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푸는 한국영화사 미스터리] 할리우드 최악의 영화가 바꾼 한국영화사 <인천(오! 인천)>(테렌스 영, 1981)

by.이수연(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2024-03-26조회 3,680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흔히 ‘망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말 전설적인 망작이 되어 오래도록 ‘제일 망한 영화’ 리스트에 오르내리는 방법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컬트로 재정의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시에는 망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 ‘망했다’라고 평가되는 지점이 후대에는 묘한 매력이 되어 이를 즐기는 팬들에게 숭앙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할리우드 영화 역사에서 <인천(오! 인천)>(테렌스 영, 1981, 이하 <오! 인천>)은 전자에 해당하는 영화이다. 천문학적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개봉 이후 비평계와 대중 양쪽 모두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했고, 제3회 골든 라즈베리상 최악의 작품상을 수상하며 그 명성에 정점을 찍었다(최악의 작품상 외에도 최악의 남우주연상, 최악의 감독상, 최악의 각본상 등 4관왕에 올라 모름지기 당해 연도 최악의 영화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고 이 글을 통해 섣불리 <오! 인천>을 컬트로서 재평가하려 하거나, 혹은 그럼에도 영화팬들에게 감히 시간을 들여 한 번 즈음 볼 만하다고 추천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피할 수 있는 것은 그냥 피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는 오직 <오! 인천>을 둘러싼 외부적인 기록들, 그리고 여기에 참여했던 한국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영화로 기록된 이 작품이 한국영화계에 몰고 온 변화와 그것이 이후 한국영화들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도 역대급의 제작 규모

처음 <오! 인천>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는 1978년 3월 신문기사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남궁원, 윤미라*주1 등 20여 명의 배우가 출연하고, 미국의 원웨이프로덕션과 일본의 동보영화사가 제작에 참여하며 각본은 <그린베레>(존 웨인, 레이 켈로그, 1968), <프렌치 커넥션>(윌리엄 프리드킨, 1971)의 원작자인 로빈 무어와 폴 사베지가, 감독은 <서부로 가는 길>(앤드류 V. 맥라글렌, 1967), <철인들>(앤드류 V. 맥라글렌, 1969)과 같은 서부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앤드류 V. 맥라글렌이 담당하기로 했다.

그렇게 5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는 영화는 그러나, 5월이 한참 지나도록 촬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7월이 되자 이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왔다. 기술협조를 하기로 한 일본의 동보영화사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든가, 시나리오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는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촬영 개시를 지연시킨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였다. 당시 각색을 담당했던 로빈 무어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대해 “2시간 안에 담아내기에 너무 방대한 이야기였다. … 등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결국 다른 작가들이 투입되었다”라고 이야기했다.*주2 결국 1978년 5월에 촬영에 들어간다던 영화는 무려 1년을 더 기다려 1979년 5월, 새로 영입한 감독이 한국을 방문하며 다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교체된 감독이 무려 테렌스 영이었다. 테렌스 영은 국내에서 ‘007 시리즈’로 명성이 나 있는 감독이었다. 한국에서는 1965년에 <007 제2탄 - 위기일발>(테렌스 영, 1963)이 007 시리즈 가운데 가장 먼저 개봉했다. 실제 007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트렌드에 민감한 수입업자들은 서둘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007 살인번호>(테렌스 영, 1962)를 수입해 개봉했을 정도였다. 테렌스 영이 감독한 마지막 007 시리즈 <007 썬더볼작전>(테렌스 영, 1965)이 국내에 개봉하고도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테렌스 영은 여전히 국내에 다수의 팬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영화 촬영을 위해 방한한 테렌스 영 감독이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6.25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 한국이 공산당에 침략당했다는 것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리게 될 것(《경향신문》 1979.5.5)”이라는 발언을 한 이후, 북한에서 《로동신문》의 논평을 통해 이 영화가 “악랄하게 중상모독, 헐뜯는 반동 내용(《경향신문》 1979.5.16)”이라고 비난하며 제작 중지를 요구해왔다. ‘테렌스 영’이라는 스타 감독의 참여에 더해 친한(親韓)적인 그의 발언,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게 화제성을 확보하면서 <오! 인천>에 대한 기대는 더욱 높아졌다.

