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연재]여고, 기억을 속삭이는 복도: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영화 글쓰기 키트

by.정지민(영화글쓰기키트 수강생) 2019-11-21조회 3,431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스틸

학교에 관한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운동장을 가득 채우는 수백명의 학생들. 이들은 모두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구령을 외고 있다. 유독 한 아이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을 제압하듯 뻗어나온다. 당신은 우연히 그 아이와 시선이 얽혔다. 그 살기등등한 눈빛. 한편으로, 밤중에 복도를 걷고 있는 당신의 곁을 슥 지나치는 누군가가 있다. 불현듯 이 시간쯤 학교에 출몰한다는 어느 여학생 귀신의 얘기가 떠오른다. 소름이 돋아 다시 뒤를 돌아본다. 등을 보인 채 멀어져가는 그 애는 낯익은 옆 반 학생이다. 아니 잠깐, 그런데 그 애의 머리가 단발이었던가?
 
두 단편적인 이미지는 학교라는 공동체-공간이 품고 있는 매혹과 공포의 서로 다른 뿌리다. 전자가 존재증명을 향한 분투와 같이 획일적으로 도열된 이미지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우상 신화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표상한다면, 후자는 또다른 원천을 나타낸다. 바로 모두의 외양이 서로의 복사판처럼 유사한 상황 속에 불쑥 유령적인 징후가 들이밀어지는 순간이다. 새로 출현한 우상을 구심점으로 한 집단이 다시 질서지어지는 과정과는 반대로, 이는 유사 판본들의 차원에서 경쟁과 유희의 장이 열리는 원심적인 작용을 의미한다. 진본으로 이름 붙여진 것은 유실되었거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상호 유사성 가운데 태어난 판본들은 계속적인 인력과 척력 작용으로 서로를 반영하면서 유기적 관계망을 형성해나간다.
 

올해로 개봉 20주년을 맞이하는 김태용, 민규동 감독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김태용, 민규동, 1999)는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과 평단을 사로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이 '여고를 배경으로 삼은 공포영화' 시리즈를 대중의 인상 속에 고유명사처럼 안착시킨 작품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고괴담' 시리즈를 떠올릴 때마다 흥미로운 것은 여고라는 장소와 괴담이라는 소재 사이에 어떤 친화성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연결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남고, 혹은 10대 남성들의 세계를 경유하곤 하는 학원-조폭물 계보의 영화들이 사회 구조나 권력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우화로서 독해되는 데 비해, 여성집단의 공간은 주로 괴담이나 불가해한 사건들의 발원지로 묘사되어온 것은 한국 영화가 만들어온 어떤 하나의 경향성 여기에서 그 계보를 다루는 것은 목적이 아니고, 또 모두 다룰 수도 없는 광대한 주제이지만, 한국영화에서 가장 시원적인 ‘여고’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에서 중간중간 등장하는 여공들의 야학까지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하녀’라는 강렬한 캐릭터의 모태공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이 여공 집단은 언제나 입을 모아 합창하고, 중년의 중산층 남성 주인공 동식의 등 뒤에서 끊임없이 가십과 저들만의 은밀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주인공에게 무의식적인 공포를 심어주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드러난다.

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가운데 '여고괴담'을 위치시키고자 한다면, 시리즈의 다른 편들과는 달리 당시의 10대 여성의 문화는 물론 여성 퀴어 주체들에게까지도 시선을 확장하면서 '여고'라는 실제적인 장소성을 세밀하게 포착했다는 평을 받아온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다시금 주목해야 할 작품이 될 것이다.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그 화학작용에 집중하며 통상적인 학원 공포물의 기획을 넘어서고 있다는 기본적인 인상들에 더해, 이 영화는 왜 '여고'는 '괴담'으로 대중에게 먼저 읽혀져야 했는가를 근원적인 지점에서 재질문하며 적극적으로 여고라는 공간의 공포를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의 진입, 몸의 배반]
늦은 등교길, 지각생 민아(김규리)는 수돗가에서 숨을 돌리다 우연히 빨간색 교환 일기장 한 권을 발견한다. 그 일기장의 주인은 어딘가 재수 없는 아이로 소문 나 있는 효신(박예진)과 민아의 동급생인 시은(이영진)이다. 호기심에 일기장을 들춰보기 시작했던 민아는 점차 빨간 일기장에 담긴 효신과 시은의 관계 속으로 깊이 몰입해 들어가고, 그에 따라 같은반 단짝인 지원(공효진), 연안(김재인)과 공유하는 학교에서의 평범한 일상들 위로 겹쳐지는 또다른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피처럼 빨간 일기장 속에는 효신과 시은 사이의 이끌림과 갈등, 그리고 효신의 외로움이 선명하게 맺혀있다. 효신의 투신을 기점으로 학교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기이한 사건들 틈에서 섬뜩하게도 계속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면서, 민아는 이 파국의 진실을 좇아 학교를 누비게 된다. 

