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위의 종달새 이리 멘젤, 1969

by.김보라(촬영감독) 2024-07-18조회 1,059
사진: "Larks on a String", Národní filmový archiv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실 세계 어디엔가 있을 법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와 인물들을 다소 직설적이며 담백하게 표현하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희로애락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이 일상에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후에 남겨진 감정들은 온전하게 이해되거나 소화되지 못한 채 한동안 멍때림 혹은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고는 한다. 내게는 영화가 이러한 감정들의 번역기이자 소화제였기에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서 직접 참여하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많은 파트 중에서도 왜 하필 촬영이었을까를 묻는다면, 루빼에 눈을 파묻었을 때 현실의 많은 부분과 단절됨과 동시에 주시하고 있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담아야 할지와 같은 형식에 대한 고민보다 내용과 대상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던 탓에, 가끔 나의 촬영에 영향을 끼친 영화를 촬영적으로 풀어 답을 해야 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 내게는 동전의 양면처럼 영화와 촬영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결국 오늘날의 내가 촬영에 대해 갖는 시선이나 태도에 영향을 끼친 영화가 무엇인지, 촬영을 하고 싶은 열망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는 질문과도 같기 때문이다.

영화를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헤매던 시간을 지나 촬영팀 생활을 거쳐 촬영에 대해 참으로 느리지만 꾸준히 배워나가던 시절 우연히 보게 된 한 감독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2006년 겨울,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체코 영화제가 열렸고 당시 본 여러 작품 중 <가까이서 본 기차>(이리 멘젤, 1966)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소시민적인 캐릭터들과 소소한 사건들을 담아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현실을 해학으로 드러내는 방식 때문이었다. 사회 초년생이자 연애 초보자인 밀로쉬(바츨라프 네카르시)의 역무원 적응기와 연애기, 그리고 본인과 관객 모두 예상치 못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연신 미소를 짓게 만들다가도 일순간 당혹감과 애처로운 감정을 모두 경험하게 만드는 감독의 스타일에 푹 빠지게 되었고 그렇게 ‘이리 멘젤’이라는 감독의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의 차기작 <줄위의 종달새>(이리 멘젤, 1969)가 개봉을 하였고 이 영화는 내가 영화인으로서의 삶을 살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시간을 보낼 때도 항상 마음이 향하는, 가본 적 없는 고향과도 같은 영화가 되었다.
 
   

<줄위의 종달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1948년 2월 혁명 이후 공업단지에 위치한 한 폐철 처리장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곳은 부르주아로 찍힌 자들이 과거의 만행을 보상하기 위해 사실상 강제 동원에 가까운 노동을 하는 곳이며 전직 철학 교수, 검사, 목수, 이발사, 색소폰 연주자, 호텔 요리사가 등장한다. 또한 이곳에는 해외로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고 노역 중인 여성 수감자들도 등장하는데, 이 두 집단의 교류를 막는 자는 집시 여인과의 결혼을 앞둔 한 젊은 간수다. 그리고 겉으로는 이들과 동등한 노동자임을 강조하면서 주어진 작은 권력을 최대한 휘두르는, 등장부터 퇴장까지 ‘청결'을 외치는 관리자도 등장한다. 주요 사건은 요리사 파벨(바츨라프 네카르시)이 여성 죄수 중 한 명인 이트카(이트카 젤레노호르스카)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다. 죄수라는 이트카의 신분으로 인해 파벨은 그녀 없이 당 관리자 앞에서 혼인 선서를 하게 되고 이트카 또한 감옥에서 3시간 전 그와 결혼했다는 증명서를 받게 된다. 동료들이 마련한 허름한 초소에서의 합방을 불과 몇 걸음 앞두고 파벨이 ’그'라고 불리는 당 최고직 위원의 환영 행렬에 강제로 동원되며, 둘의 만남은 잠시 유예되는 듯 흘러간다. ‘그'에게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던 시절은 어디로 갔는지 질문을 던지는 파벨. 이 도발적인 질문으로 인해 행사 후 이트카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듯 사라지고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는다. 수개월이 흘러 복역을 마친 이트카. 이제 그녀는 2년 형을 선고받고 지하 탄광으로 내려가는 파벨을 기다리며 함께 할 그날을 꿈꾼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충격과 감동을 준 장면들이 있었다. 하나는 청결을 이유로 전라의 한 소녀를 목욕시켜 왔던 관리자의 행적이 관객과 또 다른 동료 모두에게 발각되는 장면이었다. 동료 또한 이 만행에 동참하는 서사 상의 귀결도 충격적이었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인해 더욱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영화가 초반부터 유지해 온 공간 속에서, 여러 인물과 상황을 함께 담아내는 풀숏(full shot)과 니숏(knee shot) 정도의 비교적 널찍한 숏 사이즈(shot size)를 통해 가감 없이 상황을 드러냄과 동시에 유린의 손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클로즈업으로 강조했는데, 시공간을 압축하지 않고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특정 순간만큼은 카메라가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 촬영하는 방식이 내게 강렬하게 다가왔고 이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사진: "Skrivánci na niti", FDb.cz (원자료 출처: Filmové studio Barrandov / 저작자: Josef Janoušek)