뒤이어 해외 출연진도 속속 명단이 발표됨과 동시에 배우들이 한국에 도착했다. 물론 제일 관심을 끄는 것은 과연 누가 ‘맥아더 장군’의 역할을 맡을 것이냐였다. 놀랍게도 그 역은 영국의 영화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돌아갔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햄릿>(로렌스 올리비에, 1948), <헨리 5세>(로렌스 올리비에, 1944), <리차드 3세>(로렌스 올리비에, 1955) 등 셰익스피어 작품을 기반으로 한 영화의 주연을 맡아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배우이고, 1947년에는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으며(국내 신문기사에서도 로렌스 올리비에를 지칭할 때는 꼭 올리비에 ‘경’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빅터 플레밍, 1939)와 <애수>(마빈 르로이, 1940),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엘리아 카잔, 1951) 등의 작품으로 국내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던 비비안 리의 연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그가 ‘맥아더 장군’의 이미지에 잘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로렌스 올리비에’가 그 역을 맡는다는 것 자체로 이 영화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자, 미국에서 공수해온 장비와 동원된 스태프, 엑스트라의 스케일이 또 한 번 한국 측 스태프들과 언론, 촬영현장을 구경하러 온 시민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당시 촬영 현장의 분위기와 이 영화의 규모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 신문 기사와 구술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6.25 당시 피난민들의 행렬을 재현한 촬영 현장(《동아일보》 1979.9.5)
  
테렌스 영 감독을 비롯해서 로런스 올리비에 경,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등 세계 정상의 배우들이 우리나라에 몰려와 촬영 중인 영화 <오! 인천>은 스태프 캐스트 못잖게 엄청난 물량 작전으로 계속 화제를 뿌리고 있다. … 현역미군 등 5백명의 엑스트러와 탱크 4대, 장갑차 2대 등이 출연한 서울탈환 장면은 당시 서울 거리와 가장 비슷한 인천 신포동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됐다. … 지난 6월 28일 촬영을 시작한 영화 <오! 인천>은 용인 민속촌을 비롯하여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강원도 횡성비행장, 경북 왜관, 인천, 서울 등을 돌며 제작됐다. 이중 6.25 당시 낙동강 철교 폭파를 재현한 촬영에는 피난민 차림의 엑스트러 1천 3백명, F86 등 전투기와 탱크들이 동원돼 13일 동안 6대의 카메라에 담았다.*주3 인천에서도 폐기된 수인간(水仁間) 미니열차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고 영흥도에 3천만원을 들여 등대를 세우기도 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모습은 인천 제2부두에서 촬영됐는데, 군함 12척과 상선 10여척이 동원돼 장관을 이뤘다고. … 이 영화는 당초 1천8백만 달러(90억원)의 제작비가 계상되었으나 제작기간의 지연 등으로 이미 3천5백만 달러(1백75억원)가 투입됐단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물량이 동원된 이 작품에는 6명의 주연급 배우(남궁원 포함)와 테렌스 영 감독이 쓸 캠핑카 8대, 토일렛카, 링컨 컨티넨털 승용차, 지프 2대가 미국에서 운반됐다. 캠핑카는 침대와 화장실, 식당과 에어컨 장치가 돼 있어 촬영현장에서 주연 배우들이 쓸 수 있도록 했다. 또 높이 10m까지 올라가는 크레인 카도 제작자인 이탈리아인 기사가 직접 가져와 운전하기도. 이밖에 진행을 위해 1백30대의 차량이 국내에서 동원되고 영화에 등장할 40년대식 승용차 6대,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에 쓰던 차와 동형의 크라이슬러, 그리고 탱크, 장갑차, 소제(蘇製) 무기 등이 미국에서 옮겨져왔다. 칠순의 로런스 올리비에 경을 비롯해서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데이비드 젠슨(TV영화 <도망자> 주연), 리처드 라운트리,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 등 세계적인 배우를 포함, 한국인 1백명, 미국인 50명, 영국인 30명, 이탈리아인 30명, 일본인 30명 등 스태프가 참가한 이 영화는 인적 구성에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짙게 띠고 있다.
 
- “<오! 인천> 로케 한창, 엄청난 물량작전 한국동란 재현(《경향신문》 1979.9.14.)

 
그때 내가 <오! 인천>을 보고, 카메라가 아홉 대가 다 뭐냐하면, 다 파나비전 카메라예요.
아리플렉스가 아니라. 미국에서 원 파나비전 카메라, 제일 좋은 카메라예요!
 
  (구중모, 2015, 212쪽)*주4

그때 하얏트 호텔 2층 일체를 썼죠. 그때 뭐 복사하는 데도 있었고, 뭐 신기하게 여겼죠. …
우선, 이 장비가, 장비가 많아, 양이.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없는 현대적인 장비. 특히 낮에 라이트를 킨다는 게, 이건 못 보던 거거든. 

