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인물은 당대에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이 말이 더욱 실감난다. 그때 내가 왜 이 일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을까,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 미비한 언급에 대해 확인하지 못했을까, 실례를 무릅쓰고 집안을 뒤져서라도 그분의 희귀 자료들을 얻어오지 못했을까. 그때 깨달았다면 불완전한 영화 역사의 한 조각이라도 더 메울 수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가슴을 저리게 한다.
안종화(安鍾和)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02년 서울에서 태어난
안종화 선생은 나운규와는 동갑이지만 영화계에서는 선배였다. 부산에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첫 작품 <
해의 비곡>(1924)에
이월화와 함께 주연을 맡고, 이후 자신이 끌어들인
나운규에게 데뷔의 기회를 준 <
운영전>(
윤백남 감독)에 출연했다. 하지만 1930년 <
꽃장사>로 메가폰을 잡으며 감독이 된 뒤 잇따라 <
노래하는 시절>(1930), <
청춘의 십자로>(1934), <
은하에 흐르는 정열>(1935), <
인생항로>(1937) 등 여섯 편을 내놓고, 광복 후에도 <
수우(愁雨)>(1948), <
나라를 위하여>(1949), <
춘향전>(1958) 등 7편을 연출하여 모두 13편을 남기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영화측면비사>(춘추각,1962)라는 귀한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경험과 주변의 얘기를 담은 이와 같은 주관적인 회고담은 객관적인 정사(正史)가 놓친 일들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맺은 인연의 끈
내가
안종화 선생을 직접 뵌 것은 제주도에서였다. 동국대학 3학년 때인 1959년 초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해 2월 월간 <사상계> 신인작품 추천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신출내기 시인이었다. 1년 전 <현대문학>과 경쟁하던 문예지 <문학예술>에 첫 추천을 받았으나 폐간되는 바람에 등용 지면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다소 들뜬 기분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참이었다. 이때 나는 ‘안종화 감독이 영화 <견우 직녀>를 찍기 위해 제주도에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종화 선생을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본 것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다닐 때였다. 그는 이웃에 있는 연극영화과의 교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분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다. 그저 막연히 한국영화 초창기에 활약한 영화인이라는 정도, 국도극장에서 본 <
사도세자>(1956)의 감독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이 영화에는 몇 달 전
전창근 감독의 <
단종애사>로 나란히 데뷔한
황해남과
엄앵란이 출연했다. 그들이 나 또래의 나이라서 더욱 관심이 갔었다. 나는 안 선생이 묵는 데가 서울여관임을 확인하자 무작정 숙소로 찾아갔다. 이 여관은 제주시 번화가 칠성통에 있는 남궁다방 바로 뒤에 있었다. 내가 서울여관으로 찾아갔을 때는 촬영 팀이 다음 날 예정된 로케이션에 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 가운데 조감독인
황학봉이 눈에 띄었다. 뒷날 영화 <
무기와 육체>(1968) 한 편을 내놓고 후속작을 기다리다가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다.
나보다 두 살쯤 위였지 않나 싶다. 가깝진 않았지만 다행히 서울에서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의 도움으로 마침 방에서 나온
안종화 선생을 뵐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시 쓰는 친구라며 영화에도 관심이 많다고 소개해주었다. 선생은 내가 서라벌예술대학을 다녔다고 하자 마치 제자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그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일반적인 예술가와는 다른 인자하고 기품 있는 선비의 모습이었다. 뒤에 확인됐지만 과묵하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스태프 가운데는
황학봉과 마찬가지로 뒤에 감독이 된
진천(陳天)과
김성수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각기 조명과 기록을 담당했다.
<
견우 직녀>는 당시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구전설화를
추식이 각색한 것이다. 출연진은
김삼화를 비롯한
이예성,
이경희,
김정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다음 날부터 이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무엇보다도 영화 촬영 장면이 궁금했고, 좋아하는 배우의 모습도 보고 싶었다. 진행상 도움이 된다고 믿었는지 안 선생은 나의 동행을 묵인해주었다. 첫 로케지는 북제주군에 있는 안덕계곡이었다. 화창한 여름날, 그늘도 없는 계곡 양쪽 벼랑에는 들백합이 만발했다. 계곡에는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흘렀다. 그만큼 물이 맑았다. 여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직녀(김상화)가 멱을 감다가 나무꾼에게 옷을 빼앗기는 장면이 촬영되었다. 그 배경은 나중에 찍은 천지연폭포 화면과 연결되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으로 한 달 가까이 제주에 머물며 촬영을 마친 <견우 직녀> 팀은 부산 서면의 로케이션을 거쳐 상경했다. 이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1960년 늦가을 명보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그러나 흥행엔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알게 된
안종화 선생과는 1960년대 중반까지 드물게나마 만날 수 있었다.
윤봉춘 감독과 공동 연출한 <
애정삼백년>(1962)을 촬영할 무렵에는 우연히 명동 거리에서 만나자 손을 꼬옥 잡으며 기대가 크니 열심히 하라고 격려까지 해주었다. 그 무렵 나는 영화평론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가슴 저리게 하는 것은 1965년 12월 20일 서울 YMCA홀에서 열린 월간 영화예술사 제정 제2회 영화예술상 시상식 때의 모습 때문이다. 선생은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유공영화인 패를 받기 위해 참석했던 것이다. 시상식이 끝나고 선생의 자리로 찾아가 인사를 하자 불편한 몸을 겨우 지팡이에 의지한 채 아무 말 없이 손만 꼭 쥐시는 것이었다. 이미 말을 잃은 상태였다. 초점이 흐린 그의 눈에 어느새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선생을 본 마지막 모습이다. 세상의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뒷날 내가 대학의 강의시간에 선생의 저술을 활용하고, 뒤늦게 찾아낸 <
청춘의 십자로>의 공개 자리에서 해설을 하게 될 줄을, 아니 이 작품이 근대 문화재로 등재하는 데 선정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리라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따지고 보면 안종화 선생 역시 제주도와 인연이 깊은 분이었다. 데뷔작 <
해의 비곡>을 촬영하기 위해 왔던 이 섬에 무려 35년 만에 다시 찾아와 <
견우 직녀>를 찍게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