다른 하나는 엔딩 장면이다. 트럭에 실린 채 탄광으로의 노역을 앞둔 파벨에게 이트카가 거울을 이용해 햇빛을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나는 진실과 결혼했어요”라는 대사를 던지고 갱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파벨. 냉혹한 현실 덕분에 진실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는 철학자의 말에 옅은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이 화면 가득 등장하고 마치 아내를 향하는 듯 시선을 위로 올리는데, 이어지는 장면은 지상을 향하되 그로부터 더 멀어지는 일종의 엘리베이터 시점 숏(POV)이다. 어찌 보면 인물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이은 POV라는 단순한 쇼트의 구성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점점 더 작아지는 지상의 빛의 사각형을 계속해서 바라보다 암전되는 이 마지막 장면이 희망과 동시에 여전히 녹록지 않은 현실을 표현한다고 느꼈고, 음악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희비의 양가감정이 끊임없이 교차로 밀려들며 입가에는 미소가, 눈에는 눈물이 고였던 기억이 난다.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은 이리 멘젤 감독의 카메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그 특징이 느껴진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주의 체제가 지닌 부조리를 고발하는 성격이 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자, 반대하는 자, 그리고 그 중간 지점에서 갈등하는 자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어떤 가치 판단에 근거한 차별적 시선이라기보다는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내려는 듯 꽤나 담담하다. 이러한 시선과 일관된 태도들이 쌓이고 쌓여 특정 순간에 이르러 감독이 의도가 더욱 강렬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줄위의 종달새>는 감독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카메라가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카메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작품이기도 하다.
 

시나리오를 받아 읽거나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을 바라볼 때 촬영을 고민하는 나의 마음 속 어디엔가 이리 멘젤 감독의 영향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특히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와 대상과의 ‘거리두기’의 정도를 고민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만날 때 더욱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GV 때 객석에 앉아있던 내게 정말 감사하게도 정성일 평론가님께서 쇼트 구성에 대한 질문을 하신 적이 있다. 카메라가 인물의 감정을 앞서가지 않으려 했고 영화 후반부 영안실에서의 건우(이한주)와 그가 바라보는 대상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기준으로 전후의 쇼트들을 자연스레 정리한 것 같다고 답을 했었다.

돌이켜보니 내게 ‘생각하는 카메라’를 심어준 작품들이 있었기에 현장에서의 마법 같은 순간들을 잘 담아낼 수 있었고, 그 시작에는 <줄위의 종달새>가 있었다. 이제는 ‘올드의 올드 시네마’가 되어버린 영화이지만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 한번 발견되기를 소망한다.


김보라(촬영감독) | 이야기와 인물을 화면에 담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아이>(김현탁, 2021), <퇴직금>(전재연, 2021) 등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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