(김호길, 2016, 116쪽)*주5

그때 150대의 차가, 그러니까 자동차 배차하는 거 있잖아요? 배차요원을 홍콩에서 데려왔어요. 현장에서 차 관리하는 애가 스무 명.
또 뭐 관리하는, 여하튼 식당이 있잖아요? 식당이 두 팀. 얼마나 웃기냐면요,하얏트 호텔에서부터 문산까지 온다고 생각하면,
시내는 500미터, 긴 거리는 1키로마다 깃발을 꽂아놔요. 잊어먹을까봐. 한 팀이라도 늦게 나오면 안되잖아요. 
  … 엄청난 돈이에요. 은행 차가 쫓아, 현장에서 줘. 은행 차가 다녔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럼 스태프들한테 시간 당 현찰로 줘버려요, 엄청난 돈을.
 
  (박광남, 2023, 112~113쪽)*주6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서 촬영된 다리 폭파 장면의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중앙청 앞에서 진행된 서울 탈환 장면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통일교, 그리고 영화에 쏟아진 혹평들

특히, 당시 <오! 인천>에 참여했던 국내 스태프들은 구술에서 공통적으로 외국에서 온 스태프들이 하얏트 호텔의 한 층을 통째로 빌려 사용했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울 하얏트 호텔은 이 영화가 촬영되기 1년 전인 1978년 7월에 개장한 5성급의 미국 체인 브랜드 호텔이었다. 평소 한국영화 촬영을 다닐 때 “5천원짜리 여관방에서 댓 명이 한 방을 쓰는”*주7 환경에 익숙해져 있던 충무로 스태프들에게 최신식 시설이 갖춰진 호텔을 촬영 기지로 쓴다는 것은 꽤나 인상 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촬영을 끝낸 촬영팀에게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촬영팀의 출국을 앞두고, 하얏트 호텔의 숙박비 22,327,000원을 지불하지 못해 촬영 기자재 등의 유체동산에 대한 가압류 처분이 내려졌다. 당시 물가를 생각했을 때, 2천여만 원이라는 금액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몇 백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에서, 외국인 출연자들의 주급을 매주 헬리콥터로 실어나르고, 스태프들의 일당 지급에 은행차까지 동원해가며 그때 그때 현찰로 지급하는 등 제작비를 쓰는 데에 아낌이 없던 영화 제작사가 호텔 숙박비를 내지 못해 가압류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자금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며칠 뒤 제작사와 호텔 측이 합의에 도달하며 가압류 기간이 연기되었다는 짧은 기사로 이 사건은 정리가 되었고, 촬영팀도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 인천>를 둘러싼 구설들은 끊이지 않았다. 먼저 한국 체류 당시 테렌스 영의 손목시계와 필름 1,345피트(당시 시가로 350만원 상당)를 도난맞은 사실이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그러나 끝내 범인도 잃어버린 물건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1980년에 이미 모든 촬영을 다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개봉과 관련하여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다가, 1981년 2월에는 이성구 감독이 재편집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 와중에 5월에는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미국의 상류층 인사들을 모아놓고 <오! 인천>의 비공개 시사회를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런데 시사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케네디센터 주위에서 통일교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며, 영화에 대한 가타부타 평가는 없이 모든 관심이 ‘통일교’에만 쏠려버렸다.
 
