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혹은 어딘가의 비밀조직에서 위험한 실험을 한다. 유전자조작을 통한 살인병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가 일어나 탈주자가 생겨나고 실험은 중단된다. 도망친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어떤 짓을 하게 될까?
식상할 정도로 영화와 만화에서 많이 본 설정이다. 마블과 DC가 최고의 인기 장르가 된 지금은 대중적으로 친숙하다. 하지만 장르에서 익숙함이란 장점이 되기도 한다. 관객에게 익숙한 공식을 제대로 활용하면 몰입감이 높아지고, 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터가 된다. 너무 뻔하고 단순한 설정과 캐릭터와 플롯이라도 제대로 긴장감을 유지하고, 적절한 리듬을 유지하며, 확실한 볼거리를 만들어준다면 관객은 만족한다.
박정훈 감독의 <마녀>도 익숙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기억을 잃고 실험실에서 도망친 자윤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부작용으로 두통에 시달리며 가끔 의식을 잃기도 한다. 축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엄마가 치매를 앓는 상황에서 자윤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상금이 필요했다.
이후는 설명 안 해도, 영화를 보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자윤의 정체를 알게 된 누군가가 찾아온다. 친구를, 가족을 위협하고 마침내 자윤은 각성한다.
‘ㅇㅇㅇ 비긴즈’의 스토리는 거의 유사하다. 비밀이 있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위기가 찾아온다. 이미 힘을 각성한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낼 것인가 고민하는 슈퍼맨 타입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얻게 된 힘 때문에 흔들리는 스파이더맨 유형도 있다. 자윤은 어느 쪽일까. 아무 정보 없이 <
마녀>를 보게 되었다면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윤은 기묘한 마술을 부릴 정도의 특이 능력이 있지만, 신체적 능력은 오히려 허약에 가까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언젠가 각성을 하면 엄청난 파워를 보여주면서 고민에 빠질 것 같았다.
<마녀>는 지나칠 정도로 전반부, 각성 이전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리고 각성 이후를 보면서 알게 된다. 왜 지루할 정도로 자윤의 일상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는지. 단순히 반전을 위해서가 아니다. 장르의 공식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반전이 온다고 뻔히 예상한다. 하지만
박훈정 감독은 예상할 만한 반전을 틀어버린다. 좋은 연주가 되려면, 스탠다드를 반드시 자신의 방식으로 변주해야 한다. 반전에서 자윤이 내던지는 말 ‘솔직히, 기대 이상이네.’는 이미 반전을 예상하며 보던 관객들에게서 동시에 터져 나올 법한 말이다.
이미 영화가 개봉한지도 오래이니 스포일러를 하자. 자윤은 기억을 잃은 적이 없었다. 자신의 절대적 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부작용을 치료할 때까지 감추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불가능했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이 찾아오도록 자신을 노출했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에 선택한 결과다.
그렇기에 <마녀>의 최고점은 단연 캐릭터에 있다. 전반부에 지루하게 설명하며 쌓아왔던 자윤의 캐릭터는 전혀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반전을 맞이한다. 두뇌도, 육체도 절대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자윤은 남이 보기에 지루한 일상을 살아온 것이다. 자윤은 남친도 없고, 여성으로서의 욕망을 딱히 부여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자윤의 목적은 너무나도 확고하고, 낭비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평범한 단발에 넉넉한 교복 재킷 안 후드를 입은 소녀는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녀의 힘을 알게 된 후에도, 그녀의 이미지는 변색되거나 흩어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모든 이미지가 수렴된다. 자윤은 자신의 이미지를 능수능란하게 결정할 수 있고,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점이 있다. <마녀>는 젊은 관객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10대와 20대는 슈퍼히어로물에 아주 익숙하다. 만화적인 영웅 서사도 좋아한다. 이미 익숙한 이야기를 한국 배경으로 친숙한 배우들이 연기하는 영화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그런 점에서 <마녀>는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자윤의 캐릭터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웅이라고 할 절대강자다. 황비홍을 연상하기도 했다는 자윤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도 자윤에게 손끝조차 댈 수 없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강의 캐릭터를 먼치킨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도 <원펀맨> 같은 최강 캐릭터가 인기를 얻고는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호응이다. 과거처럼 보통 사람이나 약자가 노력을 하고, 기연을 얻고, 스승을 만나 절대강자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크게 인기가 없다.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은 절대강자이고 상대를 박살내는 이야기가 인기다. 사회에서 노력과 운만으로 성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알게 된 세대의 판타지라고나 할까.
<마녀>의 후반부는 심플하고 강렬하다. 각성하는 순간,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윤이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것은 결정된다. 누구도 자윤에게 대적할 수 없고, 누구도 능가할 수 없다. 자윤의 액션들은 멋지고 설득력이 있다. 어떻게 귀공자와 긴 머리 같은, 비슷한 살인병 기들을 제압하는지 충분히 보여준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하게 있다. 귀공자 팀과 미스터 최의 액션 장면들은 요령부득이다. 자윤만큼은 아니어도 압도적인 능력을 지닌 귀공자와 긴 머리 등은 미스터 최가 동행한 특수부대와 맞붙는다. 총을 겨눈 상대와 맞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압도적인 힘을 가졌다고 해서 아무 방어 없이 신체를 총탄에 노출시키고, 무작정 달려드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 귀공자 팀이 조금만 머리를 쓴다면 얼마든지 특수부대를 완벽하게 제압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체 왜.
미스터 최 역시 특수부대를 대동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무기도 특별하지 않다. 과거에 자신이 제압했던 아이들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일까? 자윤은 물론이고 귀공자나 긴 머리조차도 일 대 일로 붙으면 처참하게 박살 날 것으로 보이는데도. 자윤의 액션은 탁월하지만 다른 캐릭터들의 행동과 액션은 그저 하나둘씩 붙는 대결을 위해서 조작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윤의 각성 후 벌어지는 액션들은 충분히 흥미롭고 짜릿하지만 논리적으로는 너무 뒤죽박죽이다. 자윤이 없는 액션들은 전반부 이상으로 지루하다.
박훈정 감독은 ‘인간이 선하게 태어나서 악하게 변해 가는지, 악하게 태어나서 선하게 변해 가는지에 대해 항상 의문’이 있었다고 한다. 아직 <마녀>에서는 알 수 없다. 이제 자윤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뿐이니까. 그녀가 폭주할 것인지, 이성적으로 악을 처단하고 정의를 구현할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니 이미 그런 선택 자체가 너무 고루하고 뻔해졌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에서도 이미 보고 있는 권선징악의 작은 변주를 한국형 히어로물에서도 반복 학습하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