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주목 이 한편의 영화] 이해영 - 감독

by.김성욱(영화평론가) 2015-10-30조회 3,913
이해영감독

이번 <영화천국>이 주목하는 영화는 이해영 감독의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다. 2015년 6월 18일 개봉한 이 작품은 ‘1930년대’ ‘소녀’ ‘미스터리’라는 키워드만으로도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베일을 벗은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은 공포영화의 정석을 기대했던 관객의 예상과는 꽤나 달랐다. 낯익은 상징들로부터 출발한 이 기묘한 이야기는 어떤 상상을 하든 그 예상을 훌쩍 넘어서버렸고, 한국영화의 다양성에 일조했다는 평을 받으며 웰메이드 미스터리의 탄생을 알렸다. 익숙하지만 생경한, 비밀스럽고 강렬한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의 세계에 대해 이해영 감독과 김성욱 평론가가 긴 이야기를 나눴다.

일시: 2015년 6월 29일(수)
장소: 한국영상자료원
기록 및 정리: 민병현 전략기획팀 min@koreafilm.or.kr
사진: 이준구 포토그래퍼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성욱(이하 ‘김’) : 개인적으로 모든 장르의 영화를 잘 보는 편인데, 공포영화는 안보는 편이다. 군 시절 의무대 행정기록병으로 근무했는데, 당시 시신을 많이 봐서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겼고(웃음), 이후 공포영화가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오더라.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하 ‘경성학교’)은 보통 공포영화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 영화는 사실 감독 본인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모험적인 시도이기도 했다. 우선, 두 편의 전작(<천하장사 마돈나> <페스티발>)이 모두 동시대적 이야기였다면 이 영화는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일종의 역사극이다. 그리고 전작들은 ‘장르적 컨벤션’이 익숙한 영화가 아니었지만 <경성학교>는 장르가 명확한 영화다. 먼저 이렇게 <경성학교>의 시대적, 장르적 설정을 한 계기를 묻고 싶다.

이해영(이하 ‘이’) : 일단 <경성학교>는 결과적으로 공포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자. 사실 시나리오 작가 시절부터 전작 두 편을 연출할 때까지, 장르 컨벤션 자체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거친 적이 없다. 이거야말로 창작자로서 성실하지 못한 거구나, 반성이 들었다. 방법을 달리해야 영화를 더 오래, 더 내공 있게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장르라는 것을 직면하자. <경성학교>의 시작은 그랬다. 본격적인 호러영화를 꾀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장르가 조금씩 달라지고 다른 장르들이 더해졌다. 결국 장르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장르를 비틀고 뒤트는 복합장르물로 탄생한 셈이다. 그러나 이 장르적이면서도 탈장르적인 결과물이 장르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영화 속에 반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1930년대라는 시대는 기획 단계에서 매우 중요했다. ‘여자기숙학교, 미스터리한 일들’만으로는 기획 자체가 규정되지 않으니까. 심지어 ‘여고괴담’이라는 거대한 시리즈와의 차별점을 찾기조차 어려우니까. 이 모호한 설정은, 1930년대라는 시대 위에 두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영화로서의 틀을 갖출 수 있었다. 지금이야 <암살>도 있고 <아가씨>도 있지만, 이전까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편수도 적었고, 성공한 적도 없었다.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낯섦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오히려 기존 영화들과 차별되는, 새로운 색깔을 보여줄 수 있겠다 생각했다. ‘1930년대’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지만 나의 마음을 움직인 직접적인 도화선이기도 했다.

: <경성학교>와 관련해서, 예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두 편의 추천작을 생각하게 됐다. 그 하나가 <이블 데드>(샘 레이미, 1981)이고, 다른 하나가 <세일러복과 기관총>(소마이 신지, 1981)이다. <이블 데드>는 호러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잘 만든 솔직한 호러일까, 라는 궁금증에 선택했다고 말한 기억이 있다. 호러가 자신에게는 미지의 장르라 말했다. <세일러복과 기관총>은 소녀가 주인공인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면서 선택했다고 했는데(이: 맞다. 그때 <경성학교> 시놉시스를 쓰는 중이었다.), 교복 외에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어 보이지만(웃음), 후반부의 복수를 감행하는 그러한 쾌감의 순간이랄까, 이런 정서는 약간 닮았다고 생각한다.