비슷한 시기 국내에서도 <오! 인천>을 둘러싼 아주 미스터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81년 8월 4일 용산구 원효로에 살던, 일명 ‘원효로 보살’로도 알려진 70대 노파가 그녀의 양녀⋅가정부와 함께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평소 유명 정치인들의 점을 봐주거나 복을 빌어주며 고위층과 인맥을 형성한 바 있고, 이를 통해 큰 부를 쌓았던 윤 노파가 살해당한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윤 노파의 <오! 인천>에 대한 투자 여부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주8 이렇게 <오! 인천>에 대한 관심은 작품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는 자꾸 그 주변부로 옮겨가고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관심이 이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개봉해서 흥행만 잘 된다면 이까짓 구설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대중에 영화가 공개된 것은 프랑스 칸에서였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제작사 측은 칸국제영화제에서 “25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영화 제목이 새겨진 키트 등을 나눠주고 16일 시사회가 끝난 후 호화파티를 열었는데 구매희망자가 나타나지 않았다(《조선일보》 1982.5.19)”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신문 기사는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외면당한 원인을 통일교와 연관 짓고 있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영화의 완성도 문제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해외 영화시장에서 전혀 판매되지 않았고, 1982년 9월 17일 미국 내 상영만이 힘겹게 성사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혹평 일색이었다. 급기야 통일교 측에서는 영화제작팀 이름으로 《뉴욕타임즈》,《워싱턴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LA타임즈》, 《뉴스 월드 인 뉴욕》, 《워싱턴타임즈》 등 6개 일간지 전면광고를 통해 “미국 기자와 평론가들이 <인천> 영화 자체의 가치는 평가하지 않고 이 영화의 특별후원자로서 문선명 목사의 이름만 강조하고 있는 데 대해 서글픔을 느낀다”라며 “영화 <인천>의 예술적 가치를 객관적 입장에서 냉정히 평가해줄 것을 미국 국민들에게 촉구(《동아일보》 1982.10.5)”했다. 그러나 영화 <오! 인천>의 흥행 실패를 통일교와의 연관성에서만 찾는 것은 오히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럼 처음 제작 때부터 그토록 큰 대중적 관심을 끌어모았던 <오! 인천>은 왜 한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던 것일까?

 
 

<벤허>보다 (제작비가) 더 많이 들었다고 그랬어, 그 작품이, <오! 인천>.
근데 한국에서 상영 못한 거는 뭐냐 하면 너무 북한을 우상화 시켰다는 거야, 영화를. 그래서 안된 거예요.
(구중모, 2015, 216쪽)

영화가 안 되는 이유는 … 정치적인 거예요, 그게. 국방부에서 3일 공연을 했어요, 국방부에서만.
그래 그 시대에 그거야, 이북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공연 못하게 한 거예요. 그거 잘했으면 문선명이 자기 일대기를 하겠다고 그랬다고. …
다 영화제작사에서 잘못한 거야. 일개 장교가 비행기 타고, 한국에 들어올 때 이승만 대통령 등때기 탕탕치고 하는데,
그렇게 푸대접을 하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은 사실 아니거든. 한국의 국익이 상하지. 그래서 나라에서 공연 못하게 했는데. 미국에서도 안 됐어.
전혀 안 됐어요. 한 일주일 하고 문 닫았어.
(박광남, 2023, 154쪽)



<오! 인천> 제작 당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던 박광남은 이 영화가 국방부 내에서 시사회가 이루어진 이후, 한국에서의 영화 상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만약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 영화를 본 국방부 관계자들은 북한에 대한 미화는 둘째 치고, 일부 장면에서는 적군보다 더 나빠 보이는 데다가*주9 전쟁 장면 내내 인민군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민중들보다도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한국군의 모습을 더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영화 속에 드러난 한국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나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고증 실패를 모두 눈 감아 준다고 하더라도 앞서 이야기했던 구설들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인 영화를 국내에서 상영하겠다고 나서는 업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무려 4,6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대작 영화는 조용히 사라졌다(IMDb 기준, 이 영화를 통해 벌어들인 총수익은 520만 달러에 불과하다. 이중 오프닝 수익이 230만 달러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여기서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같은 해 1천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영화 <이티>(스티븐 스필버그, 1982)는 미국 내에서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8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한국영화계에 <오! 인천>이 남긴 것들

하나의 작품으로서 <오! 인천>이 가진 수명은 여기에서 끝이 났지만, 한국영화계에서 이 영화는 또 다른 방향으로 계속해서 그 영향력을 이어갔다. 먼저 당시 <오! 인천>에 참여하면서 충무로 스태프들은 소품⋅의상⋅특수효과 등에 쓰일 재료들을 한 곳에 모아놓을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오! 인천> 촬영 이후 생긴 촬영 소품과 재료들을 같이 관리할 곳이 필요했다. 

 

그때 <오! 인천>에서 재료를 내가 많이 받았거든. 그걸 그냥 활용했으니까. …<오! 인천>이란 영화, 그거 끝나고 인저 삼우회를 결성해가지고,
의상⋅효과⋅소품 해가지고 뚝섬에 큰 창고 건물을 직접 얻어 가지고 그걸 나눠서 썼는데, 1980년도에 큰 화재가 나면서…
(김호길, 2016, 103쪽)

그때 어디냐면 뚝섬. 거기 우리 불났어. (웃음) 완전히 탔어. 의상도 완전히 타버리고. 의상하고 우리하고 창고를 하나로 같이 있었거든.
그때 <오! 인천>에 갖다 놓은 물건도 있었구나. 거기 사다리 같은 거, 그 좋은 것들이 몽창 다 탔어. 무기도 몽창 타고. 화약은 거기 안 뒀거든.

