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임순례 감독의 <
리틀 포레스트>(2018)는 150만 명의 관객들을 동원하며 잔잔한 힐링 영화라는 장르 중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피할 수 없는 꼬리표가 있었다. “현실적이지 못하다”, “농촌의 낭만화”, 영화 이전부터 ‘삼시세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시골 농촌이라는 배경에 대한 논란이었다. 영화는 허구이지만 현실에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그 비판은 충분히 유의미하다. 그러나 이번 비평은 그 비판 때문에 영화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관객들에게 전하는, 영화에 대한 변호이다.
영화는 밝고, 따스하고, 반짝거린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밝은 색감을 고수하는데, 이는 관객들에게 농촌에 대한 무조건적인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혹은 그를 통해 귀농을 장려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임순례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도 밝혔듯, 이 영화는 하나의 주장을 하는 대신 ‘힐링’을 관객들에게 선물해주고자 하는 영화이다.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를 발견해내거나, 그런 사회를 거세게 비판하기보다는 그 사회를 살아가는 관객들의 마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영화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주인공인 혜원을 통해서 스크린에 등장한다.
영화 초반, 혜원의 도시 생활은 관객 대부분이 겪는 사회 현실과 다를 게 없다. 현대 한국 사회 속 개인은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그 선택 또한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선택의 자유에 대한 조건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안정적인 선택지를 고르고, 혜원도 마찬가지로 임용고시라는 선택지를 고른다. 혜원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빠르게 지나가는 노량진 장면은 그녀가 안정적인 삶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상징된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혜원은 허겁지겁 삼각 김밥을 먹고, 노량진에선 제대로 앉지도 않고 서서 컵밥을 먹는다. 치열한 경쟁 속의 노력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먹지 않는 식사는 경쟁에 초조한 현대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도시에서의 속도는 불안만큼 빠르다.
그러나 혜원의 노력은 통하지 않았고, 애인이었던 ‘훈’은 결국 합격했다. 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혜원은 그와 비교됨과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더 공부를 했다면, 조금 더 빨랐다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지만, 도시는 그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빠르게 먹어치운 식사는 빨리 사라진다. 혜원이 느끼는 허기는 열심히 노력했던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없어 생기는 간극이다. 같은 시대와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관객들 또한 갖는 이 허기를, 영화는 혜원을 통해 해소 시켜준다.
혜원의 고향인 미성리는 도시와는 정반대로 흘러간다. 이 공간은 거리라는 문제 때문에 물건 거래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이 공간은 ‘자급자족’을 바탕으로, 영화의 속도를 조정한다. 영화 속 “최고의 요리는 자신이 직접 해먹는 요리”라는 말처럼, 직접 만들어서 먹는 요리는 느리지만,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에 허기를 완벽하게 채워준다. 영화 속 혜원은 그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농사는 혼자 할 수 없는 일로, 고모와 함께 혹은 친구들과 함께 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수확한 쌀, 팥, 채소 등의 먹을거리는 다시 요리로 나눠 먹게 된다. 도시가 무한 경쟁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공간이라면, 자연의 공간인 미성리는 협력과 나눔으로 움직이는 공간이다. 갑작스러운 태풍으로 인해 농사를 망치게 되었어도,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혜원은 다시 일할 뿐이다. 이때 혜원은 투덜거리며 일을 하는데, 초반 도시에서 자신에게 책임을 몰아세우던 모습과는 다시 상반된다. 모든 걸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서야, 혜원은 자신을 떠난 엄마라는 트라우마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그저 ‘자연히’ 일어난 일이라는 걸 이해하는 것. 영화의 ‘힐링’은 이에 밑바탕을 둔다. 지금 답을 찾지 못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것과, 함께 답을 찾다 보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답이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이야기다.
영화가 말하는 힐링이 어렵지 않았던 것처럼, 감독은 그 메시지도 쉽게 전하려 한다.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영화처럼 어렵게 삶을 성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영화 속 혜원과 마찬가지로 관객들도 책임감을 덜어내고 잠시라도 편하게 지내길 원하기 때문이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단순한 메시지가 각종 화려한 편집 방법으로 전해진다면 그것 또한 모순이기 때문에, 감독은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게끔 스크린에 보이는 이미지에 집중한다.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작업, ‘개인에게서 책임감을 덜어내는 것’은 도시와 미성리라는 공간의 색감차이로 시각화한다. 혜원이 도시에 있을 때 살았던 방은 밤이라 어둡기도 하지만, 형광등 불빛, 냉장고 안에서 나오는 인위적 불빛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칙칙한 느낌이 든다. 그러한 공간 속에 놓인 인물은 ‘좋아했던 남자친구와의 경쟁에서 졌다는 사실’만큼이나 어두워 보인다. 그러나 미성리에서의 혜원은 창과 문이 많은 공간에 있다. 언제든 자연광이 바깥에서 안을 비출 수 있고, 안에서 혜원이 불을 뗄 수도 있다. 창문을 통한 햇빛이나 난로 불이 비추는 혜원은 따뜻하고 깨끗해 보인다. 도시의 인공적 불빛에서 벗어나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간 혜원은 자신을 짓누르던 책임감에서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
힐링의 두 번째 요소는 ‘함께’이다. 영화는 인물에 대해 클로즈업을 최소화하고, 등장인물들이 늘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도록 구도를 잡는데, 이 구도는 인물들이 더욱 더 가까워보이게 한다. 이러한 구도가 잘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로, 혜원, 재하, 은숙, 셋이 함께 막걸리를 먹는 장면에서도 처음엔 막걸리 잔에 초점을 맞춘 카메라는 앉아있는 옆모습이 모두 보일 때까지 줌아웃한다. 카메라와 거리가 멀어지면서 셋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줄어든 것처럼 보이게 되고, 덕분에 ‘함께’라는 요소를 더욱 부각시킨다.
롱쇼트는 ‘함께’라는 가치를 나타낼 때에도 쓰이지만, ‘자연스러움’이라는 가치를 나타낼 때에도 쓰인다. 혜원이 농사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야외의 ‘자연적인’ 공간에 놓이는 장면마다 카메라는 그녀와 거리를 더 벌린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가는 봄과 가을의 장면에서는 혜원의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익스트림 롱쇼트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언뜻 보면 이런 구도는 인간이란 존재가 자연에 비해 너무나 사소하고 작다는 것을 나타내는 장면 같다. 그러나 자연은 혜원을 억압하고 있기 보다는 그녀와 함께 장면을 완성해주는 역할을 하고, 혜원은 자연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장면은 계절이 바뀌는 시점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이는 계절의 순환성이라는 자연의 특성과 다시 한 번 연결된다. 자연의 연결점들 속 혜원은 점차 ‘자연스러움’의 가치를 내면화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타이밍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한다.
<리틀 포레스트>는 아주 특별한 영화는 아니다. 영상, 인물, 주제의식 어떤 면에서도 영화는 평범하고, 그러나 평범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관객에게 더욱 다가갈 수 있었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힐링 때문에 농촌이 너무 낭만화된 것 아니냐는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영화가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영화가 그려내는 ‘작은 숲’은 혜원의 공간일 뿐, 관객들이 가질 힐링의 공간은 그 어떤 곳, 도시 깊숙한 안이 되어도 상관없다. 그저 그럴 수 있는 공간을 찾기 바란다는 메시지와 함께, 영화를 조금 더 편하게 보는 관객들이 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