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전택이(전용탁) - 배우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5-10-30조회 2,669

전택이(田澤二) 선생은 영화도 다섯 편이나 연출했지만 감독보다는 배우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1958년부터 출연 짬짬이 제작을 하며 메가폰을 잡았으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리메이크한 첫 연출작 <애정무한>(1958)부터 마지막 작품 <홍도야 울지 마라>(1965)까지 그 연장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택이라면, 나이 많은 사람들은 <망나니비사>(김성민)의 참수인이나 <춘향전>(이규환, 이상 1955)의 방자 역을 기억하겠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오히려 뒤늦게 발굴된 광복 전의 <집 없는 천사>(1941), <사랑과 맹세>(1944)의 엿장수나 화물차 운전기사 역할을 더 가깝게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전 선생으로부터 들은 몇 가지 얘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가 1998년 3월 2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로부터 1년 전과 3년 전 두 차례가 된다. 처음은 그가 사는 충무로아파트(13평) 부근의 어느 다방이었고 그다음은 배우 김일해 선생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찍는 자리였다. 셋이 함께였다. 장충단공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처음 본 것은 1957년 대학 2학년 때였다. 영화인들이 자주 들르던 서울 명동의 나일구 다방이었다. 배우인 아내(노경희)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 때 받은 인상은 매우 깐깐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전 선생은 80대 중반에 들어선 말년에도 몸단장에 신경을 쓰고 기억력이 또렷했다. 쇳소리가 나기는 했으나 언어 구사도 정상이었다. 영화계에는 1935년 같은 해에 출발했으나 네 살 위인 김일해 선생에게 깍듯이 ‘형님’이라 부르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노령이라 몸이 불편한 데다 말이 어눌한 그가 기억이 흐려 말을 더듬을 때는 언성을 높여 바로잡아주곤 했다.

아무튼 그때 전 선생이 들려준 회고담에 따르면, 나운규의 <아리랑>(1926)은 7권. 45분 정도의 분량으로 1권이 900~1000자(尺)였다고 한다. 영사기는 수동으로 1초당 1자반 정도 돌아갔는데, <아리랑>의 경우는 18~20코마로 돌려 속도에 따라 50분이 넘을 때도 있었다. 주제가 가운데 ‘풍년이 왔네’라는 대목이 ‘좋은 세상’ 곧 ‘독립’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돼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폐병으로 기력이 떨어져 수염도 깎지 못한 채 연출한 나운규의 <강 건너 마을>(1935)로 데뷔하여 <아리랑 3편>에 출연하고 <불가사리>의 주인공으로 내정됐으나 <오몽녀>(1936)로 기획이 바뀌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며 아쉬워했다.

<아리랑>과 <풍운아>(1926), <들쥐> <금붕어>(1927)를 제작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사주 요도 도라조(淀虎藏)에 대해서는 경성촬영소를 운영한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조차 무시하지 못한 존재였다고 언급했다. 그가 조선키네마에 앞서 본정(충무로)에 개업한 모자점 ‘요도야(淀屋)’는 아내가 경영했는데, 요도는 아라시 조즈로(嵐寬之郞, 본명 아라시 조사브로) 주연의 연극을 유치하여 황금좌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고 새로운 사실을 들려주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설립하기 2년 전이었다. 연극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운규에게 발탁되어 <칠번통 소사건> <무화과> <강 건너 마을>(이상 1935), <아리랑 3편>(1936) 등에 출연하며 가까워진 여배우 현방란(玄芳蘭)의 그 뒤 행방에 대해서도 알게 해주었다. 나운규가 임종할 때까지 병상을 지킨 현방란은 장례식 때 참석한 전라도 출신인 애인 전씨(全氏)와 두 달 만에 살림을 차리고 아들까지 낳았다. 말년에는 치매증세를 보여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들과 수양딸이 찾아와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일흔 살이었다. 1995년의 일이다. 전 선생은 나운규의 여성관계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그중 하나가 1925년 극단 취성좌와 조선악극단을 거쳐 뒷날 한형모 감독의 <청춘쌍곡선>(1956)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방열(池芳烈)의 부인 강보금과 관련된 얘기다. 이 여자가 배우가 되고 싶어 나운규가 묵는 개성여관까지 찾아왔는데 어느새 서로 눈이 맞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방열이 그들이 묵는 여관을 찾아와 각목을 휘두르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이 자리에 있었던 전 선생이 일본도로 위협하여 나운규를 보호한 덕에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일화였다.

전 선생은 이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만큼 다혈질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뒷날 아내 노경희가 <인생역마차>(1956)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영화에서 신문기자와 암흑가 보스로 1인 2역을 한 이향과 입술을 포개는 키스신을 연기했는데, 그는 자신이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양해 없이 키스신을 연기했다며 이향을 찾아 충무로의 다방과 단골술집, 영화사를 찾아 나섰다.

어쨌거나 전택이 선생은 나운규 감독이 연출한 17편 가운데 열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말년의 작품 <강 건너 마을>로 영화계에 이름을 얹게 된다. 술장사를 하는 여자에게 빠져 남의 돈을 훔쳐 도망가는 농촌 청년 용수 역이었다. 이로써 그는 신일선, 이금룡, 윤봉춘, 전옥, 김연실, 유신방 등을 배출한 나운규 문하의 막내 격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후 <청춘부대>(1938)를 비롯한 <성황당>(방한준), <국경>(최인규, 1939), <망루의 결사대>(이마이 다다시, 1943), <출격명령>(홍성기, 1954), <실락원의 별>(홍성기, 1957), <>(김소동, 1958) 등 114편에 출연하고 1966년 이봉래 감독의 <무정가 1번지>를 끝으로 촬영 현장을 떠나게 된다. 그에게 돌아온 배역들은 주연보다 조연이 많았으나 대부분 활달하고 경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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