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 니체(『선악을 넘어서』)
차이콥스키
내 노트북의 바탕 화면은 대중적으로 비호감인 남자 배우의 사진이다. 내가 이 배우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 알 리가 있겠는가. 다만 그의 연기와 극 중 캐릭터를 좋아하고, 그가 쓴 글과 인터뷰를 인상 깊게 읽었을 뿐이다(나는 그가 독특한 사람이라고 짐작한다.). ‘바탕 화면 배우’ 말고 좋아하는 배우 두 명이 있는데, 그 두 사람 역시 마초 발언으로 논란이 많다. 여자 배우? 많은 여성 배우들은 위에 언급한 남자 배우들의 나이까지 ‘버티지’ 못한다.
나는 노트북을 켤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정말,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다. “페미니스트가 000을 좋아해?” 혹은 아예, “네가 컴맹이라 다운로드가 잘못되었나보다, 내가 바꿔줄게”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는 (아직은) 성폭행범도 아닌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우성 배우를 매우 좋아하지만, 모든 남자 배우가 그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긴, 이 역시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한국 사회는 난민 인권을 논하는 배우를 더 싫어할까, ‘문란한’ 배우를 더 싫어할까, 병역을 기피한 배우를 더 싫어할까. 모두 뇌관이다.
내 심정은 복잡하다. 일단, 내가 페미니스트인가? 라는 자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이 세상에는 내가 동일시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페미니스트가 존재한다. 그들의 입장을 존중하지만, 그들이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환경주의, 페미니즘은 모두 내가 추구하는 수많은 정체성 중의 ‘하나’일 뿐, 나는 특별한 정국(政局)을 제외하면, “ ~ 주의자”라고 자칭하지 않는다. “ ~ 주의자”는 선언한다고 획득되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 ~ 주의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감과 자기 검열을 잘 알고 있다. 어려운 일상의 연속이다.
예술가로서의 재능과 인간의 품성 사이의 간극에 관심이 많은, 나 같은 관객들은 고민한다. “작품은 좋은데, 그 감독 인간성은 00이라며?”, “난 그 배우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패스야. 배우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지”, “네가(나) 어떻게 그런 소설가를 좋아할 수 있니”... 흔한 논쟁거리다. 이것은 ‘타인의 취향’도 ‘정치적 올바름’도 ‘똘레랑스’도 ‘작가와 작품의 분리 논리’로도, 해결할 수 없는 제3의 정치학을 필요로 하는 이슈다.
위에 적은 내용에 비해 덜 논쟁적인 문제도 있다. 단지, 무지와 통념으로 인한 혐오로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다. 어떤 클래식 애호가(?)가 내게 물었다.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면서요?”, “그런데요?”, “저는 그다음부터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이 께름칙해요”, “그러세요? 그럼 듣지 마세요”. 나는 차이콥스키와 바흐 없이 살 수 없다.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서 그의 음악을 못 듣겠다면, 그 사람만 손해다. 아니, 음미할 자질조차 없는 거다(참, 세상에 별의별 사람 다 있다).
오스카 와일드, 트루먼 카포티, 안데르센, 소크라테스! <
주노Juno>(제이슨 라이트맨, 2007)와 <
인셉션Inception>(크리스토퍼 놀란, 20010)의 엘렌 페이지, 조디 포스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가 동성애자라서 ‘꺼려진다면’ 볼 책도 영화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이슈를 문제 삼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뭔데?” 이 말은 사이먼 페그가 나오는 영화의 실제 대사이기도 하다. 그가 뉴욕의 연예 잡지 기자로 성공하기 위해 애쓰다 실패한 이야기인 <
하우 투 루즈 프렌즈How to lose friends & alienate people>(로버트 B. 웨이드, 2008)에 나오는 말이다. 시드니 영(사이먼 페그 扮)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좌충우돌하다가, 뉴욕의 문화계의 거물을 찾아가 한심한 협박을 한다. “(기자인 나한테 뭔가 이득을 주지 않으면) 동성애자 배우, 모델, 감독, 작가들을 모두 아우팅 시킬 거다”. 상대방은 웃으며 말한다. “이 바닥에서는 거의 동성애자 아니면 유대인이야. 매장당할 사람은 당신이야”
가해자보다 더 나쁜
예술 분야뿐 아니라 정치인, 학자, 페미니스트 등 수많은 위인 중에서 인간성과 그의 업적이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인간성은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내를 학대했는지(톨스토이), 남의 업적을 가로챘는지(아인슈타인), 성차별을 일삼았는지(레닌), 자기만 지식인이라고 생각했는지(푸코, 보부아르), 비열한 연애로 상대에게 고통을 주었는지, 권모술수를 부렸는지, 표리부동했는지,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는지... 아니, 거의 대부분의 ‘위대한 서양인’들은 제국주의자들이다. 성폭력범은 너무 흔해서 이 논의에서 제외한다.
