더스는 동남아시아를 넘어 한국과 일본으로 시장의 확장을 꾀하고 있었고, 한국도 1955년 제2회 동남아시아영화제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여했던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해외 진출(한국영화의 수출과 합작을 통한 기술 교류)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서로의 필요가 맞닿은 찰나에 적극적으로 그 기회를 잡은 것이 임화수였다. 그리고 그가 다른 영화사들에 비해 더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 역시 임화수에게 닿아있던 정부 권력 덕분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 합작영화 제작이 어려웠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당시에는 여권을 받아 해외로 출국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 때였다.
 
그때는 국제적이라는 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합작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나 홍콩을 자주 왕래할 수도 없었고.
… 아주 여기서 허가 내는 데 어려왔어요. 절대로 못 나가는 거예요, 그때는. (22~23쪽)
… 나라에서는 여권이라든가 그 편의는 문화공보부, 그땐 공보부에서 ‘많이 편의를 봐줘라.
이거 대한민국을 위해서 외화수입만 의존하지 않고 이제 우리도 합작을 해서
우리 걸 제대로 국제적으로 이 무대에서 나가는 거니까 도와줘라’ 그래서 스무스하게 왔다갔다 하는 거는 참 잘했어요, 우리가.
 


- 문금순(제작, 2014, 22쪽)

하지만 무엇보다 합작 진행 과정에서 가장 힘든 것은 외화(外貨)를 국외로 반출하는 일이었다. 쇼브라더스와 한국연예주식회사는 합작 당시 제작비를 5:5로 분담하기로 했다. 영화제작이라는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거액이 필요한 사업이었고 그 절반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그러나 1950년대는 국내 보유 외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외화의 사용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고, 매년 상공부의 무역 계획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규모가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계획에도 없는 거액의 외화를 갑자기 필요에 의해 갖고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대한 불만은 임화수가 ‘썼다는’ 칼럼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해외시장 확보에 목적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투자를 자유스럽게 해야 하겠는데 우리 영화제작계에는 외화(外貨)가 없고, 또한 있다 해도 자유롭게 해외에 투자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속히 정부는 선진국의 예를 따라서도 해외시장진출을 목적한 영화제작에 제작비를 보장 내지 보상해주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투자의 자유스러운 길을 열어주어야만 우리 영화도 우방국가의 영화와 대열을 같이 하여 해외시장을 어느 만큼이라도 점유할 수 있고 따라서 발전과 향상을 기하리라 생각된다.
 
- 임화수, "합작영화의 가능성", 《조선일보》, 1958. 2. 20. 4면 기사 중


어쨌든 이런 장애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화수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때그때 외화를 조달해가며 합작을 진행했다.
 
합작영화라면 외화 유출을, 인제 보내줘야 되잖아요? 근데 대체로, 송금하고 이게 아니라 이 양반이 싸 가지고 갔다고.
왜냐면 세관이라든가 이게 외화유출로, 법적으로 걸릴 수도 있는데 이이는 용감했어요.
그리고 또 세관 사람들 다 알고. 임화수 하면은 뭐 다 그때는 통할 때니까.
“아, 오늘 누구 엄마 연락해서 몇 만 불 좀 사라.” 뭐 이래서 현금 주고. 자금줄이라는 게, 그이가 그렇게 돈이 많고 이러지는 않더라고요.
그때 평화극장 하면서 뭐 갈쿠리로 긁을 정도로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이니까 현금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거기는 그거 갖고는 제작비 감당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에요, 잔돈푼은 될지언정.
대개 재택이 엄마가 계모임을 조직해서, 그거 어… 동대문시장 상인연합회에 7형제라고 있어요.
그 부인들하고 계조직을 하면은 계모임에서 그 돈을 가져오고. 또 두 번째 부인을 통해서.
자기 본부인하고 둘째 부인하고 경쟁을 시킨 거예요. “얼마가 오늘 필요한데, 며칠날 홍콩 가는데 돈이 있어야 되니까 해오라”고.
양쪽에서 해오는데 어떤 때는 안 되는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되면, “크, 그냥 너는 아주 최고다.” 막 이러고.
그날 인제 좋은 분위기로 그 집을 가는 거고. 안 되면 “야, 넌 그것도 못 해오냐”고, “기분 나쁘다”고 막 싸우는 수도 있고. (18쪽)

