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동안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것에 혈안이었다. 자그마치 10년이란 시간 동안 감별사를 자처했다. 영화를 보며 “이건 진짜야! 저건 가짜야!”라고 생각했다. 그 시작은 <
잠 못 드는 밤>(장건재, 2012)이었고 같은 해 <
사랑에 빠진 것처럼>(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012) 덕분에 감별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모든 것을 두 가지로 분별하려 했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급하게 촬영을 미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다시 시나리오를 썼다. 나의 이야기였다. 이 방식이 진짜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했다. 가족을 연기할 배우를 찾았고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어딘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엄마였다. 영화 속 엄마는 내 생각보다 더 철이 없었고 불쌍해 보였다. 진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진짜를 데려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래방에서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엄마에게 연기를 제안했다.
이번에는 제법 진짜 같았다. 하지만 아직 이상했다. 영화 속 엄마는 마치 해탈한 사람 같았다. 다시 한번 엄마와 영화를 찍었다. 상조 회사가 배경이었다. 회사 사람들과 일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다큐멘터리 같기도 했다. 결과는 여태까지 내가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엄마였다. 영화 속 혜정(김혜정)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앞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담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만든 것은 무엇일까? 진짜도 가짜도 아닌, 이곳도 저곳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는 실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2020) 중
그러던 중 <
낭트의 자코>(아네스 바르다, 1991)를 만났다. 감독은 아네스 바르다로 자크 드미(아네스 바르다의 배우자이자 영화감독)의 어린 시절을 재현했다. 영화의 구성은 극으로 재현된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실제 자크 드미의 모습, 그리고 그가 만든 영화 일부가 삽입되어 있다. <낭트의 자코>는 자크 드미가 성장하며 영향 받은 것과 그것이 어떻게 영화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컬러와 흑백이 섞여 있는 점이 내게 흥미로웠다. 예를 들면 재현된 어린 시절은 대부분 흑백이었고 삽입된 영화는 대부분 컬러였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손가락 표시와 중간에 삽입된 영화들이 일정한 기준이 없어 보였기에, 하나의 맥락으로 묶기는 어려운 영화였다.
제일 먼저 컬러와 흑백의 기준을 알고 싶었다. 온전한 것들은 컬러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흑백이라는 추측을 했다. 자크 드미의 얼굴이 모두 컬러인 것이 근거였다. 하지만 이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형극(예술)은 컬러이지만 바라보는 아이들(픽션)이 흑백으로 표현되거나, 극장의 포스터(물질)는 컬러이지만 그걸 바라보는 자코(픽션)가 흑백이라는 점은 얼추 맞아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의 대화 장면에서 컬러와 흑백이 섞여 있는 장면도 있었다. 이런 장면은 별다른 이유가 없어 보였기에 온전함의 문제로 해석하기에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렇게 별다른 소득 없이 시간이 지났다.
인형극(컬러)과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흑백)
사진: "Jacquot de Nantes", IMDb (좌, 우)
한참 뒤에야 <낭트의 자코>가 다시 떠올랐는데 바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고 때문이었다. 성인이 되고 한 번도 보지 않은 아버지였다. 아버지하면 떠오르는 건 생선이었기에 뽀얀 피부에 정장을 입은 영정사진이 제법 멋있어 보였다. 장례식이 끝나도 계속해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편히 감은 눈이었다. 오히려 죽고 나니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함께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는데 바로 자크 드미였다. 어딘가 모르게 둘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큰 눈이나 오뚝한 코가 그랬다. 그렇게 <낭트의 자코>가 다시 궁금해졌다.
다시 본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자코로 시작하여 자동차 정비소의 전경을 담는 카메라가 시작이었다. 카메라가 사람이 되어 그곳을 두리번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창문 너머에서 바라보는 볼뽀뽀 장면도 그랬다. 그러다가 어떤 장면을 마주하고 꼬인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화면 가득 보이는 자크 드미였다. 자크 드미의 하얀 머리카락에서 시작하여 얼굴의 주름을 지나 그의 눈동자로 도착하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보자마자 어떤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그 움직임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와 닮아있었다. 누워있는 머리부터 시작하여 편히 감은 눈을 지나 목에 둘러진 삼베와 그의 손가락까지. 그제야 모든 것들이 감독 아네스 바르다의 기어코 잊지 않으려는 마음과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두리번거리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움직이는 카메라가 담은, 자크 드미의 주름과 눈동자
사진: "Jacquot de Nantes", IMDb (좌, 우)
자코와 친구들이 창문에 모여 낙하산을 탄 군인을 바라보는 장면(흑백)이 떠오른다. 이어서 현재의 자크 드미(컬러)가 등장하고 그날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면은 다시 군인으로 돌아가고 자크 드미의 내레이션은 계속된다. 이전과 같은 장면임에도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군인은 컬러로 표현된다. 같은 장면이 자크 드미의 발화로 인해 색상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영화가 운동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크 드미와 다른 장면 사이에서 무언가가 오고 가는 움직임을 느꼈다. 더 나아가 감독 아네스 바르다와 자크 드미 사이에서 오고 가는 운동 자체가 곧 <낭트의 자코>였다. 이제야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등장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이곳과 저곳 사이를 가로지르는 무언가였다.
끝으로 영화 시작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모래와 바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다 이내 사라지는 모래와 바다였다. 이처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컬러가 되거나 또 흑백이 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시선-관계의 문제였다. 더 이상 진짜와 가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모든 것은 진짜이기도 가짜이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만든 애매모호한 것이 실패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었다.
나중에야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합성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 준비된 사진이 없었다고 했다. 겨우 찾은 증명사진이 티셔츠를 입은 사진이었고 그 위에 정장을 덧씌워 그럴듯한 모습을 만든 거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엄마와 영화를 찍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이는 영정사진이라니 나름 근사했다. 해리포터가 생각나기도 했고 뤼미에르가 생각나기도 했다. 산 자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꼴이 우습지만 어쩌면 내게 필요한 것이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찍으면 찍을수록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고 내 욕심인 것만 같다. 그럴 때면 아네스 바르다의 영화를 보며 방향을 점검한다. 그러면 길이 보이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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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마지막): "Jacquot de Nantes", IMDb(상) / "Jacquot de Nantes", moving pictures(하)
신동민(영화감독) l 영화를 만들고는 있지만 뭘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2020), <당신에 대하여>(2020), <당신으로부터>(2023)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