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했으나 착륙은 불가능한, <번지점프를 하다> 김대승, 2001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4-10-17조회 622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 해당 칼럼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알바트로스라는 바닷새가 있다.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알바트로스는 날 수 있는 조류 중 제일 큰 새로 꼽힌다. 알바트로스는 날개짓을 하기 보단 상승과 하강기류를 활용해 바람을 타며 이동하기 때문에 하루에 천 킬로미터도 거뜬히 난다고 한다. 그러나 유려한 비상과 활강을 가능하게 하는 큰 날개는 땅에서는 균형감을 잃고 걷기 힘들게 한다. 이 때문에 땅 위에서 날개를 꾸깃꾸깃 우겨넣고 뒤뚱뒤뚱 걷거나 엎어지며 슬랩스틱을 보여주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은 <딱따구리(The Woody Woodpecker Show)>(1957) 같은 고전 애니메이션에서 희화화되기도 했다.

<번지점프를 하다>(김대승, 2001)의 주인공들은 알바트로스와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죽음을 불사한 사랑은 가능하지만 땅에 발을 붙이고 함께 살아가는 일상은 심각하게 거추장스럽거나 불가능한 것이 된다. 심지어 그들의 살아있음은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모욕과 혐오로 점철되고 죽음은 필연이 된다. 사랑은 죽음을 통해 증명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이고 오프닝과 엔딩을 통해 수미상관을 이루는, 카메라가 활강하는 씬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사랑과 불가능한 세속적인 삶을 은유한다. 오프닝 장면은 구불구불한 협곡을 따라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유영하는 카메라의 시점을 보여준다. 특정 인물의 모습이나 목소리가 등장하진 않지만 꽤 긴 시간 동안 지속되고 협곡을 따르는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히 멋진 자연풍경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관찰자적 시점이 아닌 실제로 공중에서 활강하고 있는 누군가의 신체적 움직임이자 주관적 시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가(그들이) 누구인지의 궁금증은 엔딩에 가서야 해소된다. 영화는 촬영기법을 통해 주인공들의 운명을 오프닝에 예정하면서도 엔딩에서야 명확한 답을 주며 관객을 몰입시키는 완성도 높은 장르영화를 구현한다.
 

<번지 점프를 하다>(이하 <번지>)는 2001년 개봉한 영화로, 당시 한국영화는 <접속>(장윤현, 1997), <미술관 옆 동물원>(이정향, 1998), <정사>(이재용, 1998) 등 격정적 감정에 호소하는 ‘신파’를 덜어내고 세련된 영상미와 독특한 관계성을 가진 로맨스 영화들이 부상하던 때였다. <번지> 역시 그러한 영화 중 하나로 평가 받았다. <번지>는 앞에서 기술한 오프닝과 엔딩의 유려한 헬기 씬,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적재적소의 음악사용, 해변의 저녁노을을 이용한 그림자 연출 뿐 아니라 운명적인 필멸의 사랑을 설득해 내기 위해 환생이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두 파트로 서사를 나눠 미스터리적 구조를 취하며 관객들이 마지막까지 호기심을 잃지 않도록 했다. 

영화는 1983년의 1부와 2000년의 2부로 나눠진다. 82학번 국문과인 인우(이병헌)는 같은 학번 조소학과인 태희(이은주)를 ‘우연히’ 마주치고 첫 눈에 반한다. 비오는 날, 우산이 없는 태희가 인우의 우산 아래로 뛰어들어 버스 정류장까지 바라다 달라고 하고 인우는 태희를 사랑하게 된다. 이 장면은 이후 다른 정보들이 추가되며 재해석된다. 관객들은 태희와 같은 과 친구의 대화에서 비오는 날 태희가 먼저 인우에게 호감을 갖고 우산이 없는 척하며 다가갔다는 진실을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영화는 한 사건을 두고도 여러 각본을 상상해볼 수 있도록 한다. 1부가 인우의 입영일에 발생한 교통사고로 인해 태희가 죽으면서 급작스럽게 끝나고, 2부는 17년이 지난 2000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국어교사가 된 인우는 고2 담임을 맡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학생 중 하나인 현빈(여현수)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18세 남자 아이임에도 현빈은 태희를 연상시킨다. 무언가를 들 때 새끼손가락을 펼치는 버릇, “젓가락은 시옷 받침인데 왜 숟가락은 디귿 받침이냐”는 질문,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을 좋아하는 것, 심지어 태희가 인우에게 선물로 줬던 라이터를 갖고 있는 것까지 태희와 같다. 영화는 1부의 태희와 2부의 현빈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작은 실마리들을 흩뿌려 놓으며 관객들이 인우와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도록 유도한다. 인우의 현빈을 향한 감정은 모두가 알아차릴 정도로 커져가고 결국 인우는 동성애자라 비난받으며 학교에서 쫓겨난다. 이후 전생이라 할 수 있는 태희의 기억을 떠올린 현빈이 인우를 찾고 둘은 1983년 약속했던 번지점프를 하러 뉴질랜드로 떠난다. 그리고 줄 없이 뛰어내린다. 
 