(박광남, 2023, 127쪽)



구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창고에 화재가 발생해 많은 촬영 소품과 의상, 효과 재료들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당시 충무로 인력들이 <오! 인천>에 참여하며 배웠던 것들이 함께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후 한국의 전쟁영화,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나 규모가 큰 영화를 촬영할 때 자신이 배웠던 것들을 최대한 살려 활약했다.

 
 

이게 촌길에 철조망이 깔려 있으니까 우체부가 자전거 끌고는 못 가는 거야.*주10 “책임지겠습니다. 지나가세요.” 그랬지.
그게 뭐냐 하면은 가짜 철조망이거든. 제가 만든 거예요. 그게 79년도 <오! 인천>이라는 영화 때문에, 거기서 그걸 배운 거야.
이렇게 해서 만드는구나. … <프로페셔날>인가? 전쟁터 나오는 장면에서 라스트가 막 가다가 철조망에 걸려 죽는 게 있어요.
‘야, 저거 되게 아팠겄다. 이렇게 어떻게 했을까’ 했는데, 바로 그런 거야. 그래 인제 79년도 <오! 인천> 영화를 하면서 배운 게 많았고.

(김호길, 2016, 133~134쪽)

상륙작전 하는데, 카메라 아홉 대가 필요한 거예요. 거기서 그런데, 헌팅을 가서 어떻게 했냐면, 봐요. 거기서 뭘 배웠냐?
카메라 아홉 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거를 하루종일 하는 거야. A카메라 이렇게 부감대로 놓고, B카메라 하나, 둘 막 바꿔놓는데,
한국사람 같으면 그걸 연출을 못해. … 한국에서 만약에 이걸 동시녹음을 하게 되면 한 달은 더 찍어야 돼. 그런데 하루에 딱 끝나는 거야, 그날에.
예행하고 정식촬영할 땐 하루에 다 끝나더라고. 또 중요한 게 뭐냐, 폭탄이 터지는데 걔들은 각도를 다 살려놔요, 터지는 각도. 한국 특수효과들은 그걸 다 배우는 거예요, 거기서. 그러면 거기서 폭탄이 터지는 순간에 여기 카메라가 안 보일 거 아니냐고, 응? 
*주11고런 머리를 다 써놨어요. 그러니 아홉 대라는 게 말이 쉽지 이걸 연출자가 계산을 할 정도면. (구중모, 2015, 212~213쪽)

<용가리> 할 때 몸에 폭탄을 터트려야 하는데, 실제 화약이 안 좋아서 막 불이 붙기도 하고 그랬어요.*주12 
<오! 인천> 할 때 보니까 미국사람이 완벽하게 하는 거, 미국사람들이 와서 터득을 했어요.
터득하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 그거를 다시 응용을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많이 습득을 했죠. …
<오! 인천>이란 영화, 외국사람 특수작업 같이 했기 때문에 많이 배웠고, 저희도 많이 응용했고.
저 나름대로도 그 사람들 기술 플러스 우리 기술을 어느 정도 포함시켜서 더 좋게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보기도 하거든요.
(이문걸, 2006, 40쪽)  



그러나 이들의 구술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들이 약 20여 년(구술 시기에 따라 길게는 40년)이 흐른 뒤에도 <오! 인천> 촬영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에야 많은 한국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그 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거나 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1979년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오늘날 블록버스터 급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영화에 참여하며, 할리우드의 기술과 시스템을 직접 경험했다는 것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그들만의 경력이다. 그리고 이때 참여한 스태프들이 모두 <오! 인천> 이후 더 많은 한국영화 촬영현장에 불려 다니며 1980~1990년대 내내 활동했다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저희가 <오! 인천>에서 영화발전에, 특수효과에 많이 발전시켰다고 자부합니다.(12쪽) …
한국영화계가 <오! 인천>이라는 거를 하기 위해서 차량이라든가 기동력이라든지 이런 거를 많이 배웠어요.
어떻게 보면 영화는 상영되지 못해도, 영화 개념적으로 많이, 영화 바뀐 것이, 제작자 바뀐 것이 <오! 인천>이지 않았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문걸, 2006, 21쪽)  






※ 인용 구술 (인용된 페이지는 각 구술 뒤에 표기)
심혜경, 『2006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이문걸 편[특수효과⋅소품⋅미술]』, 한국영상자료원, 2006.
배수경,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한국영상자료원, 2015.
이정아,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한국영상자료원, 2016.
남기웅,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박광남』, 한국영상자료원, 2023.


