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이지룡 - 제작

by.배수경(영화사연구소 객원연구원) 2015-11-02조회 1,901

멀티플렉스 극장이 들어선 1990년대 말에도 개봉작을 볼라치면 으레 종로와 충무로에 소재한 극장들을 찾았다. 그중 하나가 명보극장으로 5개의 상영관을 갖춘 쾌적한 시설과 주변의 오래된 맛집들 때문에 자주 찾는 극장이었다. 명보극장은 2008년 폐관돼 현재는 명보아트홀이란 이름의 공연장으로 운영 중인데 그중 한 관이 실버영화관으로 간신히 극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이 명보극장이 배우 신영균의 소유였다고 기억하는데, 그보다 앞서 명보극장을 세운 영화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세아영화사의 이지룡 대표다.

명보극장은 6?25전쟁 후 충무로에 처음 세워진 현대식 극장으로 개관일엔 당대 정치 실세이던 이기붕과 박마리아 여사를 비롯해 많은 귀빈이 족적을 남겼다. 사실 명보극장은 그 이름부터 이지룡의 역사가 묻어 있다. 극장 설립에 대한 기사가 나가고 극장 이름도 공모해 명성이라는 이름이 당선될 뻔했지만, 영화광이었던 자신의 청년기를 회상하며 함흥 출신인 그가 자주 드나들던 함흥 명보극장을 떠올려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당선시키며 붙인 이름이었다. 함흥 출신 서울시민에겐 가슴 뭉클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물론 29세의 나이에 거대 자본이나 의지할 만한 건 설사 없이 일단 극장을 세우고 보자는 아찔한 자신감은 그간 사업에서 승승장구해왔던 그의 이력을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는 함흥에서 대흥상업을 나와 함산금융조합에서 일했고 장사를 시작해 재미를 보려던 차에 6.25전쟁이 나 월남했다. 그의 청년기는 빠른 셈과 화술 등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확인하고 토대를 닦아가던 시기였다. 피난 시절 부산에서 창고업과 함흥냉면 장사로 대박을 터뜨리며 사업에 눈을 떠갔다. 휴전 즈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로 올라와 건설업에 몸담았지만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 무렵 외화 수입을 하며 친척이던 수도극장 부사장 이회극의 사무실을 드나들다보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이 몰려드는 극장 사업에 매력을 느껴 서서히 빠져들었다. 때는 마침 1950년대 중반으로 한국 영화제작의 르네상스기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극장을 짓기로 결정한 이지룡은 인맥이 있던 삼양물산을 투자사로 유치하고 고향 친구인 양봉식(연방영화사 부사장)과 합심해 수도극장 맞은편 332평의 소유주 17명을 설득해 부동산을 매입하고 고향 선배였던 서울시 도시계획 위원장 주원에게 추천받은, 프랑스 유학을 막 마치고 돌아온 건축가 김중업에게 설계를 맡겼다(사실 극장이 완공된 뒤 설계를 무시하고 건축해 설계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김중업이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공사를 맡길 건설사를 찾던 때 국회 부의장인 조경규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하여 국회 부의장의 추천을 받은 일신산업이 시공을 맡게됐다. 하지만 자본도 장비도 기술도 없던 일신산업은 공사비만 받고 삽질만 해놓은 채 철수한다. 공사는 중단된 채 자금은 떨어지고 건설사도 없는 위기 속에서, 파헤쳐진 땅 가장자리에 위험하게 위치한 박산부인과 원장은 이지룡에게 대림산업을 소개한다. 대림산업 이석구 대표에게 찾아가 다시 한 번 극장업의 밝은전망에 대해 피력하고 투자와 공사재개에 대한 약속을 받아낸다. 하지만 퇴로가 없는 상황에서 6대 4의 조건으로 대림산업이 더 많은 주식을 갖게 된다.