그런데, 맷 데이먼. 누가 그를 싫어할까. 그는 왠지 미국인도 제국주의자도, 심지어 ‘남성’도 아닐 것 같은 이미지다. 미투 이전까지, 맷 데이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2016년, 영화 <
제이슨 본Jason Bourne>(폴 그린그래스)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았던 그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자신이 맡은 캐릭터 해석과 영화 철학, 정치적 소신을 밝혔다.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다. 18살에 커리어를 시작해 구스 반 산트,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리들리 스콧 등 거장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알려졌다시피 글쓰기에도 능하다. ‘바람둥이’, 왕자병’ 스타일도 아니다. 특히, 그는 물 부족 국가의 여성들을 돕기 위한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www.water.org).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순전히 작품 자체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을 하니, 그의 영화를 다 봤다. 나는 제이슨 본 시리즈에 대해 ‘지구화 시대 국민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2편인 <
본 슈프리머시The bourne supremacy>(폴 그린그래서, 2004)에 대해서는 「목숨 걸고 사과하기」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상하게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안소니 밍겔라, 1999)마저 순수해 보인다. 알랭 들롱의 ‘리플리’(<
태양은 가득히Purple noon>(르네 클레밍, 1960)에서 주인공)와 다르다. 그의 인간성은 모든 캐릭터를 맷 데이먼으로 환원하여, 선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연기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가 최근 할리우드의 미투 운동 과정에서 연일 ‘말실수’를 했다. 아니면, ‘본색’일까. 그의 발언을 보자. “엉덩이를 토닥이는 것과 강간, 아동 성추행은 다르다.”, “영화 제작자까지 인종 다양성을 보장할 필요는 없다.”, “성 정체성은 편견을 줄 수 있으니 드러내지 않는 게 낫다”, “성추행을 안 하는 사람이 더 많다.”... 결국 일련의 발언으로, 여성들만을 주인공으로 한 <
오션스 8Ocean's 8>(게리 로스, 2018)에 카메오로 출연했으나, 2만 명이 넘는 여성들의 거센 항의로 편집 당했다.