***
주1.  
윤미라는 후에 출연을 거부했다. 그리고 윤미라가 연기하기로 했던 배역은 리디아 레이(Lydia Lei)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에 참여했던 배우 남궁원의 구술에 따르면 당시 한국 측 출연 배우들은 직접 테렌스 영을 만나 오디션 비슷한 것을 봤는데, 이때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들을 제시했다고 한다. 

주2. 
 “<Inchon> Trivia”,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84132/trivia/?ref_=tt_trv_trv>.

주3.
신문 기사에서 상술한 장면은 경북 왜관에서 촬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해당 장면은 1950년 6월 28일에 있었던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다룬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술자들 역시 기억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 장면을 ‘한강 다리 폭파’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촬영기사로 참여했던 구중모의 구술에서는 테렌스 영이 원래 이 장면 촬영을 위해 실제 제3한강교를 폭파시키고 싶어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 있는 다리를 폭파시킨 뒤 촬영했다고 말했다. (배수경,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 2권 김정란 이남기 구중모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5, 215~216쪽.)

주4. 
구술자 구중모는 <빨간 마스크의 여인>(김인수, 1971)을 통해 데뷔하여 <티켓>(임권택, 1986), <결혼이야기>(김의석, 1992) 등의 영화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하였으며, 1986년에는 <씨받이>(임권택)로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15년 <합작영화> 주제사를 통해 <오! 인천>에서 한국 측 촬영팀으로 참여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주5. 
구술자 김호길은 1960년대 연출부로 영화계 입문하여, 1968년 임권택 감독의 <몽녀>를 시작으로 한국영화에서 소품 담당 스태프로 일했다. <오! 인천>에서도 소품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6. 
구술자 박광남은 1950년대 후반 영화계에 입문, 1960년대 본격적으로 특수효과 스태프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부터는 CF, TV드라마, 연극,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특수효과 전문가로 활약했다.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7. 
이정하,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6, 73쪽.

주8. 
사건의 내용이 다소 복잡한데, 당시 재판을 받던 피의자가 경찰에 의한 강압적인 수사와 고문이 있었으며, 자신의 자백은 모두 이 고문으로 인한 것이었다며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피의자의 결백에 대한 근거로 피해자의 사망시각이 중요한 쟁점이 되었는데,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찰이 주장하는 사망시각에 피해자가 <오! 인천>의 한국 제작총괄이었던 박경도와 원웨이프로덕션의 대표 이시이 미츠하리를 만났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피의자 측에서는 윤 노파가 <오! 인천> 제작에 20억의 거액을 투자했고, 이를 통해 한국 측 상영권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원웨이프로덕션 측에서 증인으로 나왔던 박경도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부정하며, 그들이 윤 노파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단지 ‘영화가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고, 흥행이 될 수 있도록 불공을 부탁드리고자’ 했으나, 약속한 날 윤 노파는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한 채 이시이 씨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주9.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인도교 폭파 장면이다. 미군 장교의 부인이 자신의 차량 안에 한국인 어린이와 소녀들을 가득 태우고 다리를 빠져나가는 도중,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다리를 폭파시킨다. 끊어진 다리 끝에 걸린 차량 안에서 모두 무사히 구출되기는 하지만, 이것도 주위 피난민과 미군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주10.
영화 <뽕>(이두용, 1985)을 촬영할 당시 뽕밭에 친 철조망을 보고 마침 촬영장 쪽을 지나가던 우체부가 자전거를 멈추고 섰다는 의미이다. 

주11. 
어떤 각도에서 폭탄이 터져도 9대의 카메라 중 어느 카메라에도 다른 카메라가 잡히지 않도록 구도를 잘 맞춰놓았다는 의미이다. 

주12.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촬영 당시 사람의 몸에 작은 화약을 넣고 터트려 총에 맞는 듯한 효과를 내야 했는데, 그 기술이 부족해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대괴수 용가리> 촬영 때는 일본의 특수효과 기술자들을 초대해 함께 작업을 했었는데, 본문과 이어지는 구술에서 일본 특수효과 기술자들도 ‘미니어쳐’ 전문가들이라 당시에는 작은 화약을 활용한 특효 기술을 잘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구술자 이문걸은 박광남과 함께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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