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 하루였어요. 하느님이 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어요? 물론 전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사실, 전 다 솔직했는걸요.’
영화 <
최악의 하루>(
김종관, 2016) 속 은희(
한예리)는 무명 배우이다. 늦여름의 오후, 연기 수업을 듣고 나온 은희는 일본에서 와 길을 헤매는 작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만나 도와준다. 연인 현오(
권율)의 재촉에 은희는 배우인 그의 촬영지 남산으로 향해 그를 만나지만 고운 말이 오가는 평범한 데이트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참 연애사를 헤집으며 서로를 탓하다가 달콤한 연인 행세를 좀 하려는가 싶은 찰나, 현오는 은희를 다른 여성의 이름으로 부르고 만다. 화가 난 은희는 현오를 뒤로하고 남산에서 내려가고, 거기에는 은희의 트윗을 보고 멋대로 찾아온 운철(이희준)이 은희를 기다리고 있다. 은희가 현오와 헤어졌을 때 만났던 운철은 은희에 대한 미련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도, 뻔뻔하게 전 부인과의 재결합을 알린다. 운철은 오랜만에 겨우 만난 은희를 보내주지 않으려 하지만 은희는 적당히 둘러대며 다시 현오를 만나러 남산에 오른다. 그러나 또다시 은희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운철을 마주치고, 현오와 셋이서 마주치는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해 은희는 가지 않으려는 운철을 사정하다시피 해서 돌려보낸다. 물론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고, 현오와 함께 있는 은희를 운철은 다시 한번 찾아온다. 결국 맞닥뜨리게 된 세 명, 서로가 은희의 연인이라 주장하는 현오와 운철 사이에서 은희는 그저 힘없이 길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그들이 떠난 뒤, 은희는 앞서 연기 수업에서 배운 대사를 체화해서 조용히 읊어본다. ‘긴긴 하루였어요. 하느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최악의 하루>라는 제목은 꽤 직관적이다. 한 앵글에 잡히는 은희, 현오, 운철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쉴 테다. 영화는 료헤이의 내레이션으로 막을 연다. ‘여행지에서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 곤경에 처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은희의 하루가 료헤이가 문득 생각해낸 허구의 이야기라면, 이는 그가 곤경에 빠진 여성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생각해낸 것처럼 보인다. 보통의 액자식 구성(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액자처럼 끼어들어 있는 구성)은 내부 이야기와 외부 이야기의 경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최악의 하루>는 외부 이야기의 화자처럼 보이는 료헤이의 내레이션과 그의 모습이 잠깐 등장한 후, 바로 은희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료헤이는 자연스럽게 은희의 하루에 녹아들어 오늘 하루 동안 은희가 만나게 된 세 명의 남자 중 그저 한 명으로 느껴지게 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분명 처음의 내레이션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은희의 하루에 같이 발을 동동 구르게 될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는 은희의 시간을 하루로 제한하는데, 그뿐만 아니라 공간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은희가 처음 수업을 듣고, 료헤이를 만나는 배경은 서촌이다. 길을 잃어 한없이 걷는 둘의 뒤로 펼쳐지는 고즈넉한 풍경은, 늦여름의 서울을 관객이 하여금 대신 만끽하도록 한다. 은희와 료헤이가 작별을 고한 후, 배경은 남산으로 고정된다. 현오를 만나러, 운철을 피하려 은희는 푸릇푸릇한 남산을 걷고 또 걷는다. 최악으로 치닫는 하루와는 대비되는 아름답고 안정감마저 주는 배경은 은희의 하루를 더 비참하게 만들기도, 덜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최악의 하루>는 거짓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영화이다. 현오는 실수로 부른 이름의 여성과 은희 몰래 교제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운철은 전 부인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채 은희를 만난 이력이 있다. 그러나 은희는 이들 사이에서 그저 수동적으로 순진한 얼굴을 하고 난처해하지만은 않는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에는 거짓으로 응수하기를 선택한다. 비록 그 치열한 고군분투의 결과로 그의 하루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지만 말이다.
은희와 료헤이가 처음 만나 서로의 직업을 물었을 때, 료헤이는 소설가인 그의 직업을 ‘거짓말을 하는 직업’이라고 소개한다. 은희는 배우인 자신도 같다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지만, 이 둘은 서로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서툰 언어인 영어로 대화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고르고, 줄여서, 쉽게 말한다. 유창한 거짓이 덧붙을 여유는 없다. 소박한 대화 속에서 그들은 미소 짓는다.
료헤이의 팬이라는 한 잡지 기자는 인터뷰에서 ‘이야기가 자극적이고 주인공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잔인하다. 왜 인물들을 위기에 넣고 꺼내주지 않느냐’고 묻는다. ‘글은 글일 뿐’이라고 답하는 료헤이에게 ‘저는 부끄러웠어요. 저 자신과 그 안의 인물이 점점 닮아가더니 벼랑으로 떨어지고 땅에 묻히더군요. 정말 그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라고 말한 뒤 기자는 사라진다. 아니, 있었던 흔적이 아예 온데간데없다. 료헤이가 본인에게 묻는 말인 것이다. 그대로 은희에게 가 닿는 질문. 그는 혼자 앉아 골똘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본다.
이미 늦은 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은희의 앞에 료헤이가 다시 나타난다. 현오에게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냥 일본인이라고 했지만, 은희는 료헤이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최악의 하루를 보냈음에도, 은희는 다시 만난 료헤이에게 묻는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 상대의 안위는 안중에 없이, 각자의 욕망만을 이야기하던 현오와 운철과는 극명히 대비된다. 이제는 별다른 목적 없이, 한 번도 끝까지 가 본 적 없는 남산의 산책길을 료헤이와 은희는 함께 걸어본다. 기자의 입을 빌려 자신에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료헤이는 드디어 내놓는다. 한 번도 소설의 주인공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적 없는 그가, 언제나 위기에 빠뜨리고 방관자의 눈으로만 지켜봤던 그가, 처음으로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를 쓰기로 한다. 최악의 하루를 보낸 은희에게, 료헤이는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한 이야기에 대해 말해준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
료헤이가 은희에게 직접 해주는 이 말은, 누구나 항상 되뇔법한 ‘다 잘 될 거야.’와 꽤나 다른 의미를 갖는다. 액자식 구성을 명확히 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과 남이 해주는 말의 무게는 으레 다른 법이지만, 나와 다른 층위에 있는 존재의 이 말은 강력해서 최악의 하루 끝에서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준다. 당신의 하루를 감히 이해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려 하지 않고, 그저 내일의 안녕을 빌어주는 말. 이는 료헤이가 은희에게 하는 말이면서도, 감독이 힘든 하루를 보냈을지도 모르는 관객에게 전하는 심심한 위로의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