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연재]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천당의 밤과 안개>(정성일, 2018) KOFA 10 Best + 1

by.박인호(영화평론가) 2019-03-27조회 8,017
천당과 밤과 안개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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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의 밤과 안개>(2018, 정성일)는 정성일과 왕빙의 영화들이 함께 머무르며 생성되는 터이자 그곳에 세워질 집을 닮았다. 하지만 이 집엔 설계도가 없다. 구획된 면적과 적합한 수치도 없거니와 중요한 재료도 정해지지 않았기에 완성된 집을 가늠할 수 있는 청사진이 존재할 수조차 없는 집이다. 게다가 이 집은 언제 완성될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영화가 짓고자 하는 집은 오랜 시간을 들여도 허름한 형태거나 미완의 상태에 가까울 것 같다. 집의 모양을 고수할 수 있는 굳건한 재료들보다 얽어놓고 간신히 기대놓은 나무들과 부석거리며 바스러지는 흙과 돌덩이의 질감이 드문드문 남아 있을 것이다. 공백과 진공만이 그 영화들에 허용된 재료일지 모른다. 계획이 별 소용없는 상황, 할 수 있는 것들조차 제한적인 상황, 사람의 의지로 이끌어갈 수 없는 상황, 목적지를 찾아가고도 길에서 시간을 버텨내야 되는 상황이 오히려 이 영화의 단호함과 투명함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정할 수 없는 집을 함께 짓기로 결단한 왕빙과 정성일의 단호한 태도 때문에 감동적이고, 좀처럼 나아가지 않은 지체된 순간을 견뎌내는 인내 때문에 특별하다. 이 영화는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삶의 가능성과 믿음을 가늠하는 영화이자 흙먼지와 광인들의 뜻 모를 노래와 중얼거리는 말, 농민들이 청하는 술 한 잔, 아이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눈과 안개 속에서 존엄함을 드러내는 영화가 되어간다.   

