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워스 스테판 달드리, 2002

by.손연지(편집기사) 2024-10-08조회 487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2살 겨울, 처음이자 마지막 단편 연출을 끝내고 나서 나는 명확하게 깨달았다. ‘아, 이건 내가 할일이 아니다.’ 신이 나에게 감독에게 필요한 자질들은 애초에 주지 않았을 뿐더러, 낯가림이 꽤 있었던 20대 시절 나에게는 많은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현장이 너무나 스트레스 였다. 이런 성향의 사람에게 편집 파트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영화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으면서도 현장에서의 그 불꽃튀는 부대낌은 겪지 않아도 됐으니까. 근데 막상 졸업하자마자 편집실에 취직을 하고보니, 이곳도 후반작업의 시작이어서 그런지 사람은 꽤 많이 만나는 파트였던지라, 초반에 적잖이 당황을 하며 적응을 해 나갔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편집실은 하루라는 시간 제한이 있던 현장과는 달리 마감 기한이 훨씬 널널했기 때문에, 그 부분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다.
 
나는 사실 편집을 오로지 감으로, 그리고 편집실에서 8년 동안 일하면서 수많은 작업들을 마치 게임 미션을 클리어하듯이 헤쳐 나가면서 오로지 경험으로 배운 케이스이다. 영화과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단지 나랑 결이 맞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는 시간과 그 순간의 공기를 사랑해서 영화를 시작한 케이스였다. 그래서 대학을 다니던 그 시절엔 영화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이게 뭔지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에게 편집 선생님이 누구였냐고 물어본다면, 편집실에서 같이 작업했던 수많은 감독님들이 내 선생님들이었다고 대답하고 싶다.

그렇게 쉼없이 달려오다 어느 해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의도치 않게 쉬는 기간이 생겼다. 그때 그동안 본능으로 배운 걸 눈으로 확인 해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때 다시 본 영화가 <디 아워스(The Hours)>(스테판 달드리, 2002)였다. 편집의 관점에서 영화 전체를 분석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그동안 작업하면서 사건이나 스토리가 강한 영화가 아닌 정서나 무드로 밀어붙이는 영화의 편집과 연출이 궁금하던 찰나에 마침 리스트에 있길래 선택을 했었다. <디 아워스>는 각기 다른 시간대에 사는 세 여자가 나와서 진행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더더욱이 이런 접점이 없는 인물들로 펼치는 스토리 라인에서의 편집이 궁금했다. 나는 주어진 숙제는 성실히 하는 인간이기는 했지만, 그 숙제를 스스로 만들어서 하는 대단한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눈앞에 닥친 작업들을 끝내는 것에만 몰두하면서 살기 급급해서 이런 식의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은 없었다.
 
사진: "The Hours", IMDb

<디 아워스>에 등장 하는 세 명의 여자들은 소설 『댈러웨이 부인』(버지니아 울프, 1925)으로 묶여 있는 인물들이다. 1923년 영국 시골 도시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고 있는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1951년 미국 LA에서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임신 6개월 째인 로라(줄리안 무어). 그리고 2002년 미국 뉴욕에서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출판사 편집장 클래리사(메릴 스트립). ‘댈러웨인 부인’을 쓰고, 읽고, 그렇게 불려지는 이 세 여자들이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파티를 준비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단 하루를 통해, 결국 이 여자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고독과 그것을 어떻게 마주하고 받아들이는지, 영화 안에서 시간을 건너뛰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어떤 순간들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연출이나 편집을 활용해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이 교차되는 씬들을 행동으로 이어 받아주든지, 아니면 서로 다른 시대에 사는 인물의 나레이션을 이용하거나 음악으로 세 인물을 하나의 분위기로 감싸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씬과 시퀀스를 이어가고 엮어간다. 그렇게 이 주인공들이 결국 같은 불안과 고독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이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감정을 쌓아가며 영화의 에너지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때 이런 부분들을 세세히 뜯어 보면서, 나는 편집할 때 설계해야 하는 이미지의 배치나 컷 구성, 그리고 컷팅으로 어떻게 영화의 에너지를 잃지 않고 2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을 끌고 나가는지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다.

