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고의 신체 검사 날, 민아는 정체 불명의 일기를 한 권 줍고 그것이 자신과 같은 반인 시은과 떠들썩한 스캔들을 일으킨 효신의 교환일기임을 알게 된다. 일기를 읽어가면 갈수록 민아는 그들의 비밀스러운 관계에 점점 더 몰입하게 되고, 꾀병을 부려 들어간 양호실에서 우연히 시은과 효신이 직접 대화하는 것을 듣게 되면서 호기심은 점점 더 커져간다. 둘의 소원해진 관계에 대한 효신의 발화가 은밀해지면 은밀해질수록 시은은 양호실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눈치다. 그들이 옥상에서 나누는 대화를 엿듣던 민아는 이미 시작된 신체검사에 더 늦을 수 없어 서둘러 교실로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을 기도한 효신의 시신을 보게 된다. “첫 키스는 사과향기 같은 거라구? 난 피 냄새를 맡았어.” 수돗가에서 처음 일기를 주워 든 민아가 읽은 첫 번째 문구는 서브컬처적 은밀함과 성적 도발이 어지러이 뒤섞인 영화의 기본 정서를 암시한다. 그것은 또 신비화된 세기말의 파토스를 반영하기도 한다. 대의는 없다, 절대선도 없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를 추동 하는 것은 방향을 잃어버린 집단 안에서 이질적 불순물이 파괴적인 방식으로 뛰쳐나가려고 할 때, 이를 수습하여 붙들어두려는 집단의 관성이 길항적으로 작용하는 데서 비롯된다. <여고괴담>(1998) 첫 번째 시리즈가 교육 시스템과 기성세대의 폭력성에 대한 고발에 중점을 둠으로써 한국 사회의 과격한 집단성에 어느 정도 알리바이를 줬다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훨씬 첨예하게 개인을 논하는 이야기다. ‘우리’는 생각보다 차이를 참을 수 없고, 그 차이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면 놀랍도록 잔인해질 수 있다고. ‘우리’는 집단의 명백한 가담자다. 이는 (감독들이 ‘여고괴담’이라는 제목보다 더 선호한다고 알려진) 이 영화의 부제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의 첫 번째 단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개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의 수난을 더 잘 다루기 위해서 특정 젠더가 되어간다는 것 (혹은 수행한다는 것)의 고단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동시대적이다. 물론 모두가 알고 있듯, 기본적으로 이는 학창시절의 호모섹슈얼리티에 대한 성실한 묘사에서 비롯되지만 그것 외에도 ‘여성성’의 강박은 의외로 곳곳에 섬세하게 숨겨져 있다. 예컨대 영화 초반에 민아의 친구 지원이 캠코더를 들고 반 친구들을 촬영하면서 하는 말 같은 것들 말이다. 쉬는 시간에 잠을 자고 있는 친구들에게 “’밤 일’ 하고 있냐’”고 묻고 그 옆의 화장을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떡칠’을 하고 있지만 ‘원판’은 변하지 않는다”고 조롱하는 것 따위의. 그러나 앳된 얼굴의 아이들은 별 생각 없이 쾌활하게 웃는다. 하필 이야기가 벌어지는 그 날은 신체검사 날이기도 하다. 신체검사에서 더 마른 몸, 더 큰 키, 더 큰 가슴으로 정의되기 위해 민아의 친구 연안은 채소로만 끼니를 때우고 지원은 선생님에게 더 작은 소리로 가슴 사이즈를 말해달라고 애원한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국어선생 고형석과 효신의 관계다. 고형석은 자신의 ‘연약한 영혼’을 담보 삼아 효신에게 자신의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것은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관계의 성질이 효신의 유달리 조숙한 얼굴 뒤에 숨어 어른과 동등한 판단력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묘사될 때, 우리는 ‘성적으로 주체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가진 허울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예쁘고 날씬하고 ‘본판’에 거짓되지 않되, ‘밤 일’을 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어떠한 행동거지도 조심해야 하지만, 동시에 성적으로 개방적이면서 가끔은 내면의 괴로움으로 울부짖는 남자를 달래줄 수 있을 정도로 자애로울 것. 