 단순한 줄거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민아는 틈입자이자 매개자로서, 현재와 과거, 나와 타자, 효신과 시은, 학교에 공존하는 일상적 세계와 유령적 세계 등의 대립쌍을 자연스레 포개어 놓는 역할을 담당한다. 제 3자의 눈을 경유해 풀려나가는 이야기 구조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 특히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민아와 비교할 만한 또다른 대칭쌍이 함께 제시된다는 것이다. 학교의 국어선생님인 고형석 역시 이야기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으며, 효신과 시은의 사이를 잠시나마 비집고 들어갔던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형석이 이야기 안에서 하고 있는 역할은 크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는 효신과의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공간으로부터 끊임없이 거부당하고 있는 것처럼 무력해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마도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두 명의 틈입자, 민아와 형석 중 왜 한 명은 이야기의 매개자로서 승인되고 한명은 외부자로 밀려나는가? 다시 말하면, 왜 민아는 효신과 시은의 관계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며, 형석은 관계의 바깥에서 사멸하는가?
 

우선, 타이틀 시퀀스 이후로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의 도입부, 수돗가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민아와 형석은 여기서 교차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 행동 경로를 자세히 살피면 두 사람이 자연스레 어떤 공통분모를 형성하면서도 서로 빗겨나며 대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돗가에서 물의 세례를 받듯 얼굴을 흠뻑 적시다 우연히 효신과 시은의 교환일기장을 발견하는 민아와, 쓰레기를 주워 버리고 간단히 한 쪽 손만을 씻어낸 뒤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형석 사이의 평행선은 이후로도 영화에서 몇 차례 반복된다. 민아가 별다른 의식 없이 효신의 '약'을 삼켜버리는 데 비해, 형석은 효신과 어울리고 싶어 하지만 그와 마시는 술을 모두 게워내고 마는 체질이다. 효신의 소지품을 경유해 환영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같은 패턴을 볼 수 있다. 민아가 온몸으로 침투해오는 효신의 손길로 인해 기절할만큼 강렬한 빙의를 경험하는 반면에, 형석은 효신의 환영을 겨우 귓가로 불러들여 무언가 속삭이게 했을 뿐이다. 그리곤 목숨을 끊고 만다. 이러한 차이들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분명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복잡한 설명 역시 가능하겠지만, 의외로 가장 유력한 해답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단순한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외연이다. 고형석은 선생-남성이고, 민아는 학생-여성이라는 가시적인 차이 하나. 영화의 초반부에 생기를 불어넣는 지원과 캠코더 소동은 이 당연한 차이를 재확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달려와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며 웃는 민아와 달리 형석은 지원의 짝사랑 대상이자 멀리 떨어진 타자로서 암시된다. 지원은 그의 사적인 공간을 엿보려 캠코더를 들지만, 창과 창이 마주보는 건물구조를 통해 지원과 형석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가 정사-역사의 관계로 간신히 봉합되었을 때조차, 그의 얼굴이 아웃포커스로 새겨진 역사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결코 섞일 수 없는 이질적 이미지로서의 형석의 외연이다. 

반면에, 민아는 '동등한 몸'으로 효신-시은의 관계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이것은 공동체-연결망을 유지하는 유일하고도 암묵적인 규칙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즉, '외적인 유사성' 속에서만 여기-이-공동체의 몸으로 귀속될 수 있음. 같은 원리로 효신의 죽음 이후 학교의 옥상, 복도, 화장실에서 출몰하는 유령들이 화면을 스칠 때, 우리의 시각이 판별할 수 있는 정보는 하나 뿐이다. 이들의 외양을 교복을 입은 그 주변의 친구들과 구분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공포인 동시에 매혹이다. 그러므로 왜 상관도 없는 타자의 일에 개입하냐는 친구 연안의 말에 "너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라고 응수하며, 효신의 죽음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는 민아의 뛰어난 공감적 상상력은 이 유기적 네트워크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확대하여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효신이 자신의 창작시를 통해 우리에게 넌지시 던지는 힌트 그대로다. "나는 누구도 될 수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듯.“
 

