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이 아닌 사람들은 연예인의 삶이 자신들의 삶과 어떻게 다른지 혹은 다르지 않은지 궁금해 한다. 그 마음은 지금껏 기자나 PD와 같은, 연예인과 비연예인을 잇는 중간자들에게 접수되어왔다. 그들에 의해 연예인의 일상은 ‘리얼’, ‘관찰’과 같은 수식어가 붙어 방송되고, 연예인이 SNS에 올린 글과 사진은 기사화된다. 이제는 연예인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유튜브 계정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요구와 응답이 적극적으로 만나, 어쩌면 우리는 관계 맺지 않은 타인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 이상으로 알게 되어 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관계 맺지 않은 타인을 보는 시선은 자주 왜곡된다. 우리는 한계를 인정하고, 때로 이용하면서 연예인의 삶을 가벼운 스토리 콘텐츠로 소비해버린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쉽고도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데 연예인이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제목삼아 직접 감독하고 주연한 창작물은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문소리가 ‘문소리’로 등장하는 그의 첫 연출작 <
여배우는 오늘도>(
문소리, 2017)의 외피는 일면 ‘여배우’라는 소재를 앞세워 흥미를 유발한 후 ‘여배우’지만 별 거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모큐멘터리 내지는 시트콤처럼 보인다. 실제로 문소리는 세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에서 흡사 3부작짜리 ‘인간극장’의 주인공 같다.
자신을 향하는 여러 눈길을 영화상에 배치한 후, 그 사이에서 요리조리 분투하는 ‘여배우.’ 그에게 꽂힌 시선의 주인은 친구, 가족에서부터 동료 영화인들, 그를 알지만 만나본 적 없는 낯선 이들, 즉 대중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자신이 문소리에게 지닌 애정이나 관심의 크기를 핑계 삼아, 가끔은 그것과 관계없이, 오직 각자의 렌즈로 그를 훑어낸다. 하지만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문소리가 타인의 시선을 경유해서 자신을 설명하려거나 그 시선에 대항해 자신을 변호하려는 알량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시선들의 존재양식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전면에 내세워야지만 ‘여성’이자 ‘배우’인 자신에 대해 이야기 꺼내기를 시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꺼이 객체가 됨으로써, 주체로서의 자신이 지닌 이상과 현실이 또 다른 여러 주체들에 의해 위협받아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영화는 논증의 과정에 심각한 표정으로 뛰어들기보다 가볍고 유쾌한 톤으로 일관한다. 영화 속 사건들은 결코 가볍지도 유쾌하지도 않지만.
우선 이 영화에서 문소리는 내내 다른 인물들의 ‘액션’에 따른 ‘리액션’을 하고 있다. 1막 ‘여배우’에서 문소리는 친구가 가자고 했기에 산을 오르며, 자신을 캐스팅하지 않는 감독 및 제작자들의 선택을 두고 자신이 가진 ‘나름의’ 매력을 복기할 뿐이다. 우연히 만난 남성들과의 술자리에서도 그들이 던지는 무례한 언행에 통쾌히 일갈하는 대신 껄끄러워하는 표정만을 보이며 차분히 대답을 이어간다. 2막 ‘여배우는 오늘도’는 아예 가족구성원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곳저곳을 누비는 문소리의 하루를 따라간다. 하루 끝에 그가 당도한 곳은 친한 프로듀서와 감독의 특별출연 요청을 ‘거절’하기 위한 자리다. 3막이자 이 영화의 가장 이질적인 에피소드 ‘최고의 감독’은 자신의 첫 주연작을 연출한 감독의 장례식장에 가는 이야기인데, 여기에서도 문소리는 상대역이었던 남성 배우가 그를 붙잡고 나서야 망자와 그의 작품을 논하는 토론의 장에 합류된다. 영화 속 문소리가 처하는 대부분의 상황은 타인들에 의해 꾸려진 판이며 그는 그 판 위에서 그들의 기대를 따르거나 배반해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요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소리가 ‘액션’이 아닌 ‘리액션’으로 현현해야 했던 이유는 제목이 내포한 두 가지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첫째, 그는 배우, 곧 연예인이다. 둘째, 그는 여성이다. 분명한 것은 <여배우는 오늘도>의 방점이 문소리가 ‘배우’로서 겪는 파란만장보다 ‘여성 배우’라서 견디는 진퇴양난에 찍혀있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지만 ‘조폭 아님 경찰’인 한국 영화에 자주 초대받지 못하는 여자. “힘들면 뭐라도 줄이라”고 다정히 말해주는 남편이 있지만 유치원 가기 싫다 통곡하는 딸을 달래줘야 하는 여자. “여배우 발을 닦아줘 훌륭하다”소리를 듣는 감독의 작품 세계를 비판하다가도 그가 남긴 영상을 보며 예술을 다시 고민하는 여자. 그렇게 멀리 나아갈 수도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는 여자. 이 영화에서 문소리가 처한 모든 특수하거나 일반적인 상황들은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교묘하게 톱니바퀴를 맞물리며 진행된다. 다른 인물들의 눈짓을 앞세우고 문소리의 대꾸를 뒤세우는 영화의 흐름은 톱니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기름칠에 다름없다.