: <세일러복과 기관총>은 기관총을 난사하는 소녀가 마침내 느끼게 되는 쾌감이 비중 있게 다뤄진다. 실제로 ‘쾌감’이라는 대사도 결코 잊히지 않는 방식으로 묘사되고. <경성학교>는 그와 정반대여야만 했다. 1930년대라는 시대적 무게감과, 생체실험이라는 다소 예민한 소재를 다룬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관객에게 통쾌한 복수극을 경험하게 하면 안 되고, 주인공 소녀 ‘주란’ 스스로도 후련하게 해소되는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란은 끔찍한 실험의 피해자고, 그녀가 벌이는 일련의 사건은 비극적인 폭주여야 했다. 결국 죽음으로 끝날 이야기였다. 금욕적이랄까. 폭주하는 액션을 연출하면서도 절제에 대한 강박이 많았다.

: 공포영화의 공포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어떤 끔찍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경성학교> 역시 강렬한 이미지가 있다. 바로 ‘물’이다. 물속에 잠긴 소녀들, 수족관에 물이 차오르는 장면 등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공포의 이미지는 금기를 넘어서게 할 정도로 강력하고, 이 이미지가 이야기에 아직 소환되지 못하고 급작스러운 직접성과 충격적인 진실성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실의 직간접적인 경험이 투영되는데, 이 영화에서 물에 잠긴 소녀들의 이미지는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4.16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 본격적인 호러영화를 목표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대표성을 띠는 공포 장면이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을 갖지는 않았다. 물론 관객이 무서워하거나 놀라기를 바라며 자극적인 장면들을 장치해놓기는 했지만, 영화는 결국 ‘소녀적’이라는 인상으로 남기를 바랐다. ‘물’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동원된 대표적 수단이었다. 영화에서 물은 여러 의미를 갖는데, 때로는 몽환적인 정서를 담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미스터리의 복선으로 작용하기도 하며, 주란과 연덕 두 소녀의 내밀한 우정을 묘사할 때는 성적 긴장감을 풍성하게 표현해주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말씀하신 대로 수장된 소녀들의 끔찍한 이미지로 귀결된다. 영화 속 ‘물’의 상징과 정서들을 따르다보면 불가피하게 4.16의 이미지가 연상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시나리오를 쓸 때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4월 16일 당시 나는 시나리오 작업을 마치고 프리프러덕션 단계, 그러니까 촬영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충격적인 뉴스였다. 막막했다. 그 위로 영화 속 설정이 자꾸만 오버랩되어 악몽에 시달렸다.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과도한 사회적 상징으로 해석될 여지만큼은 막아야 했다. 일차적으로는 물 설정 자체를 빼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워낙 대수술이었고 물리적으로 불가능이었다. 대안이 없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4.16에 대한 상징으로 손쉽게 동시대성을 확보하려는 얄팍한 태도를 절대로 갖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에서 4.16을 읽어낸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 그게 공포영화의 강점이면서 약점이다. 이미지가 불분명하기에 쉽게 장르 뒤에 숨어버리게 된다. 예전에 구로사와 기요시가 “공포영화는 장르를 규정하기 어렵다. 어떤 장르와 섞여도 공포영화가 가지고 있는 장르 자체가 변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던 말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공포영화에 코미디가 섞이면 코미디 영화가 되고, 사회문제가 얽히면 사회성이 짙은 영화가 된다는 것이다. <경성학교>도 마찬가지다. 관객들이 공포영화인 줄 알고 봤는데, 거기서 얻지 못하는 불만족이 컸던 것 같다. 다른 장르 안에 공포가 스며들어 있는 느낌이랄까. 그게 <경성학교>를 본 관객과 연출한 감독의 이질감이기도 하고, 큰 틀에서 공포영화를 장르적으로 만들어갈 때 부딪히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 동의한다. 전작들은 철저히 취향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는 많은 사회적 책임이 따르더라. 고심 끝에 장르를 고민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장르로 딱 떨어지는 영화가 아니다보니 아무래도 기대하고 오는 장르와 보면서 느끼는 장르 사이에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만들면서도, 마케팅을 하면서도 ‘공포’라는 장르를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러나 김성욱 선생도 인터뷰 초반부터 공포장르를 언급하셨고, 그 안에서 이 영화를 읽어내고 계시다. 이제는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숙명이라고 여기고 있다. 한 평론가는 이 영화의 초반부를 두고 ‘업계 표준’이라는 표현을 쓰더라. 전학 온 아이, 아이들의 괴롭힘, 자신을 도와주는 친구…. 익숙한 방식의 전개다. 앞부분은 의도적으로 과한 절제를 했다. 엄격하게 억압되어 있던 극의 분위기가 중반 이후 점차 사건의 본격화를 맞으며 깨지고, 비밀이 밝혀지고, 억압감이 해소되며 리듬감을 얻고, 빠른 호흡으로 마무리되는 방식으로 전체를 설계했다. 그러나 관객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초반부의 갑갑함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상대적 만족도가 훨씬 높았던 것도 약간 의외의 지점이었고. 결과적으로 감독이 바란 영화와 관객이 경험한 영화 사이에 간극이 존재했던 셈이다. 굉장히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 극중 시즈코가 과거의 시즈코(고원희)와 현재의 시즈코(박보영)로 둘이다. 그리하여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는 질문이 반복된다. 정체성의 혼란은 둘의 반복에서, 혹은 소녀에서 몬스터로 변하는 설정에서 계속 제기된다. 불분명한 부분은 과거의 시즈코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연덕이 편지를 자신에게 쓰라며 ‘네가 쓰고 보는 것도 너니까, 편지나 일기나 똑같아’라 말한다. 영화에서 일기는 중요한 설정이다. 일기 혹은 편지의 설정은 어디에서 근원했나.

