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영화’라고 하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는 보편적인 스토리 진행 방식이 있다. 고난과 역경을 겪는 등장인물이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한 후에, 무사히 다음 생애 주기로 진입하여 비로소 예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성장영화의 한 기준점으로 자리 잡은 이 독립영화는 어떨까. 어느새 개봉 10주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영화 <
파수꾼>(
윤성현, 2011)에 대한 비평과 담론은 꾸준히 생성되고 있다. 특히 청소년의 성장을 다루는 영화가 등장하면 <파수꾼>과 비교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절차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어느덧 우리나라 청소년 성장영화의 대표작이 되어버린 이 영화가 사실 우리가 익히 알던 성장영화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구타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파수꾼>은 곧이어 삭막한 아파트가 늘어선 전경을 비추며 영화의 진행이 밝지만은 않을 것을 암시한다. 아들 기태의 갑작스러운 자살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하는 아버지의 시점에서 희준, 동윤의 시점으로 이어지는 플래시백 구조를 통해 영화는 등장인물 각각의 미세한 심리 변화에 주목한다. 지금은 충무로를 대표하는 젊은 피들이지만 당시에는 풋풋한 신인이었던 배우들의 날 것 그대로의 연기는 모두가 거쳐왔으나 망각하고 있었던 그때 그 시절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는 기존 성장영화의 철칙과 달리, <파수꾼>의 아이들은 상처는 단지 상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며 온몸으로 역설한다. 한 소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추적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영화는 결국 명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 채로 끝이 난다. 세 소년이 어긋난 소통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 입고, 또 상처 입힌 자국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나의 성장기는 본의 아니게 <파수꾼>과 함께였다. 기태, 동윤, 희준 세 친구보다 어렸던 중학교 3학년, 그들과 같은 나이였던 고등학교 2학년,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거쳐 비로소 성인이 된 지금. 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람 시기에 따라 <파수꾼>은 변해왔던 내 나이만큼이나 다른 느낌을 안겨주었다. 열여섯 살의 나는 교실 내부의 보이지 않는 서열화를 매우 싫어하였기 때문에 반 친구들 위에서 군림하려 드는 아이들을 기피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의 내가 기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희준에게 이입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열여덟의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면 ‘중재자’ 역할을 하던 아이였다. 그러므로 기태와 희준의 갈등으로 걱정하는 동윤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희준 같은 중학생이자 동윤 같은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두 인물처럼 당시에는 기태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어쩌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 다시 본 <파수꾼>의 소년들은 학창 시절의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생각보다 희준은 강인했고, 동윤은 위태로웠으며, 기태는 여렸다.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나와 달리, ‘어른’의 문턱을 넘은 현재의 나는 비교적 넓은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지러운 핸드헬드의 화면 속에서 기태와 희준, 희준과 동윤, 그리고 동윤과 기태는 야구공을 통해 이미 색이 바래버린 서로의 마음을 뒤늦게 전하고 있었다.
영화 초반에 관객들은 자살한 인물이 당연히 물리적 폭력의 피해자인 희준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영화는 가해자인 기태를 자살의 주체로 제시하며 관객을 혼돈에 빠뜨린다. 소위 ‘일진’으로 불리는 서열의 최상위권 기태에 비해 희준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기태의 눈빛은 흔들리는 반면 희준의 눈빛에는 강단이 서려 있다. 뺨을 맞고 머리채가 잡히는 인물은 희준이지만 어째서인지 기태가 아파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희준은 자신의 ‘자존심’을 알음알음 건드리는 기태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소통을 일방적으로 단절함으로써 기태에게도 마음의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기태는 희준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유도,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도 몰랐기 때문에 결국 신체적 폭행을 통해 희준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를 입힌다. 서로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던 그들의 관계는 각자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어그러져버렸다. 기태는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어 했지만 사과에 미숙했고, 희준은 이미 지나간 인연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않는 아이였다. 완고한 희준에게 기태가 자신의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중한 자신의 야구공을 던져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기태의 자살 이후, 희준은 ‘무슨 일인지 나한테 얘기 안 해도 돼. 그래도 네가 기태 아버님은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동윤에게 기태의 야구공을 건넨다. 기태가 자살한 것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기태 아버지께 사건의 전말을 말씀드리는 책임을 동윤에게 전가함으로써 희준은 기태의 진심을 결국 외면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미리 마음을 닫아버리는 방식은 희준이 아픔으로부터 본인을 보호하는 행위이기에, 우리는 동윤에게 야구공을 내미는 희준을 함부로 비난하지 못한다. 기태나 동윤과 달리, 희준은 적어도 자기 자신은 지킬 줄 알았던 파수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윤은 기태와 이야기를 나눴던 식탁에서 희준이 ‘회피’한 기태의 진심을 집어 들게 된다.
