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광이 삐에로 장 뤽 고다르, 1965

by.이민휘(음악가) 2024-05-16조회 2,694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떤 소리가 어떤 영상을 구제하러 와서는 결코 안 되고, 어떤 영상이 어떤 소리를 구제하러 와서는 결코 안 된다.

-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


나는 영화 음악 작업을 할 때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관성에 기대게 되기 때문이다. 관성에 기댄 받아쓰기는 순간을 모면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이 일을, 혹은 나를 이끄는 건강한 동력이 되지는 않는다. 다행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의 질문을 던질 때 후반 작업에는 연출이 곁에 있다. 그러나 조금은 두려운 표정으로.

내 홈페이지의 자기 소개란에는 10년 넘게 “저와 재미있는 작업을 하고 싶으신 분들은 겁먹지 말고 연락 주세요”라고 쓰여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를 개인적으로 모르는 연출들이 메일을 보낼 때 팔 할은 이 부분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음악을 잘 몰라서 두렵지만 겁먹지 말라고 쓰신 것을 보고 용기 내어 연락드립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두렵게 만드는 걸까?

두려움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영화제 제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일정이 딜레이 되어서 후반 작업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이미 예산이 초과되었다거나 하는 현실적인 문제일 때도 있고, 음악 감독과 작업해 본 경험이 많지 않아서 어떤 방식과 일정으로 소통해야 할지 막막할 때도, 음악적인 소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어떤 말로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을 형용해야 하는지 몰라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 실질적인 워크플로우에서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주기는 어렵지만, 후자 둘의 경우 문제는 음악에 대한 설명을 음악적인, 음악의 문법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면 쉬워진다. 이 부분에서 왜 음악을 원하는지, 여기서의 음악은 누구의 생각을 대변해야 하는지, 음악은 기억을 소환해야 하는지, 미래를 예지해야 하는지, 누구의 시점이어야 하는지, 혹 필요 없지는 않은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왜”들을 나누는 동안 우리는 알게 된다. 그림에 음악을 붙일 때 필요한 대화가 꼭 음악적 문법 안에 갇혀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미 연출의 머릿속에는 음악 외적(이라고 알려진)인 단서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크레딧을 제외한 모든 음악이 영화 안에서 존재하는 <사랑의 고고학>(이완민, 2022)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고는 수많은 “왜”들 속에 연출의 두려움뿐 아니라 나의 두려움도 자리한다. 내가 만든 음악들이 영화에서 어떤 당위를 잃은 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혹은 실패한 환영(phantom)의 대리인이 되지 않을지, 현란한 몸짓으로 언어와 그림의 간극을 메우는 모종의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되지는 않을지,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 거짓말은 환영받을 수 있을지, 관객을 이 세계로 끌어들이는 마법이 될지, 이 음악이 도움이 된다면 어디에,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 몇 편의 작업을 거치면서, 그리고 작업 과정이 익숙해질수록(!) 이런 끝없는 의심과 두려움은 사라지기는커녕 거의 실재하는 무엇이 되어 작업실 한 켠에 자리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하는 이 일이 지루할 틈 없도록 나를 긴장시키고 이끄는 재미가 되었다. 재미. 역시 재미가 중요하다. 혹자에겐 식상한 레퍼런스일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대학 초년생 때 보았던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2022)의 <미치광이 삐에로>(Pierrot le fou, 1965)가 영화 음악을 만들 때 맞닥뜨린 두려움을 재미로 치환시키는데 일조한 영화임을 부정할 수 없다.
 
<미치광이 삐에로>(장 뤽 고다르, 1965)의 첫 시퀀스 중 한 장면

<미치광이 삐에로>의 인트로는 앙투안 뒤아멜(Antoine Duhamel, 1925-2014)의 세련된 오케스트레이션과 그 위를 타고 흐르는 유려한 멜로디로 시작한다. 오 아주 신경 써서 음악을 썼구만,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음악은 음악적인 흐름과 무관하게 끊기고 나레이션으로 넘어간다. 내 첫 고다르 영화였던 이 영화의 인트로를 보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이 음악 편집 작곡가랑 협의된 건가?’ 놀랄 겨를도 없이 음악의 나타남과 사라짐은 바로 대사와 현장음, 컷과 뒤섞이면서 편집에 고유한 리듬감을 부여하고 성큼성큼 나아간다. 멀찍이 떨어진,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운 모습이 아닌, 스크린 앞에서 배우와 함께 대사도 치고 연기도 하면서 독자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종래에는 갑작스러운 연출에 정당성마저 부여하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음악은 두 주인공 마리안느와 페르디낭의 나레이션을 우스꽝스럽게 과장하기도 하고, 관객과 영화 속 인물의 경계를 허물면서 인물들이 가진 권한을 확장하기도 한다. 화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연속성을 가져오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이야기에 반주를 맞추며 자신의 쓸모로 재주를 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일부러 뭉그러뜨린 질감과 갑작스러운 등장과 사라짐은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들리고 있는 것이 만들어진 영화 음악이고 당신은 만들어진 허구를 보고 있다, 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물론 매 순간 자신의 정당성을 뽐내는 이 칼춤 같은 음악의 사용이, 혹은 이것이 주는 쾌가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쥐고 벼려온 도구의 사용 방법과 기능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것이 의심 없이 사용되는 것을 경계해 온 사람의 고민의 흔적은 현재 나의 고민이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 길잡이가 되어주고, 때로는 위안이 되어준다. 이런 소리의 질감과 음악의 사용이 어떤 사고와 고민을 거쳤겠구나, 천천히 짐작하며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선택지가 깔린 두려운 길에 친구가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은 음악 사용의 옳고 그름과도, 성공과 실패와도 무관하며, 오히려 그런 것이 없다는 것, 수많은 선택지 안에는 어떤 더 많은 (드러나는 혹은 숨겨지는) 선택지들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음악이 화면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신경 쓰면서 보는 것과 그냥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일례로 음악과 전혀 관련이 없는 직종에 종사 중이신 나의 부모님은 당신의 자식이 영화 음악을 시작한 뒤로 극장에서의 청취 경험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어떤 방식이 더 적절한(?) 영화 감상인지를 논하는 것은 내 역량 밖의 일이지만, 영화에서 어떤 감동과 위로를 받는 것만큼이나 영화의 말하기 방식이나 그 속성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지금 극장을 울리는 음악이 어떤 이유로 거기 있는지, 그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신경 써서 감상해보시기를 권한다. 그 과정은 영화와 새로운 관계 맺음의 가능성이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정말로 재미있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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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ierrot le Fou",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59592/?ref_=fn_al_tt_1>




이민휘(음악가) l 종종 다른 사람들의 영화, 드라마, 연극이나 미술 작업에 음악으로 함께 하기도 한다.
2012년 무키무키만만수 [2012]로 데뷔, 2016년 첫 솔로 음반 [빌린 입], 2023년 두 번째 정규 음반 [미래의 고향] 발표.
둠-메탈 밴드 'Gawthrop'에서 베이스 담당.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이종필, 2023). 영화 <사랑의 고고학>(이완민, 2022),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김세인, 2021), <최선의 삶>(이우정, 2020) 등의 영화에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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