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날의 국가정보원, 80-90년대 국가안전기획부의 전신이자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한 핵심 권력기관, 수많은 민주인사들에 대한 고문으로 악명높았던 곳. 바로 중앙정보부다. 그런데 국가안보라는 거창한 임무를 수행하던 이곳이 영화검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 심지어 공식적이고 제도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던 사실은 그저 원로영화인 몇 분들의 증언으로 전해져 왔을 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 영상자료원이 검열서류들을 공개한 후에야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는 못했다. 이 글은 그 예비적인 시도로, 중앙정보부가 영화검열에 참여했던 역사와 방식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960년대 초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한 검열 개입
필자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선에서 볼 때, 중앙정보부가 검열서류에 등장하는 최초의 사례는 <
오발탄>(유현목, 1961)의 재검열 문서다. <오발탄>은 1961년 4월에 개봉하였으나, 5.16쿠데타 직후 상영중지가 되었다. 이후 7월 20일 재검열을 거쳐 상영중지가 공식화되는데, 이때 재검열의 주체 중 하나로 처음으로 중앙정보부가 등장하는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것이 1961년 6월이니, 한달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검열관은 <오발탄>에 대해 “치안면에 있어서 역효과를 초래할 우려가 다분 내포하며 현 시국으로 보아서 상영불허함이 가하다고 사료됨”이라 밝혔다. 이후 <오발탄>은 1963년까지 상영정지 상태에 처하게 된다.
정보부가 영화검열에 개입한 최초 사례로 추정되는 <오발탄> 재검열 문서
다만 <오발탄>은 특수한 사례로, 아직은 정보부의 영화검열이 일상적이거나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전수조사를 해보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대략 1961년 9월경이 되면 정보부가 빈번하게 검열에 개입하는 것을 서류로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확인한 첫 사례는 <
붉은 두목>(이영, 1961)이라는 반공영화의 본편 검열서류이다. 이후 정보부는 주로 국가 안보와 결부된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검열자로 참여했다. 1962년 영화법 제정 후 제작신고라는 이름으로 시나리오 검열이 점차 (준)제도화되면서, 정보부는 본편뿐 아니라 시나리오 검열에까지 관여하게 된다. 이들 영화가 국가 안보에 관련된다는 점에서 중앙정보부의 개입이 정당화되었던 것일 텐데, 역으로 보자면 중앙정보부가 관심을 가짐으로써 반공영화가 국가의 안보 이익을 해치거나, 나아가 불온한 영화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
7인의 여포로>(이만희, 1965)
*주1 사건일 것이다. 당초 공보부와 정보부의 합동 검열에서 이 영화는 소수의 제한사항만으로 통과되었으나, 이후 정보부의 입장 번복으로 영화 상영이 중단되고 반공법 위반으로 감독이 구속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검열 후 돌연 <7인의 여포로>의 상영보류를 지시한 중앙정보부의 서류(전언통신문)
반공영화만이 중앙정보부가 개입하는 장르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 1964)와 <
춘몽>(유현목, 1965)의 사례를 들 수 있겠다.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는 내용상의 불온성이 문제가 되었다기보다는 제3공화국의 초기 위기를 낳은 한일협정 반대 시위라는 시국상황과 관련되어 영화의 반일적 톤이 민감하게 포착된 것으로 보인다. 서류에 따르면 이 영화는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1964년 12월, 공보부 검열을 마쳤으나 돌연 1965년 3월 6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중앙정보부가 추가 검열사항을 전달함으로써 검열 결과가 변경되었다. 이에 관해
신상옥 감독은 중앙정보부가 개봉을 반대했으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으로 개봉이 가능해졌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당시의 검열이 반드시 서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다.
<춘몽>이 형법에 저촉되는 영화이므로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하라는 내용의 정보부 전언통신문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의 경우 그 맥락상 정보부의 개입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란, 외설이 문제가 된 <춘몽>의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 영화의 검열에 참여한 정보부는 “자학적 변태성향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 국민 여론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 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할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제244조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 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할 것으로 사료”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정보부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공보부는 문제 장면의 대폭 삭제 후 상영허가조치를 하였지만, 이후 감독
유현목은 음화제조반포죄로 기소되어 유죄 취지의 판결(선고유예)을 받기에 이른다. 안보나 사상이 아닌 풍속 문제의 영화에 대해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이유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면 관계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유현목 감독이 반공죄로 투옥되었던
이만희 감독을 옹호한데 대한 보복성 조치로 이해되고 있다.