동윤과 기태 사이의 틈이 점점 더 벌어지게 된 이유에는 그들의 대화 방식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두 소년은 마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처럼 말을 주고받는다. ‘야, 네가 뭘 아냐?/ 모르니까 물어보잖아.’, ‘그냥 좀 넘어가. 설명 못 하는 일도 있잖아.’와 같은 모호하고 불완전한 문장을 남발하며 그들은 소통 없는 대화를 반복한다. 이는 동윤의 회상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동윤과 기태의 대화와 상당히 대조적이다. ‘없어질 것에 목매지 마라’라는 충고를 해주는 동윤에게 기태는 ‘다시 사람들 사이에서 비참해져도, 너만 알아주면 돼’라는 신뢰의 말을 건넨다. 서로가 진실한 말로써 소통할 수 있는 사이였다는 것을 동윤은 조금 늦게 깨닫는다. 세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이 담긴 유일한 공간이었던 기찻길에서 동윤은 기태를 회상(어쩌면 상상)하며 ‘누가 최고야?’라고 묻는 기태에게 ‘그래. 네가 최고다, 친구야.’라는 늦은 대답을 전한다. 희준이 애써 회피한 기태의 진심을 간직하고 있던 동윤은, 그것을 다시 기태에게 건네주며 이미 지나가 버린 일들을 ‘후회’한다. 영화는 아이들이 성장의 다음 단계로 무사히 진입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그렇게 끝을 맺는다. 한 아이는 죽었고, 한 아이는 회피하고, 한 아이는 후회하는 모습만을 남겨둔 채로 엔딩 크레딧은 무심히 올라간다.
한 인터뷰에서 기태가 죽은 결정적인 이유에 관한 질문에 기태 역의 이제훈 배우, 동윤 역의 서준영 배우, 희준 역의 박정민 배우 모두 ‘나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전부 충분히 이해되는 대답이다. 기태는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잘못된 방식으로 관심과 애정을 갈구한 죄가 있고, 동윤은 ‘너만 없었으면 돼’라는 말로 기태를 무너뜨린 죄가 있으며, 희준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너무 일찍 마음을 닫아버린 죄가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라는 기태의 질문은 애초에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년들보다 더 성숙하고 완전한 존재라고 자부했던 성인 관객들은 기태의 물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유일한 어른이자 진실을 알고 싶어했던 기태의 아버지가 결국 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로 남은 것처럼, 아이들이 파국에 이를 때까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관객에게 <파수꾼>은 ‘어른’과 ‘성장’은 동의어가 아니라고 말하며 우리의 가슴을 후벼판다.
고통과 성장이 필수 불가결한 관계가 아님을 역설(力說)하는 이 영화는 역설(逆說)적이게도 한국 성장영화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동안 여러 매체에 등장한 청소년들은 대부분 ‘어른이 되기 전 단계’로서의 어리숙한 이미지로 소비되었지만, <파수꾼>은 ‘청소년기’를 아동기에서 성인기 사이의 순간적인 이행기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시기로서 세밀하게 다룬다. 이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성인으로 무사히 자라기 위해 도약을 꿈꾸는 미성년의 이야기가 아니다. <파수꾼>은 모두가 충분히 아팠지만 세월 앞에서 잠시 잊어버린 그 시절을 생생히 돌이켜보는 경험을 제공함과 동시에, 상처는 그저 상처일 뿐이라며 아프고도 성장하지 못했던 희준, 동윤, 혹은 기태였을 우리를 덤덤히 위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