[재수 없는 것들]
그러나 이러한 네트워크-몸에도 언제나 정상성의 기준이 요구된다. 주요 사건들이 벌어지는 7월 9일은 효신과 시은의 생일이자 신체검사일이기도 하다. 낭만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시선을 가진 효신은 키나 몸무게를 표지하는 숫자들이 진짜 성장에 대해 무엇을 알려줄 수 있겠냐고 반문하지만, 의외로 아이들의 몸은 쉽게 그러한 분별과 통제의 수단을 전유하고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사적인 신체적 특징과 정보를 교실이라는 공동의 공간에서 기록하는 이 신체검사 의례는 학교 시스템의 폭력적인 면을 상기시키지만, 또한 교실은 다시 그 수치들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폭로하는 놀이터로 전복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키를 잴 때 슬쩍 까치발을 드는 아이를 통해 신체검사의 경직된 절차들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일상적인 층위로 해체되어가는 순간, 비명소리로 먼저 암시되는 효신의 투신은 정상성의 폭력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공표하며 우리를 뒤흔들어놓는다.

영화에서 연안을 비롯한 아이들은 제 마음에 들지 않게 튀는 것들을 볼 때마다 여지 없이 "재수 없어"라고 반응한다. 효신과 시은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길 때, 마치 반작용처럼 교실은 이들을 밀어낸다. 재밌는 것은 남학생 집단을 다루는 영화에서 주로 시선을 장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힘이 있는 인물인 데 비해, 여기서는 '비정상'으로 낙인 찍히고 고립되는 인물들이 오히려 이목의 중심에 선다는 점이다. 이미 고형석을 '외부자'로 날인한 바 있는 이 유사한 이미지들은 이렇게 자신들만의 협화음을 쌓으면서 그 내부의 주파수를 넘어서는 '다른 음'들을 다시 예민하게 집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청력 문제로 음악시간에 노래를 함께 부르지 못하는 시은과, 어른들 아이들도 지겹다는 듯 아웃사이더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효신에게는 늘 눈총이 따라다닌다. 그런데 진정한 역설은 이 척력 작용이 강하면 강할수록, 거부된 이미지들은 거꾸로 집단 내부에 음각처럼 깊게 새겨진다는 것이다. 효신은 물론이고 효신의 죽음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민아에 대해서까지 과할 정도의 적개심을 표출하는 연안은 사실상 그 누구보다 '재수 없는 애' 효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시은이 홧김에 찢어버린 교환 일기장의 페이지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은 채 무언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만을 덧붙이며 되돌아와 더 날카롭게 마음을 할퀴어대는 것처럼, 효신의 존재와 부재는 어떤 의미로든 강력한 것이 된다. 이때 학교는 공간 속에 배어든 과거의 기억들을 뿜어내며 효신의 자취와 반향을 이룬다. 그렇게 효신을 향했던 배제의 원리는 학교와 아이들의 무의식 속으로 다시금 어떤 유령적 판본을 불러들인다. 특히나 여러 사람이 이미 너무 갑작스럽고 돌출적인 이미지라고 지적한 바 있는 ‘욕조씬’(욕조에 앉아 혼자 울고 있는 효신)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참조하면 이 지점은 더욱 흥미롭다. 원래는 시은과 효신이 욕조에서 나누는 대화가 여러 씬 있었는데, 이후 편집 과정에서 대중의 정서에 맞지 않는 거북한 장면들로 받아들여져 결국 모두 강제로 잘려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가위질이 놓친 장면 하나가 살아 남아 영화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고의 공포, 그것은 '여고'라 이름 붙은 무신경한 묶음 속에서 유사 이미지로 귀속되는 몸들이 다시 파악 가능한 지평을 넘어서는 돌출물을 내밀기 시작할 때 한 번, 그리고 집단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온몸으로 밀어내어 온 이미지들이 불현듯 기억들 속에서 재활성화 될 때 또 한 번 세워진다. 이 유기망을 이루는 개별적 몸이자 결절점이었던 우리는 그것을 아직도 몸으로 기억한다. 

영화 초반 시은에게 관심을 드러내며 눈 속에 담기는 인영, '눈부처'를 언급한 효신은 어느날 불안감에 이렇게 다시 묻는다. "내가 안 보여? 내가 개미야?" 그리고 중간중간 삽입된 이질적인 질감의 화면들을 통해 암시되던 효신의 유령적 시점이 마침내 강당의 지붕 위로 드리운 거대한 효신의 눈동자로 현신하여 학교 공간 자체를 눈부처로서 담아낼 때, 우리는 효신의 얼굴을 눈과 마음에 새기며,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너의 죽음을 잊을 수가 없다고. 어떻게 잊겠냐고. 이제, 모든 것은 밝은 빛으로 산화된다. 우리는 유령적 시간인 과거로 돌아가 그들과 자리를 바꾼다. 기억들이 주체가 되고, 우리는 유령적 시선으로서 그곳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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