영화 속 세 여주인공이 하루 동안 겪는 감정적인 불안의 근원은 결국 자기 모습 그대로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허무함에서 오는 고독과 외로움이었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이런 주인공들의 ‘하루’라는 시간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일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날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마음 속의 어떠한 균열들이 건드려지게 되고, 그 균열을 감당하고 버티고 해소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투쟁 해야만 내 모습 그대로의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영화는 건네고 있다.
 
사진: "The Hours", IMDb (좌 상단부터 시계 방향, 버지니아1, 버지니아2, 클래리사, 로라)
 

“삶과의 투쟁없이는 평화도 없어요.”

-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영화를 만드는 일은 재밌으면서도 너무나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처음 편집을 시작하며 꿈을 키워 갈때는 나도 여느 유명한 편집감독님 들처럼, 이런 저런 다양한 장르를 다 잘 소화하는 편집기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을때 좌절도 하고 나에 대한 자책도 많이 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영화를 편집하면서 느낀 가장 큰 부분은 영화에는 정답이 없고, 다 각자 자기만의 색깔과 방식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편집기사는 그 무수히 많은 촬영 소스에서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통해 작품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개성과 매력을 찾아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무난하게 5점짜리 씬만 있는 영화보다는 좀 불균질하더라도 3점과 7점이 공존하는 영화가 더 매력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밖에서 바라볼 때 평균 점수가 똑같더라도 말이다.

아무래도 영화는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너무나 큰 자본이 들어가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소통과 협업을 통해 작업이 이뤄지는 곳이다. 그래서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이래야만 한다’라는 것도 분명히 존재하고, 수학의 정석처럼 딱 꼬집어 정의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의 규칙들이 이 산업 안에서는 존재한다. 처음 일을 시작하고 편집기사라는 이 일에 대한 열망과 사랑이 컸던 나에게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질보다는, 이 업계에서 통용되고 있던 ‘그래야만 한다’라는 것들의 기준에 맞춰서 변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잠깐의 휴식기 아닌 휴식기를 가졌던 그때의 나는, 나라는 사람이 거쳐온 시간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해소할 것은 해소하고 흘려보낼 것은 흘려보내는 그런 시간을 보냈다. 그 당시 나는 편집기사로서의 손연지, 인간 손연지의 장점과 매력은 무엇인지, 편안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영화와 환경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살아가면서 쉼없이 달리기만 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무용한 시간도 가끔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기가 나에겐 그랬다.

“있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 가지고 있는 기질 덕분에 어렵지 않게 잘할 수 있는 작업과 공부가 필요한 작업에 대한 구분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성향적인 부분에서 오는 장점과 한계들... 그때 이 영화를 통해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편집기사로든 사람으로든. 나는 운명론을 좀 믿는 편인데, 내가 보는 영화나 작업하는 영화가 나에게 찾아온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2017년의 나에겐 <디 아워스>가 찾아와 편집기사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져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손목이 허락하는 한 할머니가 되어서도 편집을 하고 싶기 때문에, 앞으로 나이가 들더라도 내가 가진 감각과 감성을 지키면서도 고착화되지는 않는 그런 할머니 편집기사로 늙어가고 싶다. 내가 편집한 작품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말을 건네는 그런 마법같은 순간이 일어나길 기원하며, 오늘 하루도 언제나 그랬듯 마우스를 잡을 것이다.
 
사진: "The Hours", IMDb



손연지(편집기사) l 극영화, 드라마, 다큐, 뮤지컬 필름 등 스토리 텔링이 들어간 다양한 장르에서 편집을 한다.
눈을 끄는 화려한 편집도 좋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편집을 하고 싶다.
영화 <비밀>(2023), <세자매>(2020),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이장> 등 다수,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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