  … 각 극장에서도 좀 도와준 것 같아요. 극장주들이 많이 도와줬고,
또 나름대로 주위의 고리대금하는 사람들도 슬슬 흘려서 빌려줬어요. 이자를 다른 데보다 싸게.
… 하여튼 저는 열심히 그냥 명동에 달라 아줌마한테 가서 받아다 드리고. (30~32쪽)
그냥 야미(뒷거래)지. 그러니까 주머니에 넣고 가서 쓰고. 또 홍콩 자체에서 필요해서 교포들하고 거래로 해서
우리나라 돈 주고서 하는 수도 있고. 무슨 수든지 하여튼 우리 걸 분담은 다 깨끗이 했기 때문에 그 영화가 나온 거겠죠. (35쪽) 


- 문금순(제작, 2014)
한국연예주식회사와 쇼브라더스가 합작한 영화 <천지유정>(김화랑, 1957) 양국 참여 스태프 단체사진

그런데 이렇게 힘들게 동원된 막대한 자금은 제작비로도 사용되었지만, 대체로 경비로 나갔다고 한다.
  
보은의 뜻으로 자기한테 충성했던 사람들을 홍콩 구경시켜 준다고 많이 갔어요.
… 외국에를 나갔으면 좋겠는데 영화를 핑계로 나갈 수 있는 길이 트였다고 굉장히 선호도가 좋았어요.
배우들이고 뭐, 엑스트라라도 좋으니까 홍콩 좀 한번 갔다 왔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조금 이쁘게 보이면 그냥 “이번에 너 데려간다” 이렇게 해서. 그런 경비가 좀 많이 나갔어요.


- 문금순(제작, 2014, 40~44쪽)
제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한중 합작영화 제작의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상을 수상한 임화수(왼쪽에서 세 번째) 

이런 식으로 3편의 합작영화를 제작했지만, 흥행에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하자 그는 합작에서 손을 뗐다. 비록 임화수는 합작에 손을 뗐지만, 이후에도 합작에 대한 국내 영화사들의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특히 1962년 제정된 영화법에서 합작영화를 법제화하여 그 기준을 정하고 정식 공보부의 허가 절차를 통해 자금 출자도 가능하게 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물론 이와 같은 규정이 만들어진 바탕에는 어쨌든 앞서 합작을 시도했던 임화수의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영화법이 제정된 후 가장 활발하게 합작에 나선 것은 신상옥 감독이 이끌던 신필름이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초까지 신필름(신프로덕션)을 거쳐간 많은 영화인들은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을 통해 새로운 영화기술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196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 홍콩 무협영화의 인기가 높아지자 다수의 한국 영화제작사들이 합작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것이 1970년대에는 위장합작 문제를 야기시켰고 이로 인해 합작영화에 대한 여러 제한 규정들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이는 그만큼 당시 합작영화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한국영화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 시기를 기억하는 영화인들에게는 처음 합작을 시도했던 임화수의 공이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임화수는 자신이 세운 공든 탑을 버리고 다른 선택을 했다. 이맘때부터 그는 반공예술단을 결성해 소속 연예인들을 관제행사에 동원하는가 하면,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신상옥, 1959)과 같은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는 <만송 이기붕>이라는 제목의 문화영화와 함께 1960년 3월 15일 이루어질 정부통령선거를 위한 선전영화로 전국 극장과 군(軍)에서 상영되었다. 여전히 연예계에서 활동하며 영화를 만들고 있었지만, 정치깡패로서 정권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선택이 그에게 가져온 결말은 모두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깡패냐, 예술인이냐
 
3.15부정선거의 결과로 4.19혁명이 일어났고, 임화수는 이후 3.15부정선거 개입과 고대생 시위대 피습사건 등 정치폭력 혐의로 체포되어 여러 차례의 재판 끝에 1961년 12월 21일 사형에 처해졌다. 재판 최후진술에서 임화수는 자신이 ‘예술인’임을 강조하며 “국가에 공로는 있을지언정 죄를 지은 일은 없다”*주5고 주장했다. 5.16 이후 진행된 혁명재판의 최후진술에서도 그는 다시 “자유당을 위해 <청년 이승만>의 영화를 만드는 등 이용만 당하다가 억울하게 고대생 습격범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으니 잘 살펴달라”*주6며 자신이 ‘문화사업가’임을 강조했다. 물론 그의 이러한 발언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구차한 발버둥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예술인’으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하든 크게 문제될 바는 없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가 이 ‘예술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에 있다. 임화수는 무궁화악극단과 코리아악극단이라는 당시 굵직한 두 개의 악극단을 연합하여 한국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하고는 소속 연예인들을 빈번하게 자신의 명예와 문화적⋅정치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영화산업에 뛰어든 후에는 자신이 가진 뒷배를 동원하여 합작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속시켜 제도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작비를 긁어모아 지인들과 선심성 여행을 다니기에 바빴다. 이렇다 보니, 이른바 그가 한국영화사에 남긴 공로라는 것도 단지 ‘예술인’ 또는 ‘문화사업가’가 되고 싶었던 한 깡패의 허세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임화수는 비슷한 길을 걸었던 화성영화사의 이화룡과 비교가 된다. 이화룡은 앞서 구술에서도 나온 것처럼 명동파 어깨두목으로 1958년 일명 ‘명동깡패사건’으로 기소되어 1959년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 사건이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몰라도 그는 1960년 화성영화사를 설립하며 영화제작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4.19 이후에는 임화수와 마찬가지로 ‘단체적 폭력행위’로 혁명재판에 기소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지만*주7 1963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에도 영화인으로서의 생을 살며, 한국영화계에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 