상시적 검열자가 되다(1968년 말~ )
1968년 말에 접어들게 되면 중앙정보부의 영화검열 참여 방식이 전환된다. 개봉되는 모든 영화에 대한 상시적인 본편 검열자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정보부의 본편 검열이 제도화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0월 5일에 검열에 합격한 <
일본인>(김수용, 1968)의 경우에는 기존 방식대로 검열이 이루어졌으나, 10월 15일 시행된 <
수전지대>(김수용, 1968)의 검열서류에서는 정보부의 영화검열의견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10월 중순(늦어도 11월 초순)경부터 정보부가 검열에 참여하는 관행이 시작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수전지대>의 정보부 영화검열 의견서(삭제 대상으로 명시된 "집단 난투장면")
현재 시점에서 중앙정보부가 상시적인 검열자로 등장하게 되는 구체적 배경을 설명하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김신조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납북사건과 같은 1968년의 안보적인 위기 상황, 1968년 7월 말 공보부가 문공부로 전환되었던 행정체제의 개편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새로 개편된 체제에 따라 상시 검열은 정보부 외 내무부(치안본부)와 주무부처인 문공부 세 곳이 담당했다. 이전의 주체와 비교할 때, 문공부(주)와 내무부(부)에 정보부가 추가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세 주체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1970년대 문공부의 영화검열 담당 직원이었던
이남기의 증언을 참고할 수 있다.
근데 그 검열관 구성은, 국산영화 경우에 대개 인제 과장하고 국산영화 담당 사무관하고 그 실무자까지 들어가요. 에.
들어가서, 그러고 인제 외부에서는 인제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청소년과에서 파견된 이 검열관들이.
그래서 문공부하고 중앙정보부하고 그 저 치안본부하고 결국 세 개 기관이 맡아 전담하게 되죠.
그리고 인제 ... 안기부(정보부의 착각)에서 온 분들은 주로 인제 국가안보에 그 위해, 저해요인 같은 거.
우리가 남북분단 된지도 참 오래됐지만은 이런 긴장관계에 있으니까북한을 찬양한다든지,
요즘 어떤 세태하고는 전연 틀렸죠, 그 당시는.
그 엄격히 영화든 처리할 때니까. 그 북한 찬양 이런 문제.
그러고 인제 치안본부 청소년과에서 나오는 거는 결국 인제 청소년의 유해여부, 이런 걸 인제 보고.
그리고 요즘도 그 하지만은 청소년 그 관람 등급가부 이런 걸 주로 결정하게 되고.
그러고 그 유해성 저 윤리성, 이런 문제도 그때는 상당히 그 시기에는 엄격히 다뤘어요.
- 채록연구 배수경,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한국영상자료원, 2015, 147-148쪽, 강조는 필자
즉, 사상 및 안보에 관한 사항은 중앙정보부, 미성년자 보호(미성년자 관람가부 판정 포함)에 관한 사항은 치안본부가 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공부는 전반적으로 검열 진행과정을 조율하고, 의견을 종합하여 제작사와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공윤의 본편 검열 이후(1979년 4월~ )
약 10년 이상 유지되었던 본편 검열 체제는 1979년 4월, 문공부가 본편 검열권을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에 이관함으로써 변경된다. 공윤의 1기 영화 심의위원은 20인 이내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심의위원 17인은 공윤위원장의 추천에 따라 문공부 장관이 위촉였고, 3인은 당연직으로 구성되었다. 이 당연직에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의 검열관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체제는 1980년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히 어느 시점에 종료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료의 미비로 확인되지 않는다. 보완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1979년 7월 24일, <간첩잡는 똘이장군>(김청기, 1979) 공연윤리위원회 위원별 검열의견서 중 하나. 검열자 임광수는 중앙정보부 검열위원이었다.
요컨대 중앙정보부는 1961년 설립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20여년간 영화의 검열자였고, 특히 1968년 하반기 이후에는 상시적으로 영화 검열에 참여했던 가장 중요한 검열자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정보기관이 영화검열에 제도적이고 상시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당시 정부가 대국민 선전전을 광범위하게 수행했고, 영화의 대중 영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초기에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부분적으로만 관여하던 정보부가 1968년 말 이후 모든 영화의 본편 검열에 참여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것은 이 시기 국가 안보라는 것이 단순히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화가 다루는 국민의 일상에까지 확장해 가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는 1970년대 유행했던 “총력안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부기해 둘 사항이 있다. 간혹 검열서류에서 CIA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검열자료 연구 초기, 필자를 포함 관련 연구자들이 이를 미국의 정보부로 오인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러나 CIA가 언급된 다양한 검열자료들을 볼 때, CIA는 KCIA(중앙정보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차후 연구를 통해 보다 분명히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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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목으로 재편집되어 1965년에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