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최금동(최금동) - 각본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5-11-02조회 3,736
최금동

영화인 가운데서도 최금동(崔琴桐) 선생과는 아주 가깝게 지냈다. 나이는 나보다 두 자릿수나 많은 대선배였지만 동연배의 친구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이렇게 지내다보니 서로 비밀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둘만이 통하는 암호 같은 은밀한 지칭도 나누게 되었다. 가령 단골 다방이 있는 명동 거리에서 예쁜 여성과 마주치게 되면 선생은 나의 손등을 툭 치며 “조너스가 온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나는 으레 “그러네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자연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우리는 취향이 비슷했고, 작은 체구에 술을 마시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기서 ‘조너스’란 ‘좋다’는 표현과 ‘도너스’라는 명사의 합성어로, ‘좋은 도너스’란 뜻이다. 첫 자를 그대로 옮기면 “좋너스”가 돼 야한 비속어가 되므로 ㅎ 발음을 빼고 그냥 ‘조너스’라고 했다. 그 시절, 그러니까 1960년대 후반 명동에 도너스 가게가 생기며 도넛을 좋아하게 된 최 선생이 이를 연상해 붙인 것이다.

최금동 선생과의 떼어놓을 수 없는 인연은 1969년 나의 결혼식때 청첩인이 돼준 일이다. 지금은 이런 일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결혼 청첩에 양가를 대표하는 4, 5인의 청첩인이 들어가는 게 관례였다. 그래서 나는 신랑 측 청첩인으로 대학의 은사인 김동리(작가) 선생, 영화계의 유현목 감독과 함께 최 선생의 이름을 올렸다. 주례는 박목월 선생이 맡았다. 최 선생은 청첩인 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찍는 기념 촬영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내 곁에서 포즈를 취해주었다.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선생이 집필한 시나리오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유현목, 1965)의 주제가(박춘석 작곡, 최희준 노래) 작사자로 내 이름이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자신이 써놓은 노랫말에 나를 내세운 것은 “김형이 시인이기도 하니” 그리했다는 것이었다. 이제야 실토하지만 나도 그 뒤에 이와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다. 월간 학생 잡지 <학원> 편집부에 근무할 땐데 ‘지붕 없는 학교’란 제목의 사진소설을 최 선생 명의로 발표했던 것이다. 배우나 학생을 모델로 내세워 찍는 화보 형식의 소설이었다.

그는 문학청년적인 감성과 우국지사적인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다. 놀랍게도 그의 감성은 진부하지 않으며 민족의식 또한 보수적으로 기울지 않은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칠순이 가까울 때까지 연애 감정을 유지했고 실천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최금동 선생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아니, 역겨운 일, 눈꼴사나운 일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못했다. 남의 눈총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모난 돌임을 자처했다. 1960년대 극장가에 일본색 표절 영화가 범람하자 지상을 통해 ‘왜색 영화를 방화하라’고 외쳤고, 이익을 재투자하지 않는 영화제작자에게는 ‘몰염치한 전주(錢主)’라며 몰아세웠다. 그런 탓으로 그는 주위의 눈총을 받을 때가 적지 않았다.

1975년 3월, 내가 박정희 유신 정권 아래서 자유언론운동에 참여, 제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동료 30여 명과 함께 조선일보사의 기자직에서 해직됐을 때는 누구보다도 먼저 전화를 걸어 장차 일을 걱정하며 위로해주었다. 그런가 하면 설날에는 특유의 친필 연하장을 잊지 않고 보내주었다. 이렇게 최 선생은 1958년 처음 알게 된 이후 1995년 6월 5일 79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37년 동안 일관되게 강직한 성품과 섬세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한쪽 눈으로 감당한 작가의식과 민족정신
1916년 7월 3일 전남 함평군 상교면 대동리에서 태어난 최금동 선생은 어릴 때 본명이 거문고 금(琴)자에 아이 동(童)자 금동이었다. 형은 일곱 살 때 죽고 한말의 의병에 가담해 도망 다니던 아버지 때문에 그는 거의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이런 탓으로 그는 지겨울 만큼 이사를 자주 했다. 그러다보니 학교도 여러 번 옮겨야 했다. 이런 가운데 선천적인 백내장으로 한쪽 시력을 잃었다.

그는 동네 아이들로부터 ‘눈 병신’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완도보통학교와 경성예비학교를 졸업했다.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진학할 무렵, 이런 열등감에 자극받아 쓴 ‘누나’라는 글이 조선중앙일보에 가작으로 뽑혔다. 이에 힘입은 그의 문학적 열정은 1936년 이 학교 3학년 때 동아일보 제1회 시나리오 현상모집에 투고한 <환무곡(幻舞曲)>이 당선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시나리오작가로서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김유영(金幽影) 감독에 의해 <애련송(愛戀頌)>이란 제명으로 1939년 명치좌에서 개봉되었다. 내용은 그가 인상 깊게 본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악>(윌리 폴스트, 1933)의 경우처럼 젊은 음악가의 사랑과 시련을 그린 것이었다.

그는 중앙불교전문학교를 나오자 1937년 6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다. 이후 서울신문 사회부장(1945), 독립신문 편집국장(1947)을 거쳐 1949년 한성일보 편집부국장직을 끝으로 12년간의 언론계 생활을 마감한다.

광복 시기에 직장을 떠난 그는 최은희의 영화 데뷔작 <새로운 맹서>(1947)를 비롯해 <3.1독립운동>(1958), <8.15전야>(1959), <이름 없는 별들>(1959), <아아, 백범 김구선생>(1960), <유관순>(1961), <동학란>(1962), <석가모니>(1963), <이성계>(1967), <상해임시정부>(1970), <의사 안중근>(1971), <미처 못다 부른 노래>(1973), <팔만대장경>(1973), <에밀레종>(1974), <사명대사>(1980) 등 45년의 작가 생활을 통해 필름으로 옮겨진 오리지널 시나리오만 50여 편을 남겼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최 선생의 작품은 일제 지배 아래서 항일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의 활동상과 기미년 독립만세, 광주학생 항일운동 등 역사적인 사건과 존재, 그리고 투철한 국가관과 정체성을 강조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작품의 특징은 큰 스케일을 바탕으로 강렬한 주제의식과 민족정신을 추구한 것이었다. 그가 평소 영화 <아리랑>(1926)을 자주 언급하며 ‘춘사 나운규의 정신’을 강조한 점과도 무관하지 않은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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