: 애초 영화는 총 여섯 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챕터 구분의 기준은 일기장이었다. 과거 시즈코에 대한 조각난 기억의 기록, 일기에 적힌 글귀 등이 각 챕터를 리드했다. 연덕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를 여는 프롤로그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주란 중심의 명쾌한 이야기로 정리하자는 취지로 챕터와 프롤로그 모두를 없애면서 영화 속에 남아 있는 일기라는 설정은 끝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모호한 여지를 둔 채로 존재하게 됐다. 원래 의도와 달라지면서 근거나 설명이 축소된 게 제일 큰 차이일 거다. 그럼에도 일기는 여전히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두 소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되는 순간으로서도 존재하고, 주란이 연덕의 비밀을 풀어내는 결정적인 열쇠 역할로서도 기여하고 있다. 두 소녀의 존재를 중첩시켜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1930년대 소녀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꼭 담고 싶었던 화두였다. 타고난 태생적 정체성을 지우도록 강요받던 시절의 공기가 조금이라도 반영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달까.

: 퀴어 코드보다는 감독의 전작에서도 그렇지만, 소녀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들은 버려진 아이들이다. 심지어 교장이 후반부에 내뱉는 말, “인정받고 싶었다”라는 말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느끼게 한다.

: 주란은 끝내 연덕에게도 버려질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우정 혹은 사랑에 대한 갈망이 더 있었을 거다. 세상에서 버려진, 그 누구에게도 손을 뻗을 수 없는 소녀가 마지막으로 찾은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 “너만 있으면 돼”라는, 집착에 가까운 우정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주변 인물인 유카(공예지)와 과거의 시즈코의 존재 역시 주란이 연덕을 더욱 원하게 만들도록 설계되었다. 만약 내가 욕심을 좀 더 냈다면, 지금보다 훨씬 감정에 치중한 ‘소녀드라마’에 공을 들였을 거다. 실제로 완고가 되기 전의 시나리오는 소녀들의 질투와 우정, 사랑 등에 대한 드라마 비중이 높았었다. 그러나 대중성을 염두한 수정 작업이 거듭되며 최소한으로 축소되어 현재의 수준이 됐다. 드라마가 단출해졌으므로 인물마다 명확한 키워드를 부여했다. 예컨대 주란은 나약함, 버려짐, 의존적, 그리고 맹목적인 애정에의 갈구…. 연덕은 조각난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그래서 끝내 마음을 열지 못 하는, 비밀을 가진…. 유카는 명확하게, 질투.
교장 캐릭터 같은 경우는, 중반을 넘어서며 그녀의 속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왜?’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입장을 총정리하고 압축한 단 하나의 단어가 필요했다. 1930년대 조선의 신여성, 지식인이었던 그녀의 유일한 욕망. 그녀를 끝까지 질주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이유. 결국 내가 내린 답은 ‘인정욕’이었다. 이걸 말씀대로 ‘사랑에의 갈구’라고 읽는다면 결국 교장부터 주란, 연덕, 그리고 모든 소녀까지 공통된 정서로 동일한 맥락 위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식의 해석이라면, 창작자로서 만족스러운 일이다.

