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가 통과한 세상은 독립영화에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어 왔다. 경험적 근접성에 기인해서일까. 교복 입은 10대의 이야기는 언제나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가족과 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서사는 유사한 구조와 전개 속에 있곤 하지만, 작은 사회로서 간단치 않은 문제를 품어 왔다. 가출팸을 소재로 한 영화 역시 그의 연장에 있다. 필자의 좁은 삶의 테두리에선 가출팸 청소년을 근접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국의 독립영화에서였다.
집인지 수용시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공간, 대개 청소년이지만 더러 어린아이와 어른이 끼기도 한 무리는, 때로는 여관을 전전하고 때로는 공공화장실에 몸을 의탁하며 불안한 주거를 이어갔다. 빼곡하게 쌓여 있는 신발들, 쓰레기더미 같은 방, 한 줄에 대화에도 섞이는 욕설 그리고 위험한 범죄들... 이상한 호칭만이 패밀리를 환기하는 유일한 끈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이해 불가였지만, 영화 속에서 자주 상황을 접하다 보니 간혹 이들은 안다고 생각했다. 창작자들이 자극적 소재를 너무 쉽게 차용하는 것 아닌가 의심하며 엄격한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꿈과 환상이라는 영화적 판타지로 우아하게 약자를 감쌌던 <
꿈의 제인>(2016,
조현훈)에 이르러선 소재적 절정에 이르렀다 싶었다. 하지만 이환 감독의 장편 데뷔작 <
박화영>(2017,
이환)은 내가 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친 주인공 박화영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집을 아지트 삼아 가상 패밀리를 구성한다. 친구들에게 그녀의 집은 가출의 근거지이자 일상적 놀이터이다. 박화영은 그들에게 엄마로 불리지만 사실은 권력의 제일 말단에 있다. 진짜 엄마와 악다구니 전쟁을 벌여 돈을 구하고 밥과 빨래에 청소까지 온몸을 다해 패밀리를 부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매 맞는 아내가 되어 자식의 흠결을 지킨다. 그룹의 우두머리인 ‘아빠(영재)’는 폭력의 화신으로 현현하고, 친구들은 기생충처럼 박화영을 착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화영)’에겐 예쁜 ‘딸(미정)’이 위안이다. 미정은 영악하게 철저히 그것을 이용한다. 패밀리의 관계는 끔찍하고 공허하다. 무리의 모두가 이를 알고 있다. 박화영만이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할 뿐이다. 박화영은 왜 그토록 미워했던 엄마가 필사적으로 되고자 했던가?
<박화영>에선 가족을 부정하는 이들은 스스로 가족이 되어 서로를 모멸한다. ‘패밀리’라는 퇴행적 놀이를 통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위악의 근거를 조롱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탈선한 10대 무리에겐 사실 세상이 온통 적이다. 예외적으로 등장하는 영화 속 어른들은 하나같이 나약하거나, 추악하거나, 비겁하다. 영화는 커다랗게는 무책임한 사회를 그 배경에 두고 있긴 하나, 이를 직접적으로 영화에 끌어들이지 않는다. 특히 이러한 구조를 통해 에둘러 캐릭터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인물의 진정성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대체 이들은 인물로서 개연성을 갖고 있는가?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 불량한 청년들의 일상이 저다지도 선정적인 필요가 있을까? 대답컨대 <박화영>의 힘은 무리의 인물들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리얼리티에 있다. 그들은 창조된 허구에 인물이면서 엄연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자들이다. 난무하는 욕설과 폭력에 눈을 흘기기엔, 설득력 없는 센 장면의 연속이라 몰아가기엔, 진짜 현실이 강력한 알리바이로써 영화 저 너머에 버티고 있다. 그것을 현실의 하나로 인정하냐 마냐가 관객의 선택으로서 이 영화를 판단하는 혹은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이자 출발이 될 것이다.
<박화영>의 영화적 시간은 미정 대신 곤경을 겪은 화영의 현재를 기준으로 한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과거 장면은 4:3의 좁은 화면비율을 택했다. 꽉 막힌 화면 안에서 인물의 난삽한 생활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 속에는 어떠한 여유도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현재의 화면은 상대적으로 넓고 비어 있다. 단 몇 개의 컷으로 짧게 등장하는 현재의 시간엔 극악한 과거의 무질서를 찾을 수는 없지만, 박화영이 겪는 외로움이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더불어 여기서 진짜 엄마가 등장하는데, 엄마는 화영에게 돈을 건네고 방을 구해주나, 화영을 단 한 순간도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는다. 한때 칼부림까지 했던 화영에 대한 넌덜머리 나는 반감으론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현재의 시간에서 등장하는 공간은 인물의 정서를 종종 대변한다. 새롭게 살아갈 텅 빈 방은 화영이 상실감과 고독을, 엄마의 황량한 일터는 생활의 고단함을, 화영과 엄마가 만나는 편의점은 차 한 잔 나눌 여유조차 없는 메마른 관계를 은유한다. 과거의 신이 인물의 퍼포먼스로 극단적인 극을 이어간다면, 현재는 지금 박화영이 처한 상황을 말없이 보여준다.
한편 그녀를 철저하게 이용한 주변인들에게서 잔인한 사회의 우화를 발견한다. 오랜만에 미정과 재회한 후 박화영은 자신의 인생이 미정에겐 그저 불장난에 불과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박화영은 끝까지 각성하지 않는다. 박화영에겐 ‘가족’ 놀이는 벼랑에 놓인 자의 절박한 선택처럼 보인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 속에서 그것이 진짜이던 가짜이건 자신이 그리워했던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은 그녀에겐 거의 본능에 가까운 무엇처럼 보인다. 그러하기에 박화영은 또다시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퇴행을 반복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는 더욱더 기이한 슬픔이 동반된다. 다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의 반복은 어쩌면 새로울 수 있다는 기대 또한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