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햇살에 반짝이는 잔잔한 강물은 무심한 듯 아무 말이 없다. 아이들은 강가 옆 풀밭에서 천진하게 놀고 있고, 새들이 지저귀는 맑은소리와 조용히 흐르는 강물 사이로 한가로운 여름날의 모습이 보인다. 평화롭고 잔잔한 풍경 뒤로 어린 소녀의 주검이 강물에 흘러 떠내려온다. 그 주검 옆으로 영화의 제목인 <
시>(
이창동, 2010)의 필체가 그려진다. 너무나 강렬한 <시>의 첫 장면이다. 소녀의 시체와 <시> 상극인 두 세계의 매치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어서 나오는 병원 씬. 의사는 미자에게 “그거 기분 나쁘네요?”라며 반문한다. 일상의 단어들이 종종 생각이 안 나고, 잘 잊어버린다는 말에 감독은 의사의 입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 앞으로 미자의 세계에 기분 나쁜 일 이 펼쳐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시는 아름답다. 글자에서 주는 어감과 은유적 단어들이 주는 창조적 상징들은 아름다우면서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생각하게 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미자의 내면과 그녀가 처한 차가운 현실 세계를 교차해서 보여주며 과연 두 세계는 양립할 수 없는가? 이분법적으로만 구별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극중 김용탁 시인은 문화센터 수강생들에게’본다’ 에 중점을 두며 가르친다. 일상의 모든 것 들에게 마음을 주며 진심으로 대한적이 있냐고, 깊이 들여다 본적이 있냐고, 이제까지 본건 진짜로 본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지만 김용탁 시인이 말한 것처럼 자세히 보지 않는다. 그냥 습관처럼 지나칠 뿐이다. 시를 쓰려면 자세히 봐야 하고 그 봐야 하는 대상은 현실의 세계인 있는 일상의 공간뿐이다. 미자는 쓸쓸한 강물, 떨어지는 살구, 들판에 핀 아름다운 꽃을 보며 시상을 떠올리지만 매일 하는 설거지 통에서는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시 낭송회에 갔다가 순수한 시를 읊는 자리에서 저질스런 농담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처음부터 그녀는 시와 일상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인식했다. 아름답고 순수한 것만 ‘시’라고 생각한 것이다. 손자가 성폭행의 가해자지만 아무일 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행동하고, 소녀의 영정사진 앞에서 그냥 밥을 먹고, 별일 없는 것처럼 친구와 몰려다니며 게임을 하고 똑같이 학교생활을 이어나가지만 미자는 괴로워한다. 소녀가 자살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다리에 올라가 소녀의 마음을 헤아린다.. 바람결에 모자가 강물에 떠내려가는걸 보고 소녀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굵은 소나기. 시 노트에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쏟아지는 장면은 어쩌면 소녀의 눈물이 고스란히 미자에게 다가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현실에서 소녀의 죽음을 자세히 관찰하며, 마음을 쏟고, 깊숙이 들여다봤다. 다른 가해자의 부모나, 슈퍼의 동네 아줌마들이 거들떠 보지 않았던 소녀의 죽음을. 그녀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진짜로 보는 것, 진짜로 마음을 쏟고, 깊이 들여다 보는 것을 이미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수강생들 중 유일하게 그녀만이 시를 완성한다. 모두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했지만 그 말을 시로 표현해 내지 못했다. 시는 시로써, 일상은 일상으로써 그렇게 그들은 시와 현실은 엄연히 다른 경계에 서 있음을 확증하며 그 이면의 다른 것들은 깊숙이 들여다 보지 않았다.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지만 시를 쓰려는 그 마음을 먹기가 어려운 것처럼. 과연 ‘시’란 어떤 것일까? 단순히 어렵고 이해하지 못할 은유들로 가득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존재일까? 미자가 그토록 쓰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시’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름다운 것과 인간의 추악함이 가득한 일상의 곳곳에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혜안의 열쇠일까? 평범한 우리들에게 시가 열리는 그 순간은 올 수 있을까?