제목에 표기된 천당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한다. 하늘에 있는 낙원 혹은 신의 집을 뜻하는 天堂은 뿌연 먼지로 둘러싸인 남산타워부터 중국의 하늘과 길, 영화의전당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가 스쳐 지나가고 잠시 머무르고 통과하는 모든 곳을 포함한다. 천당은 왕빙을 만나야겠다는 결심과 영화를 찍어가는 여정, 만들어진 영화와 마주하는 극장으로 번져가고 넓어진다. 그뿐 아니다. 중국의 인민들이 살아가는 고산지대와 농촌, 길게 뻗은 길을 따라 높아지는 건물과 공사 현장이 펼쳐지거나 터널을 통과하면 바뀌는 변화무쌍한 햇빛과 나무의 품종, 황갈색으로 변해가는 산세도 천당의 풍광이다. 높은 산을 오르는 노동자들의 사뿐한 걸음걸이,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는 농민의 주름진 얼굴, 타지를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노동자의 볼품없는 살림살이, <세 자매>(2012)를 찍으며 얻은 병으로 몸이 좋지 않은 왕빙이 잠시 누워 밤을 청하는 작은 소파와 정신병원에 갇힌 광인들의 작은 병상도 천당이다. 그리고 스스로 찾아온 스크린을 마주하는 또 한 편의 영화(배우 정인선이 연기한 그녀이기도 하다)와 극장도 천당의 모습으로 변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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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의 밤과 안개>는 왕빙의 리듬을 헤치지 않으면서 조용히 뒤따르기로 결심한 정성일의 카메라 작동 원칙을 끝까지 고수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카메라는 왕빙의 카메라와 그의 스틸 카메라, 정성일의 카메라인데, 카메라들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카메라를 든 자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과 인민들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삶이란 간접적으로 배울 수 없다는 원칙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때 카메라들은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프레임 안에 담기는 인물들은 카메라 주위로 몰려들어 빤히 쳐다보거나 흘깃거린 후 프레임을 벗어나며 카메라가 있건 말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그곳에 있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카메라의 투명성은 영화의 인민들뿐 아니라 왕빙과 정성일의 영화(들)에서도 발견된다. 그들은 왕래하지 않고도, 서로 의논하지 않고도, 전작과 작업 중인 영화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도 서로를 향해 개방되어 있다. 왕빙은 정성일의 카메라가 작동을 멈춰야 된다고 생각하면 카메라를 꺼줄 것을 요청하고 정성일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원을 꺼버린다. 캠코더를 들고 가지 않은 왕빙이 정성일의 카메라를 빌려달라고 말한 후에 이어지는 쇼트는 정성일의 카메라로 왕빙이 촬영한 것인지, 정성일이 이어서 촬영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두 대의 카메라가 함께 활동하는 데 원칙은 단 하나, 그들의 행동과 그들의 영화에 담길 인민들이나 공간, 그들의 카메라가 투명한 시선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촬영 기계를 들고 있는 행위와 뷰파인더로 인민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두 대의 카메라가 기록하고 있는 시.공간이 관통해서 우리들에게까지 도달한다. 프레임에 카메라가 두 대나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기록 장치인 물질은 망각되고 공간을 채우는 인민들의 모습으로 채워진 영화가 되어간다.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카메라를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정신병원은 사각형의 건물이고 중앙에 마당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병원의 정문(정신병원이라는 간판)과 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광인들이나 병원을 나서는 왕빙의 뒷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전체 공간을 조망하는 쇼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전체를 찍을 수 없고 보여줄 수 없다는 조건이 이 영화가 방문할 수 있는 장소를 제한했고, <천당의 밤과 안개>는 예측하거나 계획할 수 없기에 카메라가 다가갈 수 없는 곳을 엿보거나 기웃거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복도 이편에 왕빙의 카메라가 있으면 정성일은 건너편에 카메라를 놓아두고 광인들을 촬영하는 왕빙을 바라본다. 왕빙이 자리를 옮기면 정성일도 왕빙(과 광인들)의 동선을 거스르지 않는 위치에 카메라를 놓아둔다. 사각형의 건물을 따라가는 핸드헬드도 예외적으로 등장하고 상황에 따른 기민한 쇼트 전환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는 마치 오즈 야스지로의 인물들처럼 애초에 시선의 마주함이 불가능한 현실에 놓여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오즈의 영화에서 180도 가상선을 침범하는 카메라가 오히려 그들의 공간적 맥락을 지워버리는 것처럼 카메라를 든 두 사람과 이 영화는 카메라를 없는 존재로 여기면서도 프레임 가득 광인 개개인의 리듬으로 움직이는 끊임없는 움직임, 스산한 공간에 스며든 웅성거림과 휘갈긴 낙서들을 빼곡하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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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의 밤과 안개>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왕빙의 원칙과 태도를 탐구하기 위해 그 현장에 동행한 정성일의 요청이 모두 담긴 결과물이다. 두 사람의 협업이 아님에도 이 영화는 왕빙이 찍었던 영화(<세 자매>(2012))와 찍고 있는 영화(<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2013))와 정성일이 찍었던 <카페 느와르>(2010)와 찍게 될 영화(<녹차의 중력>(2018))가 공존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같은 공간을 찾아가고 같은 인민의 삶을 지켜보면서 규정될 수 없고 쉽게 파악되지 않는 사건과 마주하면서 그들의 카메라 사이를, 그들의 영화들 사이를 지나가는 힘의 작용이 감지되는 것 같다. 정신병동을 예로 들면, 왕빙의 카메라에 담긴 광인들의 현실이 이편에 놓여 있고 다른 편에 광인을 찍고 있는 왕빙의 현실이 존재한다. 두 대의 카메라는 두 종류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천당의 밤과 안개>는 두 종류의 현실을 동일한 성질의 현실로 생각한다. 왕빙의 말처럼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 감정의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이 곧 영화이며 카메라 앞에 있는 사람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과정의 실천이 곧 영화이기 때문이다. 정성일의 결단은 일체의 개입이 불필요한 현실의 힘들이 부딪히고 파열하고 사그라지는 삶의 강력함에 대한 항복이라 부를만하기 때문이다. 두 대의 카메라가 동일한 현실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 영화의 힘이다. 왕빙의 카메라 지척에 존재하는 광인들, 그들 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있는 왕빙의 카메라, 왕빙의 카메라를 위치삼아 자신의 자리를 조용하게 찾아가는 정성일의 카메라가 거리낌 없이, 불편함 없이, 침범함 없이 그곳에 놓여 있을 뿐이기에 감동적이다. 

<천당의 밤과 안개>에는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불현듯 나타나고 불시에 사라진다. 나는 왕빙과 정성일이 겪은, 지체되는 상황으로 인해 더 오래 볼 수 있었던 얼굴들과 표정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자꾸만 어긋나는 약속, 정체되는 기다림,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몇 날을 달려가야 하는 머나먼 길, 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산과 나무들, 수시로 바뀌는 햇살의 강도와 그림자의 길이, 우연히 만난 농민들의 주름진 얼굴과 친절한 미소, 긴 철근을 어깨에 받치고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는 노동자의 걸음,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고된 생활을 증명하는 살림살이와 얼룩진 벽, 마당을 한가롭게 돌아다니는 닭과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개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광인들의 눈동자와 천진한 미소, 마침내 이름 모를 마을에 멈춰선 정성일의 끈덕진 응시와 같은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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