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최하원(최승용) - 감독

by.김승경(영화사연구소) 2015-11-02조회 4,496
최하원

<독짓는 늙은이>의 감독으로 알려진 최하원 감독은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광복을 맞이했기 때문에 이전 세대의 감독들과는 달리 일본 문화를 많이 접하지 않고 자라났다. 대신 한국영화와 미국영화, 유럽영화 등을 보면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고, 역사소설에서부터 통속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한국적인 것과 인간의 본연의 모습에 관심을 가졌다.

초등학교 시절 문교부 편수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중앙청 인근으로 이사를 왔고, 당시 경비가 삼엄하지 않았던 경무대는 어린 시절 그의 놀이터였다. 1950년 농구선수가 되고 싶어 경복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채 코트에 서보기도 전에 6.25전쟁이 발발했고, 1.4 후퇴 때 아버지를 따라 제주도로 피난을 갔다. 폭격으로 폐허가 돼가던 서울과는 달리 제주도는 평화로웠고, 푸른 새싹이 돋아나는 따뜻한 곳이었다. 얼마 후 임시수도가 부산으로 정해지자 아버지는 최하원 감독만 데리고 부산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피난지 경복중학교에 복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임시로 지어놓은 천막학교에서 공부가 될 리 만무했고, 영화관을 찾아 장 콕도, 빌리 와일러 감독 등의 영화를 보고, 가끔 농구를 하며 지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환도해 본격적으로 농구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최하원 감독을 눈여겨본 국어선생님이 글을 써보라 권유했고, 그 말이 동기가 되어 농구부 생활을 접고 학교 연극부에서 활동하면서 작가와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다.

문예영화와 함께 시작된 영화 인생

제대로 된 영화 공부를 하고 싶어 유학을 꿈꾸던 최하원 감독은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해 테아뜨르 리이블과 연희극회에서 연출을 담당하면서 유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군에서 제대하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게 되는 등 유학을 가기에는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지 않았고, 대신 신경균, 이병일, 이성구 감독 밑에서 조연출로 일하며 본격적인 연출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 만난 작가 이상현과 작곡가 최창권은 영화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감독 데뷔 후 이상현 작가와 함께 한 작품은 없지만 열정 가득한 젊은 영화인으로서 영화의 본질과 비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했다. 또한 작곡가 최창권은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 중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지 않고,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수렴돼야 한다는 뜻을 공유한 동료로서 최하원 감독이 연출한 영화 대부분의 음악을 담당했다. 

군복무 중 <철둑> <무승부> 등의 시나리오로 영화전문잡지인 <씨나리오 문예>에 당선되기도 했던 최하원 감독은 그의 첫 번째 연출작으로 황순원 원작 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연출하기로 마음먹는다. 전쟁이 끝난 지 15년이나 지났지만 서울 곳곳에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던 1968년, 전쟁의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 채 후유증을 겪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또한 이론으로만 배웠던 몽타주 기법을 사용해 죄책감과 혼돈 속에 있는 주인공 현태의 심리 상태 등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 작품은 2014년 4월 구술 인터뷰 당시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 없는 작품이었지만 2015년 발굴되었고, 디지털 복원 작업을 거친 뒤 곧 일반에게 공개된다. 최하원 감독은 데뷔작을 통해 주목받는 감독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고, 이후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1960~1970년대 활동했던 많은 감독 중 소위 잘나간다는 감독들은 한 해에 5~8편까지 연출할 정도로 당시는 다작의 시대였다. 하지만 최하원 감독은 한 해에 1편 혹은 2편 정도만 연출했다. 당시 외국영화와의 격차를 인지하고 있었던 최하원 감독은 외국영화를 흉내 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정서를 잘 표현해 한국영화만의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소재 선정과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참여해 작품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나온 두 번째 작품이 <독짓는 늙은이>(1969)였다. 첫 작품에서 인간 내면의 혼돈을 표현하기 위해 흑백필름을 선택했다면 두 번째 작품에서는 ‘독’의 기본이 되는 ‘흙’의 느낌을 영화 전체에 흐르게 하려고 카메라에 황토색 필터를 끼우고 촬영했다. 또한 영화의 중심이 되는 송영감의 집(집과 작업장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개울이 흐르는 집)을 표현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결국 세 곳의 다른 장소에서 촬영한 것을 이어 붙여 완성했고, 이 작품은 평단의 호평과 함께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끊임없이 관객과 소통하다

이후 최하원 감독은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도 그것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문제와 시각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는 무속과 기독교 간의 대립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영화 <무녀도>(1972)에서는 무당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어머니 세대와 구세대와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고 하는 아들 세대와의 갈등, 한국 여인의 삶에서 늘 동반되는 ‘한(恨)의 문제’를 승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물을 다룰 때에도 이어지는데 <고백>(1971)에서는 혼전 성관계 문제를, <갈매기의 꿈>에서는 당시 한창 붐이 일던 미국 이민 문제를, <타인의 숨결>(1975)에서는 미감아 문제를, <마지막 포옹>(1975)에서는 청각장애아들의 모습을, <황혼>(1978)에서는 변화된 가족 간의 관계를, <절정>(1978)에서는 부부 간의 정절을, <겨울사랑>(1980)은 성범죄 문제를 다루고 있어 한국사회에서 문제시되는 이야기들을 영화를 통해 우회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실제로 전 출연진이 제주도에서 한 달 동안 연습하고 촬영한 <30일간의 야유회>(1979)는 당시 들어선 신군부에 대한 우회적 비판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다.

또한 <새남터의 북소리>(1972), <초대받은 사람들>(1981), <초대받은 성웅들>(1984)로 이어지는 영화들은 이전에 터부시돼왔던 종교영화의 예술성과 흥행성을 입증시키며 한국영화 장르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1984년부터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설립과 함께 교수로 부임해 10여 년 동안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보다 실용적인 이론과 살아 있는 제작교육을 위해 영화 서적을 번역하고, 집필하기도 하면서 한국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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