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같은 꿈을 반복해서 꿀 때가 있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과 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같은’ 꿈이란 것에 몇 가지 패턴이 있다는 걸 발견하는데, 이를테면 다른 장소, 다른 시간 안에서 같은 서사가 진행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서사의 인과가 불분명한 채로 이미지만 반복되어 같은 꿈으로 남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험에서 남겨진 찝찝한 신비로움은 꿈에서 깨고 난 ‘상태’ 그 자체에 대한 공통된 감각이라 입을 모았다.
마치 어마어마한 양의 끈적거리고 미끄덩거리는 무언가가 나를 결박하고 있는 것만 같던 그 찝찝함은 아마 삶에 대한 미스터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꿈 속 이미지의 실체보다는 이미지를 인식한 후의 상태가 보다 더 큰 것을 남겼다. 파편화된 이미지는 여백을 활성화 시키고 그 여백 사이로 이미지를 인식한 자만의 사유가 들어갈 틈이 생긴다. 이때 꿈은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기도 하다.
미하엘 하네케의 <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1994)은 스무 살 무렵 어느 극장의 기획전에서 본 영화이다. 하네케의 영화는 매섭고 잔인한 구석이 있어 구태여 찾아 보거나 크게 좋아하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우연의 연대기(Chronologie des Zufalls)’와 ‘71개의 단편(71 Fragmente)’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내 멋대로 어떤 이미지들을 나열하게 만들어 관람을 미루지 않고 극장으로 향하게 한 이유가 됐다. (덧, 관람 후에 이 영화가 폭력의 3부작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역시 제목만 보고 상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의 영화였지만서도)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은 우연을 연대기 순으로 펼쳐 보임과 동시에 그 우연들의 연대가 일으킨 어떤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흩어진 71개의 씬(조각)들을 시간(연대기) 순으로, 어떤 비극이 초래되기까지 일상의 면면들을 다소 건조하고 냉랭한 온도로 보여준다. 비극을 점점 앞당기는 파편들 중 막스(루카스 미코)가 올려 보던 고층 빌딩과 차가운 물이 고인 바닥을 연이어 보여주던 두 컷의 서스펜스는 무섭게 남아있다. 그의 마음에 죽음이 어떤 형태로 방아쇠를 당길지 내내 아슬아슬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마음은 라두(가브리엘 코스민 우르데스)라는 소년이 불완전형의 희망을 품고 국경을 건널 때의 모습과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러 차로 향하던 막스의 모습과 대조되어 그들을 부감으로 내려다 보던 우리에게 불완전했던 희망을 비극으로 완성시킬 권한과 이에 대한 냉소적 시각을 함께 부여한다.
이렇게 71개의 씬들이 담고 있는 서로 전혀 무관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뉴스의 한 꼭지, 한 문장의 세그먼트로 그저 둔감하게 마무리된다. 전쟁 속 아비규환의 모습들과 사실 여부를 떠나 미디어의 콘텐츠로 소비될 뿐인 세상의 크고 작은 소식들이 영화 안에서 계속해서 중계되었는데, 지극히 평범했던 일상 또한 나란히 그 안에 편입돼 버리고 만다.
파편화된 서사의 나열을 통한 다각적 프레이밍 형식은 채널의 소유권을 관객에게 이전시키며 영화 속 인물들의 퍼즐을 현실의 스펙터클로 자리잡게 만들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관객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흩어진 퍼즐들 사이의 암흑을 비집고 들어갈 사유의 주체가 결국 관객이라는 지점에서, 이 영화는 막스와 라두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이 영화의 미디어 속 폭력을 응시하는 데에 수동적 소비의 지양을 재촉하며 부디 오늘 먹을 물고기는 제발 스스로 던진 그물로 건져 올리라고 권하는 도덕적 질문보다도, 영화가 취한 형식적 경로가 영화에 대한 큰 인상으로 더 깊게 남아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가 모든 면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평범한 일상에 대한 세심한 설계로 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미시적 접근을 통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내적 시각의 개입을 거시적으로 소유하게끔 설계한 영화라는 점이, 내가 감응하는 영화의 형태를 그리는 데에 있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진: “71 Fragmente einer Chronologie des Zufalls”, IMDb (좌, 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구조적으로나 인과적으로 이미지 사이에 발생하거나 끼어들 수 있는 틈 혹은 여백을 중요하게 여기며 지내고 있다. 조금 더 과격하게는 집착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삶의 무작위성을 내포하고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또 여백이라는 것을 생성하기 위해 이토록 애를 쓰는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우연한 것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을 때가 잦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연의 연대기로 설명해야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환상과 희망이랄 것이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작은 것들의 프랙털을 파고드는 취미를 생성시킨 정도였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동양화에서는 빈 공간의 여백을 먹이 지난 자리의 존재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로 다룬다. 그 사이에서 이미지와 여백이 관계하며 획득하는 힘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가 동양화에 매료되어 공부를 했던 이유기도 하다.) 어떤 이유든 간에 기능하며 존재하는 모든 관계들이 여백과 함께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늘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기도 한 종류의 감각들을 무작위적으로 쫓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틈에 자리잡았던 사유들이 쌓이고 쌓여 보이는 이미지와 함께 불확정적인 어떤 엔딩으로 향한다. 어떤 엔딩으로 향할 때 이 모든 이미지들의 연대가 기능하도록 실현시킨다는 건 정말이지 멋진 일이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2024) 중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글을 쓸 때 이야기와 함께 인물들이 머리 속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가 있다. 그들이 추는 춤에 나까지 신이나 음악을 틀어주는데 간혹 음악을 잠깐이라도 잘못 틀어버리면 어느샌가 그들은 사라지고 없다. 올해 초, 지난해 촬영한 두 번째 장편을 편집하고 있었다. 삶의 파편들이 추는 춤에 맞춰 음악을 트는 일이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을 떠올린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 파편들이 기능하며 관계 맺었던 연대가 떠올랐다. 그 경로를 통한 무형의 엔딩은 관객만이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영화는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닌 것이다.
같은 꿈이 남긴 그 찝찝한 신비로움은 어쩌면 무작위적 삶을 견뎌내는 데 피할 수 없는 감각처럼 느껴진다. 우연의 연대기적 파편 속에서 누군가는 지금 국경을 건너고 있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있으며, 누군가는 총기를 훔치고 있고, 누군가는 고독한 밤을 이기지 못해 딸에게 전화를 걸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찝찝함 속에서도 신비로움을 느끼고 서로를 궁금해하고 서로를 그리워한다. 그러곤 다시 71개 혹은 그보다 많은 하루가 시작되겠지.
<이어지는 땅>(2022) 중
조희영(영화감독) l 곤혹스런 사태를 받아들이는 데 특출나 영화를 만들고 있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2024), <이어지는 땅>(2022) 등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