   
인우와 태희, 현빈과 인우

로맨스 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들 간의 사랑을 방해하는 대상이다. 사적 사랑을 억압하고 방해하는 것들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사랑은 더 강해지고 진정성을 얻으며 영원한 운명이 된다. 그렇기에 방해하는 대상은 대부분 개인의 힘으로 바꾸거나 해결할 수 없는, 매우 견고한 것이 된다. 1부가 그러한 방해물을 죽음으로 두었다면, 2부는 동성애와 학생-교사 간 로맨스를 배치한다. 죽음은 유한한 인간인 이상 극복할 수 없는 것이기에 로맨스 영화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방해 대상이다. 매우 규범적인, 반대할 여지가 없는 대학생 간의 이성애 연애가 방해를 받을 정도가 되려면 죽음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편 2부의 동성애와 학생-교사 간 로맨스는 사회적 변화에 따른 선택으로 보인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성소수자들이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매체에 가시화되었을 뿐 아니라 성소수자 운동은 시민권 운동의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배우 하리수가 2001년 도도 화장품 CF 모델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트랜스젠더임을 밝혔고, 배우 홍석천은 2000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 했다. 성소수자의 가시화는 대중적 인지를 가져오고 그에 따른 혐오와 차별도 두드러졌다. 특히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김태용, 민규동, 1999), 다큐멘터리 <Out: 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이영, 2007) 같은 영화들은 학교에서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차별을 그려내며 당대의 변화를 포착했다. 

<번지>는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2부에서 동성애를 사랑의 방해물로 그린다. 학생과 교사, 미성년과 성년이라는 강력한 방해대상이 있지만 이보다 더 크게 부각되는 금기는 단연 동성애다. 로맨스에선 개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대상 그 자체만큼이나 개인들이 그 억압적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도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번지>의 주인공들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회가 아닌, 동성애 자체를 부정적 방해물이자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취급한다. 인우와 현빈 모두 자신이 실제로는 동성애자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증명하려 애쓴다. 영화는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반복한다. 인우는 정신병원에서 성적 정체성과 관련된 검사를 받고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의사의 (의문스러운) 진단을 받을 뿐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아내와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려 한다. 현빈은 인우를 만나기 전만 해도 또래 여학생을 좋아하고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평범한 이성애자 십대 남자 아이라는 것이 강조된다. 현빈은 호감을 갖고 있던 혜주(홍수현)에게 의도적으로 속옷이나 누드화를 선물하며 성희롱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즉 인우와 현빈 모두 성적 정체성에 있어 ‘문제없는’ 이들이었음이 강조된다.
 
혜주와 현빈

이 에피소드들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적인데 하나는 이성애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행동이 대부분 성적 폭력에 기반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사랑보다 동성애 부인에 무게 중심이 간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계속 강조하는 건 인우가 현빈을 태희로 느끼고 운명적 사랑을 재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우와 태희는 어떤 성별로 태어나도 서로를 알아볼 것이며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대화를 나눈 바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 서사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따라서 인우와 현빈이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갖든 어떤 성별로 전환하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1부의 태도와 달리 2부는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즉 사회적 차별과 억압을 넘어선 사랑보다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분명 둘은 죽음을 넘어서까지, 즉 태희가 환생해서까지 재회하고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한다. 이것은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죽음도 뛰어 넘은 둘은, 동성애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둘은 뉴질랜드로 가서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한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는 장면 없이 주변 사람들의 비명 소리 이후 오프닝의 활강 씬이 반복된다. 인우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을 읊조린다.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내레이션에 따르면 그들은 사회가 용인하고 당사자들이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는 규범적인 이성애 커플로 당첨될 때까지 땅에 발을 딛지 못한 채 계속 죽고 환생해야 한다. 확률 게임처럼 말이다. 엔딩 카메라의 “끝이 없는 활강(반복된 죽음과 환생)”은 착륙지로 내정된 이성애 사랑을 위해 죽어야 하는 동성애자들의 운명이 된다. 이 카메라의 활강은 그 자체로 당대 퀴어 스크린의 일면이 된다.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2024) 등 공동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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