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Lorna's silence", Les Films du Fleuve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대개 기억들은 전체적인 상황보다는 순간의 감각들로 남겨진다. 가령 유년 시절의 계곡을 떠올릴 때면 언제, 누구와 왜 갔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상황은 떠올릴 수 없다. 다만 물에 빠졌던 순간 느꼈던 알싸한 코끝의 감각과 함께 어디선가 습한 풀냄새가 흘러오는 것이다.
혀에 닿았던 철봉의 비린 쇠 맛, 몸에 들러붙는 젖은 옷의 찜찜함, 불규칙적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소리, 아릿한 손끝... 그렇게 지나간 순간들은 몸 어딘가에 고이게 된다. 감각을 동반하지 않는 기억은 과연 남겨질 수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감각되지 않는 기억은 금방 휘발되어버리고 만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나에게 남겨진다. 결국 오래도록 나에게 맴도는 영화들은 기승전결에 따른 이야기의 전체 몸뚱이, 그로부터 얻은 교훈 같은 것이 아니다. 결국 남겨지는 건 인물의 감정과 상황에 맞닿아진 통증, 감각들이다.
영화 <
로나의 침묵>(장 피에르 다르덴, 뤼크 다르덴, 2008)을 본 날은 21살의 겨울이었다. 나는 지독한 시네필이었다거나 내 삶을 뒤흔든 영화를 만났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 없이 어쩌다 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영화과 학부생이었다. 학기 중 내가 본 영화의 절대적인 수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방학을 맞이하여 전투적으로 매일 3편씩 영화를 보던 시기였다. 그저 방학 동안 최대한 영화를 많이 보는 것만이 목표였기 때문에 마음 한켠에는 항상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때문에 한편의 영화가 끝나면 곱씹을 틈도 없이 기계적으로 바로 다음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런데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을 본 후에는 쉽사리 다음 영화로 넘어갈 수 없었다.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하다. 클로디의 죽음에 대해 침묵을 강요받던 로나는 파블로의 감시를 피해 숲으로 도망친다. 이윽고 오두막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안에 숨어 들어간다. 어둡고 싸늘한 오두막에 주워 온 나뭇가지로 불을 피운 로나는 자신의 빈 배를 부여잡고 존재하지 않는 클로디의 아기를 향해 말을 걸며 잠에 든다.
영화가 끝나고 나 또한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둡고 싸늘한 방 안에서 한참 동안을 빈 배를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마지막 장면은 이상하게 허하고 서글픈 뱃속의 감각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클로디가 도와달라고 외치며 로나에게 매달리는 장면에서 클로디를 휘감았을 고독과 두려움의 통증, 자전거를 사고 힘차게 페달을 밟던 순간 마약으로 인해 마비되었거나 혹은 너무 날카로워졌던 클로디의 몸이 생의 활력으로 일깨워지는 감각. 이렇게 <로나의 침묵>의 장면들은 나에게 컷과 이미지가 아닌 몸 어딘가의 느낌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내가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마찬가지로 내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감정과 상황에 맞닿아진 통증, 감각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때 영화가 더 깊게 관객에게 남겨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때문에 시나리오를 쓸 때면 당연히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도 고심하지만 각 씬이 품고 있는 기운 혹은 인물의 몸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상상하는 데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된다.
늦은 밤 어린 소녀가 부모의 싸우는 통화 소리를 엿들을 때 그녀가 딛고 서 있던 타일의 싸늘함, 발바닥을 조용히 적시는 시리도록 차가운 물. 비밀을 품고 마주한 두 여고생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불의 열기. 영원히 진실된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만 같던 모녀의 입을 열게 만드는 녹은 아이스크림의 단 맛. 이런 것들을 떠올릴 때면 때로는 정말 실제로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인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손끝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객들의 혀에, 피부에, 코끝에 남겨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컨테이너>(김세인, 2018), <불놀이>(김세인, 2018) 중
<로나의 침묵>이 오랫동안 나에게 남아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로나가 연속적인 변심과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마약을 끊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클로디의 청을 외면하던 로나는 점차 클로디를 적극적으로 돕고 이내 몸으로 보듬어 주기까지 한다. 거래 현장에서 갑작스레 아기에 대한 질문을 꺼내놓고 심지어 아기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끝내 부정하며 끊임없이 아기에게 말을 건넨다. 이러한 변심과 충동에 따른 행동들로 인해 로나는 사랑하던 애인과 이별하고 가게도 돈도 모두 잃게 된다. 급기야 생명까지도 위태로워진다. 영화의 초반 계산적으로만 행동하던 로나는 실속 없이 모든 것을 잃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대답 없는 빈 배뿐이다.
어쩌다 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그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 또한 줄곧 변심과 충동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다. 냉철하고 실속 있게 살아가고 싶은데 나 같은 유형의 사람에겐 그건 영영 오지 않을 세계다. 나이가 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닥쳐오는 상황들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느 정도는 눈에 보일 줄 알았다. 나이가 들어도 모르겠는 건 모르겠고, 그중 제일 모르겠는 건 나 자신이다. 언제까지 나 자신에게 당황하며 살아가야 할까. 사랑하던 애인과 돈 계산을 한 뒤 이별하는 순간,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 이외에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로나의 답답한 눈물이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나의 마음이었는데. 그저 빈 배를 움켜쥘 수밖에. 그리고 믿어볼 수밖에. 내 연민과 사랑이 불러온 결과가 결코 빈 배가 아니라고. 이 배는 비어있지 않다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둡고 싸늘한 방 안에서 한참 동안 빈 배를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건 나도 로나처럼 믿고 싶어서였다. 연민과 사랑으로 다소 유약하게 굴었던 나에게 남은 건 빈 배가 아니다. 여기 이 배 속에 무언가 남아 있다. 그 무언가가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
김세인(영화감독) l 글을 쓰고 영화를 연출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1) 등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