<신세계>(박훈정, 2012)에서 정청이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이자성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제 고만 선택해라. 그래야 니가 살아”)처럼 임화수는 어느 순간엔가 자신이 영화인으로서 살 것인지, 정치깡패로 살면서 언젠가는 몰락할 정권과 그 운명을 같이 할 것인지, 둘 중에 하나의 길을 선택했어야 했다. 따라서 분명한 선 긋기에 실패한 이 예술하는 정치깡패는 한국 연예계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고 여러 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기는 했지만, 끝끝내 죽는 순간까지 대중에게 ‘예술인’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
주1. 
임화수는 해방 후 적산(敵産)이 된 제일극장(일제시기 미나도좌)을 불하받은 뒤, 평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주2.
영화 한 편에 4일 상영이니까, 이정재, 유지광, 그 아래 깡패가 한 편씩만 들고 와도 총 12일간은 극장 수익이 없는 셈이다. 구술자는 9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구술자의 단순한 계산 오류일 수도 있겠으나, 이 날짜가 그만큼 유동적이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3.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연예주식회사에서 회계 담당 직원으로 일했던 문금순도 구술에서 “한국영화 세금 안 내게 한 사람이 임화수 씨”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문금순은 면세조치가 이루어진 과정이 강대선과는 또 다르다.
“‘우리 한국영화를 위해서 말이야 면세조치를 받아야 되는데 재무부장관 집에 새벽에 쳐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래 갖고 김승호 씨, 김희갑 씨, 복혜숙 씨, 고선애 씨, 이향자 씨 이런 사람들 … 막 끌어내고. 그래서 새벽 일곱 시에 재무부장관 집을 가는 거예요. … 재무부장관이 허락해야만 되니까. 그래 갖고 그걸 뚫고 면세조치가 돼서 한국영화 세금 없이 상영관에 상영을 했어요.” (공영민,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문금순 박행철 안정무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4, 23~24쪽 참조.)
그러나 이 역시 잘못된 기억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아마도 임화수는 자신의 의견을 중앙에 전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4.
국산영화면세조치 덕분인지는 몰라도, 1955년 이후 한국영화는 제작편수 면에서나 흥행 면에서나 눈에 띄는 상승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타 무대연예예술이나 외국영화와 비교해봤을 때, 국산영화만 특별히 입장세를 면해주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 1958년 즈음이다. 그리고 1959년 자유당에서 제안한 입장세법 개정안(국산영화와 외화 모두 극장의 등급에 따라 세율을 차등 부과)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이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시위가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국회 앞에서 배우들 진정", 《조선일보》, 1959. 12. 27. 3면 기사 참조)
구술자 강대선이 봤다는 시위는 1958~1959년 즈음에 있었던 이 배우들의 시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위가 입장세법 개정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960년 개정⋅시행된 입장세법에 따라 국산영화에 대해서도 2~4%의 입장세가 부과되었는데, 대신 1958년 문화공보부 고시를 통해 우수 국산영화를 제작한 영화사에 외화수입배급 쿼터를 1편씩 추가로 배정하는 ‘국산영화제작장려 및 영화오락순화를 위한 보상특혜’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임화수는 외화 배급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보상정책이 수립되는 데에 그의 입김이 얼만큼 닿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주5.
"법정스냎-말끝마다 예술인/임화수, 국가공로 있다고", 《동아일보》, 1960. 9. 6. 3면 기사.

주6.
"임화수⋅유지광 최후진술", 《경향신문》, 1961. 8. 22. 조간 2면 기사.

주7.
이때 그의 범죄혐의는 ①국도극장 임검순경 폭행 ②명보극장 사장을 협박하여 권리행사 방해 ③투자액 반환을 요구하는 공연 투자자 폭행으로 인한 상해 등 세 가지였는데, 모두 영화사 설립 이후 극장 흥행과 관련한 폭력 행위로 이전에 명동파로 활동하던 때의 범죄로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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