대기업의 횡포, 갑의 월권 등 익숙하고 예측 가능한 비극은 극장이 개관된 후 운영 체계가 잡혀갈 무렵 시작된다. 한동안은 영화계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전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명보극장이 개관할 때 지역구인 명동 주먹 이화룡(화성영화사 대표)이 직접 수표주임을 정해주는 업계의 전통(?)은 문외한이라면 이해하기 힘들지 않았겠는가. 이 수표주임이 동대문 주먹 유지광과 싸움이 붙어 신문지상을 시끄럽게 한 소소한 일화도 있었으니 극장 경영은 꽤나 다채로웠을 것이다. 대주주인 대림산업은 상무 양봉식을 해고하고 부사장이던 이지룡과 삼양물산을 몰아낸다. 결국 그는 투자금마저 회수하지 못한 채 명보극장을 떠난다.

이지룡이 그만두고 난 뒤 대림산업은 극장 공사비 허위신고와 입장세 포탈 혐의로 물의를 일으켰지만 그는 이미 떠난 뒤였기에 기억하지 못했다. 자유당 시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명보극장의 설립 이야기다.

“연출자가 뭐 하는데 밀어줘야지”
억울하게 퇴출당한 이지룡은 주식을 찾을 수 있다는 변호사의 말에 대림산업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한다. 하지만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헌법 적용이 일시 중지된 후 변호사로부터 사건을 덮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알고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 이지룡의 명보극장 이야기는 “…그래가 재수가 없었지”라고 담담하게 끝이 난다. 

그러나 이지룡은 영화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대명으로 영화제작에 뛰어들어1966년 아세아영화사를 설립한다. 영화사 이름답게 홍콩과의 합작영화도 7편이나 제작했고, 정창화 감독이 홍콩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도 했다. “정창화 감독한텐 내가 이긴 적이 없지, 연출자가 뭐 하는데 밀어줘야지”라고 말하는 이지룡은 정창화 감독의 영화를 가장 많이 제작한 국내 제작자이기도 하다. 정창화 감독과의 첫 작품은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5)인데 일제 말기 일본군의 버마전선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이다. 광릉수목원에 버마전선을 만들어 촬영한 작품으로 제작자와 감독이 미공보부에 들어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버마전선의 영상을 찾아 고증하고 일부를 복사해 영화에 사용하는 등 사실적이고 충실한 재현을 위해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작품이다. 정창화 감독이 쇼브라더스에 스카우트되는 계기가 된 영화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도 그가 제작한 작품이다. 첩보영화인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위기X7호>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제목을 바꾸라는 공보부의 요구로 <순간은 영원히>라는 다소 멜로스러운 제목이 붙게 됐다. 홍콩 유린영화사와의 합작품으로, 홍콩에서 로케이션을 하고 개봉한 이 작품을 본 쇼브라더스의 런런쇼는 이지룡에게 감독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이지룡은 정창화 감독에게 당분간 액션영화를 제작할 계획이 없으니 홍콩으로 가 기량을 펼치라고 홍콩행을 적극 권유했다.
이지룡은 1971년 <20인의 여도적>이라는 작품을 직접 연출했고, 1973년에는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를 일본의 고즈시마 섬에서 올로케로 제작했다. 1989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제작하며 노장의 면모를 보여준 뒤 1992년 은퇴한다.

이지룡은 흥남철수작전 때 서호진에서 간신히 수송선을 타고 월남한 자칭 ‘삼팔따라지’로 극장, 수입, 제작 등을 아우르며 영화계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짧은 지면에서 밝히지 못한 그의 다양한 활동은 채록문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구술자는 아세아영화사 이후 유림흥업, 다남흥업 등의 제작사를 만들며 1990년대까지 제작을 이어간 영화계의 산증인임에도 불구하고 면담자의 부족한 지식과 기술로 제작의 묘수, 합작의 묘수, 제작자와 언론 및 관료들과의 관계 등 제작 이면의 이야기는 자세히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들 혹은 말하지 않는 순간들이 주는 뉘앙스를 통해 추측하고 상상할 수 있는 여지와 재미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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