의도치 않은 부산물이겠지만, 효신의 죽음은 효신을 신비화함으로써 여성성에 대한 분열적 다중명령을 더 강화하고 만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김태용, 민규동 감독이 두 달간 사전조사 및 실제 한 학교의 연극반에 2주간 담당강사로 나갔으며, 극 중 대화의 많은 부분들이 실제 학생들의 대화에서 영감 받아 만들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다중명령은 감독들이 비판을 받아야 할 지점이라기보다 메타적으로 읽어야 하는 지점이 맞다. 물론 이러한 (평론가 듀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화인류학적’ 결과물을 보다 정밀하게 설명해내기 위해 굳이 X세대의 문화가 80년대 ‘청년문화’와 얼마나 다른지, 이 시대의 청소년 문화는 어떻게 태동되었고, 정치경제적 상황과 더욱 개방적으로 변한 대중문화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등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확실한 것은 90년대의 10대 여성은 전 세대에 비해 더욱 촘촘해진 레이어들을 통해 스스로의 젠더성을 검열하고 발전시킬 수 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고, 그 과정이 비평 가능한 수준으로 곳곳 관찰되고 있었으며, 여고괴담2는 이를 아주 정성스럽게 담아내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는 X세대의 다음 세대가 스스로가 처한 곤경을 수많은 페미니즘적 논의를 통해 인식하고 설명하려고 하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시사적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 학창시절에는 항상 선생과의 음흉한 소문을 달고 다니는, 지나치게 조숙해서 아니면 그냥 ‘창녀’라서 배척되었던 캐릭터 한 명쯤 있지 않았나? 이성애 경쟁에 수반되는 다양한 사회의 명령들을 수행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약간은 배제될 필요가 있어 보이는 레즈비언 캐릭터도? 놀랍게도 ‘그들’은 여전히 대상화된 ‘캐릭터’로 남아있다. 왜? 언제부터? 관객의 무의식이 이러한 질문에까지 닿게 될 때, 효신의 죽음을 목격한 다른 주인공들과 학생들이 느끼는 비정상적인 공포는 우리가 함께 져야 할 연대적 책임의 일부로 변환되어 수용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언제고 명백한 집단의 가담자가 될 수 있으므로.
물론 이 모든 정치적 함의만으로 이 영화의 가치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사운드와 공간을 운문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학창시절의 아름다움과 곤란함을 낭만화(또는 공포화) 하는데 매우 탁월하기도 하다. 특히 효신과 시은의 관계가 묘사되는 방식이 그러하다. 예컨대 효신이 아이들로부터 야유성 우유팩 세례를 받는 것을 목격한 후, 분노한 시은이 우유팩 하나를 발로 밟아 터뜨릴 때 나는 소리는 시은의 청력 문제를 알아채지 못하는 음악선생에 대한 반항으로 효신이 피아노 줄을 끊어버릴 때 나는 파열음과 몹시 닮아있다. 닮아있을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 매우 리드미컬한 대구를 이룬다. 효신의 죽음 이후 각종 유령적 현상으로 인해 패닉에 빠진 아이들이 몰개성한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장소로서의 1층 중정(中庭)과, 효신과 시은이 연인으로서 가장 순수하게 교감하는 곳으로서 그려지는 옥상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공식적으로 존재해도 되는 것으로 승인된 장소와 그렇지 못한 장소의 대조는 아이러니하게도 ‘승인되지 못한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력을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승인된 것들’의 무의미함도. 여고괴담2는 팬들마저도 인정하는(?) 무섭지 않은 공포영화이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영화가 사운드와 공간을 통해 관객의 신경을 긁으려는 방식 눈치챔으로써 전통적인 공포 영화 문법의 재미를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