시선에 화답하기 위해 준비되는 주재료는 어김없이 ‘외모’다. 그는 산에서 만난 남성들과의 술자리, 치과의사와의 사진 촬영을 앞두고 열심히 화장을 한다. ‘여배우’로서 기대 받는 미모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러다가도 특별출연을 거절하기 위해 찾은 주점의 화장실에서는 화장을 지운다. ‘여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가꾸지 못할 만큼 힘들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또한 선글라스는 꾸미지 않은 겉모습을 가리는 용도로, 드레스는 ‘여배우’로서 기대되는 외형을 극적으로 재현하는 장치로 쓰이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물건들을 대하는 문소리의 태도다. 그는 선글라스가 없으면 불안해하다 못해 고성을 지르며 길 한복판을 달린다. 그렇다고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특별히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아니다. 딸이 드레스를 입은 레드카펫 위 문소리를 가리키면 “엄마 아니야”라며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프라이빗 뱅킹 직원이 “여배우는 드레스 맨날 입고 좋으시겠다”며 웃을 땐 호응조차 안 한다. 이렇듯 문소리가 화장을 하고 지우는 장면은 그가 ‘여배우’를 보는 타인의 시선에 적당히 화답하는 방식을, 선글라스에 집착하고 드레스에 무심하게 구는 설정은 ‘여배우’를 택한 자기 자신의 다짐을 은유한다. 나는 나와 내 직업을 두고 유별나게 굴고 싶지 않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내게 갖는 당신들의 기대에는 불평 않고 따르겠으나, 그 순응은 내가 나를 존중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선언. 영상을 통한 문소리의 발화는 코미디로 눙쳐지다가도 어느새 한국 영화계, 더 넓게는 이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환영하다가도 무시해왔는지 넌지시 그러나 적확하게 짚고 넘어간다. 그 점이 영화를 기어이 블랙 코미디로 만든다.
결국 문소리는 첫 연출작에서 자신을 시선에 둘러싸인 존재로 만들고, 늘 타인들의 반경에 위치하게 했다. 자신을 ‘고뇌하는 예술가’나 ‘고통 받는 워킹맘’과 같이 보다 본격적인 존재로 명명할 의지를 내려놓고 일상으로부터 끌어온, 조금은 소소한 이야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 시도는 경력 단절 비슷한 것을 경험한 유명 ‘여배우’ 감독으로부터 관객이 기대할 ‘진짜 자기 이야기’보다는 얕은 수준일지 모른다. 영화의 코믹한 톤마저 어쩌면 진지한 논의를 빗겨가기 위한 수단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평가내리는 것은 여성 창작자의 자의식을 납작하게 관망한 결과에서 비롯된 판단이지 않을까. 실제 현실과 재현된 현실 속에서 여성이 시선의 주인이 아닌 대상으로 존재해온 역사는 뤼스 이리가라이, 로라 멀비, 존 버거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어왔다. 이들은 여성이 남성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의식해야 했던 동시에 여성 스스로도 자신을 검열하며 압박해왔음을 수많은 사연과 매체를 들어 역설했다. 너무나 유구해서 학문에까지 자리 잡은 이 역사를, 20년째 카메라에 찍히다가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여성 창작자가 지나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가 보여준 것과 보여주지 않은 것은 여성이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처음으로 들려준 이야기와 나중으로 미뤄둔 이야기에 다르지 않다. 자기 이야기의 주인이 되기 위해 자신이 주인이 아니었던 순간들을 먼저 꺼내 보이는 용기. 그것만으로도 언젠가 문소리가 자기만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장악하길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배우로서든, 감독으로서든 그가 계속해주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