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시대가 있었다. 라디오 드라마는 물론 영화 속 여배우들의 후시녹음, 문화영화의 내레이션 때로는 방송 진행까지. 영화와 방송계를 넘나들며 활동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고은정 선생일 것이다.
2009년 진행한 고은정 선생의 채록문을 보면 1950년대 인기 있는 라디오 드라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말투를 바꾸어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성격파 배우
노경희조차 영화 <
피아골>(
이강천, 1955)의 후시녹음 때, 당시 인기가 높았던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청실홍실>(조남사 작, 이경재 연출, 1956)의 전후파 여성 동숙(정은숙 연기)을 따라 말끝을 흐리며 대사를 했다고 하니 라디오 드라마와 성우들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던 셈이다.
고은정은 1954년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극회원 1기로 이력을 시작했다. 참고로 1947년과 48년에 1, 2기로
장민호, 민구,
최무룡,
윤일봉,
이혜경 등이 선발되었으나 후에 모두 특기로 구분하고 있다. 연기자 정체성이 전면에 드러났던 당대 성우들은 연극적 소양 또한 비중 있게 다뤄졌다. 학창 시절 인기였던 대학연극경연대회에서의 열띤 경합이나 성우들이 정기적으로 올렸던 연극 공연에 대한 회고, 그리고 아나운서로 잠시 활동했지만 연기에 대한 갈증 때문에 이내 성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연기력이 성우 활동의 바탕이 됨을 잘 말해준다.
고은정 선생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57년 <
산 넘어 바다 건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에서 상해에서 돌아온 30대 마담, 상하이 가에리 미라 역을 맡으면서다. 매일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습한 끝에 득음한 듯 귀가 트여 본인의 소리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즈음이다. 이어서 <
동심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8)의 경희, <
장희빈>(이서구 작, 박동근 연출, 1958)을 맡으며 대표적인 성우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인기 라디오 드라마가 영화로 만들어지던 시기
고은정 선생은 영화 <
동심초>(
신상옥, 1959)에서
엄앵란의 목소리를 더빙하며 귀엽고 사랑스러운 20대 여대생 경희의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이후 엄앵란의 목소리는 고은정 선생이 도맡아 하는데 이밖에도
김지미,
문희,
윤정희,
남정임,
정윤희,
안인숙까지 당대 내로라할 만한 여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는 모두 고은정 선생 차지였다.
성우들의 후시녹음 관행은 19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과거 한국영화계는 판권을 미리 파는 입도선매로 제작되었는데 입도선매의 전제가 특정 배우들의 출연이었고 이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유발했다. 겹치기 출연을 위해선 빠른 제작 속도가 관건이었다. 다른 작품의 세트에 앉아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불려 다니다보니 배우들이 대사를 외우거나 연기에 몰입할 시간은 당연히 부족했다. 이 때문에 후시녹음은 성우가 배우의 목소리를 입히는 작업이기보다는 촬영 현장에서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배우들이 못다 한 연기를 마무리해주는 작업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싫어 제대로 울지 않는 여배우의 표정에 속칭 된장을 풀어달라는 즉, 눈물을 쏟게 해달라는 요구를 들어줘야 했고 대사가 틀린 채 어영부영 넘어가는 입 모양에 맞춰 애드리브나 웃음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후시녹음된 영화에서 인물이 말꼬리를 흐리거나 대사를 반복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배우의 입 모양이 대사와 맞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보완한 경우일 가능성이 크다. 때로 촬영분의 부족으로 편집의 속도나 연속성이 맞지 않을 때면 컷이 바뀐 뒤에도 웃음소리를 유지해 연결을 맞춰주기도 했다. 후시녹음은 실로 성우들의 인공호흡으로 마지막 순간에 영화를 살려내는 과정이었다.
한국영화 제작 관행에 가려진 성우들의 ‘목소리’
후시녹음이 오랫동안 지속된 이유는 기술적인 제약과 더불어,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으로 단련된 성우들의 더빙 능력이 보여준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결과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후시녹음이 한국영화의 진보를 더디게 했다는 비난은 성우들이 더빙을 탁월하게 잘해주었다는 말의 역설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밤낮없이 녹음실에서 영화 더빙을 했고 심지어
고은정과
엄앵란,
이창환과
신성일 등 성우 배우 콤비가 공공연하게 회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 크레디트에 성우들의 존재는 남아 있지 않다. 한국영화 제작 관행의 특수성을, 영화의 완성을 인증하는 크레디트라는 공적 영역에서 부정해온 이 같은 ‘없음’의 증거를 다층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이 구술 채록의 후반작업일 것이다.
고은정 선생은1977년 MBC라디오 각본 공모에 당선되며 이후 방송작가로도 활동했고 <
위기의 여자>(
정지영, 1987)의 시나리오를 쓴 바 있다. 현재까지 서울예술대학 방송영상과 초빙교수로 후학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고은정 선생의 구술 채록문에는 1950년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방송과 영화계의 생생한 경험뿐 아니라 학도의용군 예술대원 생활과 부산, 대구, 제주도를 거친 고단한 피난생활을 문학소녀의 모험기로 도치시킨 6?25전쟁기의 이야기 또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