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김지헌 - 각본

by.이정아(영화사연구소 객원연구원) 2015-11-03조회 3,830

<만추>(이만희, 1966)의 시나리오 작가인 김지헌 선생님을 만난 것은 2014년 생애사 구술을 통해서다. 1930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김지헌 작가는 광복 전 서울로 이주해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국립도서관에서 시나리오와 관련된 모든 책과 자료를 탐독하고 당대 최고의 감독인 최인규 감독을 직접 찾아가 영화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정도로 작가는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김지헌 작가는 시나라오 작가로 데뷔하기 이전에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다. 6.25 중 만난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종’이 실리면서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기 이전 상당 기간을 언론사에서 문화 담당 기자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폭넓은 경험이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는 동안 두루 자양분이 됐다고 김지헌 작가는 말씀하셨다.


영화의 동시대성을 고민하다

1958년 이병일 감독의 <자유결혼>의 각색을 맡으면서 시나리오 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이성구 감독 등과 함께 ‘신예프로덕션’을 설립해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세대로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정열없는 살인> <젊은 표정>(이성구, 1960) 등 신예프로덕션과 함께 한 작품에는 전후의 암울한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없이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세련되게 다루어졌다. 김지헌 작가는 세계 영화계의 경향을 동시대적으로 파악하고 한국영화도 세계 영화와 그 흐름을 같이 해야 할 것을 늘 고민하고 나아갈 길을 모색해왔으며 그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작가는 우연히 길에서 만난 이만희 감독이 들려준 일화에서 영감을 얻어 <만추>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한다. 단순한 이야기 구조와 인물이 물 흐르듯 만들어내는 깊은 정감과 정서는 <만추>의 시나리오가 영화 이전에 하나의 완성된 문학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추>는 김수용 감독, 사이토 고이치 감독, 김태용 감독 등에 의해서 다시 만들어졌는데 이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힘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가 영화의 진정성을 만들어내고 감독이 이를 영상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시나리오 작가의 역할이 영화의 토대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영화의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과거의 한국영화계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나리오 작가의 고뇌와 그들의 역량을 인정해주던 제작 환경이 있었음을 강조하셨다.


영화란 끝없이 ‘나’를 찾아가는 작업

이러한 의미에서 2013년 8월 출간된 <한일 대역 창작 시나리오 선집>(집문당)은 뜻깊은 의미를 지닌 책이라 생각된다. 작가의 대표작 5편이 실린 선집은 일본어로 번역, 한일 양국에 동시에 소개됐다. 책에는 <만추> 이외에 영화화가 되지 못한 작품이 다수 실려 있다. 일본의 중견 영화평론가인 사토 다다오(佐藤忠男)는 이 책의 서평에서 1969년에 씌어진 <돌이의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돌이의 전쟁>은 군사정권 시대에 반전적인 내용이라 영화화가 불가능했던 작품이다. 한국영화는 그렇게 검열과의 오랜 싸움 끝에 현재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사토 다다오는 영화화가 되지 못한 작품들이 씌어질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작품들을 통해 눈앞의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던 작가의 이상과 정열을 높이 평가했다. 또 다른 저명한 영화평론가인 우에노 고시(上野昻志)는 김지헌 작가의 작품을 시나리오라기보다는 문학의 길에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글을 쓴다는 것은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가로지르는 것인데 김지헌 작가는 이와 같은 물음에 정면으로 질문하듯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고 있다.”라고 평한 우에노 고시는 김지헌 작가의 작품이 시나리오를 넘어서는 작품성을 지니고 있음에 주목하했다.

2013년 8월에 출간된 <한일 대역 창작 시나리오 선집>은 한국영화계에서 50년을 몸담은 작가가 격동의 시대를 영화와 동고동락하며 쌓아온 열정과 이상을 담고 있다. 한국영화의 현재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는 책이라 생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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