미자 역을 맡은 윤정희는 60년대 3대 트로이카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외모에 다양한 연기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배우다. 이창동 감독의 권유로 15년만에 출연을 결심했다던 그녀는 영화에서는 여타 60대 중반의 할머니와는 다른 톤의 연기를 보여준다. 일단 말투와 어감, 옷 입는 차림새, 생각하는 것, 시를 쓰는 것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세대 또래와는 다른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미자’라는 인물은 영화 속에서 독특하게 묘사되며 그 캐릭터에 잘 녹아든다. 이제까지 감독의 전작에 나왔던 배우들과는 다른 질감이다. 영화 속 에서의 모습과 실제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독특함이라면 충분히 공감할만한 연기를 2시간 내내 보여줬다. 그 특유의 말투에 이질감이나 이상한 부분은 느낄 수 없었다. 영화 속 캐릭터의 특이성이 잘 발현된 배우의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 부분이 미자와 잘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창동 감독은 전작 밀양에서 신애(전도연)을 통해 피해자의 입장에서 용서를 이야기 했다. 그녀는 그 힘듦을 종교적인 구원으로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 했지만 가식적인 교회 사람들과. 자신이 불행할거라 단정지으며 불쌍히 보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며 교회를 등진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행동으로 모든걸 끝내려 한다. <시>에서는 밀양과는 반대로 가해자 입장에서의 용서를 말한다. 그 용서와 속죄의 중심에는 아름다운 ‘시’가 있다. 두 영화 다 ‘용서’를 말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조금 다르다. 밀양은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모습 옆으로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비추며 끝을 맺는다. 마지막에 은은하게 내리쬐는 그 햇볕의 의미는 뭘까? 그래도 세상은 한줄기 희망이 아주 미세하게나마 남아있다는 뜻일까? 아무런 설명 없이 빛으로 끝나는 이 장면은 깊은 여운을 준다. 그나마 이 빛이 조금이라도 세상 여러 곳곳에 비춰졌으면 하는 희망으로 보인다. <시>는 흐르는 강물위로 미자가 썼던 ‘시’만 나오고. 그녀는 자취를 감춘다. 긴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모습은 그녀의 자살을 의미하지만 영화 속에선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밀양의 희망과 달리 시는 속죄의 의미로 죽음을 택했다.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하는지..감독의 선택에서 냉혹하리만치 아픈 현실을 보여준다. 시와 현실이 동일시 된다면 시의 완성으로 그녀는 존재해도 되지 않을까? 육체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져야 했을까?
영화의 마지막. 학교의 교실, 운동장, 과학실, 배드민턴을 쳤던 빌라 앞 마당, 마을버스의 정류장, 피해자 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어귀, 소녀가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물 위 다리, 그리고 희진의 미소 띈 얼굴이 보인다. 급격한 파도와 풍랑을 겪은 후 다시 일상의 모습들을 카메라는 천천히 훑는다.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동네에서 삼삼오오 모여 놀거나 담소를 나눈다, 강물은 첫 장면처럼 변함없이 유유히 흐른다. 모든 게 그대로인 일상. 이 평온한 일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흘려 보낸 건 무엇일까?
이 영화는 미자가 손자를 스스로 경찰에 넘김으로써 영화적 소명을 다 했다. 만약 현실이라면 부모들은 사고를 친 아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어떻게든 보호하려 위해 애쓸 것이다. 절대로 먼저 본인들 손으로 경찰에 넘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코. 현실에서는 부모라면 할 수 없는 일이 영화 속에서 실현 되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할 수 없는 일들을 실현시키며 관객들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좋은 영화를 보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룬 영화들을 본다고 해서 윤리적인 면죄부를 부여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영화들을 보며 과연 내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내 마음가짐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일상의 잔잔함 속에서 시와 현실의 세계. 나아가서 영화와 현실의 세계에 대한 간극은 좁혀지고 더 많은 공감과 이해로 우리들을 이끌어 줄 지 모르겠다. 그건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