‘평균 시민의 교양 미달’이라는 측면에서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저런 수위의 발언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게 큰 충격은 그가 (쿠엔틴 타란티노, 벤 애플렉 등과 함께) 지난 20년 동안 하비 와인스타인과 친분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와인스타인의 셀 수도 없는 성폭행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사실이다. 귀네스 팰트로의 전 남자친구 브래드 피트만이, 와인스타인에게 항의했다고 알려졌다. 더 심각한 문제, 아니 더 혐오스러운 데이먼의 범죄 행위는 그가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을 보도하려던 전직 뉴욕타임스 기자를 회유했고, 옹호 논리까지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맷 데이먼 자신은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이용해 와인스타인 같은 인물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성폭력 직접 가해보다 ‘더 질 나쁜’ 행위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마치 살인보다 살인 교사가 더 나쁘고 비리 재벌보다 재벌의 돈을 받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언론사, 회계사, 변호사가 더 역겨운 것처럼 보이는 심리처럼 말이다. 지주보다 마름이 더 ‘추잡’하다고 할까. 이런 나의 생각 역시, 스타의 이미지에 포섭된 미디어 시대 우중의 모습이고, 진짜 가해자인 와인스타인은 아예 제쳐 둔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불신, 문화적 억압이라는 또 다른 피해
배우는 힘든 직업이다. 지금도 활동 중인 노년의 배우가 있는데, 그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지지하는 TV 연설원이었다. 그가 노태우 후보를 지지한다면서 한 첫 마디는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요, 왠지 그 양반(노태우)이 좋습디다...”였다. 사실, 나는 그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그 느낌이 아직도 몸에 남아있다. 배우의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 노태우와 광주 학살 그리고 한국 사회의 군사주의와 군부에 대한 ‘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 이후 그 배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
배우나 작가가 모든 면에서 결점이 없을 수 없다. 마피아부터 파시스트까지, 그리고 그들을 스폰서로 둔 사례까지... 문제는 간단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좋아했던 배우의 영화를 더 이상 볼 ‘비위’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성폭력은 특별한 범죄다. 난 맷 데이먼을 잃었다. 이제 그가 출연한 작품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일과 비슷하다. 몇 년 전 세계적인 석학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우연히 나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안내 업무를 맡은 친구로부터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나는 그녀의 책을 읽지 않는다.
‘개념 매력남’인 줄 알았던 맷 데이먼에게 놀라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마크 러팔로도 의심이 간다. 게다가 그는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사실이 아니면 어떡하지? ‘더 나쁜 X’이면어떡하지? 사는 게 힘들 때마다 나는, <
인 더 컷In the cut>(제인 캠피온, 2003)의 러팔로 같은 남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환상과 <
유 캔 카운트 온 미You can count on me>(케네스 로너건, 2000)에서 러팔로의 빵구 난 러닝셔츠를 생각하면서 웃곤 한다. 나는 점점 <인 더 컷>의 맥 라이언처럼 편집증 환자가 되어갈 판이다. 차라리 스파이크 리처럼 대놓고 마초인 남자가 나을까.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영화의 캐릭터)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미투 이후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어졌다.
예술가의 인성과 작품 수준의 관계는 끝없는 논쟁거리지만, 나는 이에 대한 나름의 입장이 있다. 좋은 인간과 좋은 예술가는 모순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예술은 사회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선(善)의 기준은 대단히 넓고, 다면적이고, 맥락적이며, 인간은 일관되고 합리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선악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나쁜 사람의 작품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의 작품에는 반드시 나쁜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다. 혹은 위대한 작품에 대한 기준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변한다. 그러므로 생각보다 이 문제는 논쟁거리가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나 어린이를 학대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얘기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이런 사람의 작품은 논쟁을 넘어 논쟁의 가치조차 없다. 혹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보라.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조금이라도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가진 배우, 감독, 스태프 하고는 일하지 않는다(해고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스필버그에 대해 토를 달지 않고, 억울하다고 울고불고 하는 가해자는 없다.
그런데 왜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서만 논쟁이 분분할까. 이 자체가 젠더 폭력에 대해 관대하다는 얘기다. 성폭력은 그 어떤 잘못보다 엄격히 다루어져야 한다.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를 주지 않는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남성들의 반발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남성 사회는 스스로, 혹은 (피해) 여성 집단에 두 번째 기회를 줄 기회를, 주지 않는다. 부정하고 은폐하고, 가해자는 여전히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두 번째 기회가 웬 말인가.
맷 데이먼. 다시는 그의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아서 속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평범한 씨네필의 영화 사랑을 망친 그에게 분노한다. 내가 신뢰하는 어느 영화평론가는 이런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2004) 월드 프리미어 참석한 그는 서구 기자들에게 ‘치여’ 제대로 입장도 못하고 곤란한 처지에 있었는데, 관람권을 미리 확보가 ‘기득권 평론가’가 영화가 상영되자마자 코를 골며 잤다는 것이다. 극장 밖에는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고레에다의 영화를 보면서 코를 골고 잔단 말인가, 그것도 다른 이들의 관람 기회를 박탈해가면서) 솔직히 살의를 느꼈다.”. 내가 맷 데이먼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