: 교장 캐릭터가 독특했던 것은 아마도 <경성학교>가 처음으로 악인이 등장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주로 선과 악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서 긴장감을 가지는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이 전작들이다. 이 영화는 장르적 외피를 갖게 되면서 악인이 등장한다. 극중 박보영이 ‘도쿄에 가고 싶다’고 말할 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원 씨가 ‘이끼나사이(가봐)’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특별한 캐릭터가 부각된다.

: 교장의 비중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사실 교장이 등장하는 신이 많지 않다. 편집 과정에서 교장의 비중이 높아지니 엄지원의 존재감이 강해서 전체 균형이 깨지더라. 하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인물이라 존재감이 너무 없어도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이 부분은 배우 엄지원의 역할이 컸다. 엄지원은 사전 준비가 무척 철저한데, 세 줄짜리 대사를 36가지 정도의 버전으로 준비해오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현장에서는 본인의 준비 여부와 무관하게 감독과 대화를 하며 협의하는 것을 즐긴다. 캐릭터 자체는 등장할 때마다 인자한 얼굴 너머 뭔가 있을 것만 같은 긴장감을 주는 인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자한 가면 그 자체에도 매번 진심이 느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란과 눈을 마주치고 신뢰를 주는 미소를 지을 때에도, 치유를 위한 처방을 할 때에도, 혹은 소녀들을 감금하고 숨통을 끊어놓을 때조차. 모든 순간이 진심인 여자였으면 했다. 어떤 일을 하고 있건 그때마다 진심인 사람, 얼마나 섬뜩한가.

: 많은 이가 <경성학교>를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1976)와 비교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분노의 악령>(브라이언 드 팔마, 1978)과 가깝다고 느꼈다. 물론 <캐리>의 전반적인 설정, 이를테면 사춘기 소녀의 성장, 초자연적인 능력, 그것으로 인한 파멸의 이야기가 유사하긴 하다. 하지만 주제적인 측면에서는 <분노의 악령>에 나오는 차일드리스(존 카사베츠)가 <경성학교>의 교장과 가깝다. 아이를 괴물로 키우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제하여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려 하는 인물이 바로 차일드리스다. <경성학교>의 교장 역시 소녀들의 초자연적 에너지를 자신이 원하는 곳에 사용하려 한다. 두 영화 모두 괴물성을 통제하려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괴물이 된 소녀들. 하지만 두 영화의 차별점은 <경성학교>의 후반부에서 소녀의 초자연적 에너지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장르적 변화가 도리어 <경성학교>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 만큼 여러 레퍼런스가 언급됐다. 그중에서도 <분노의 악령>이 어쩌면 언급된 영화 중에서 유사점을 좀 더 많이 발견할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경성학교>는 중후반부에 이르러 펼쳐지는 다른 색깔들로 그 모든 영화와 차별점을 갖는다. 나는 그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아까 말했듯 ‘업계 표준’이라고 부를 만큼 익숙한 것들의 조합으로 진행되지만 마침내 끝내 새로운 이야기인. 다만, 중반 이후 장르의 변이가 발생하고 종국에는 복합장르물로 끝맺음된다는 정보가 관객에게 미리 알려질 기회가 없었다는 것은 걱정이었다. 대부분 ‘업계 표준’처럼 관성대로 진행될 관람이 아니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197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에서는 괴물이 된 아이들이 많이 등장한다. <엑소시스트>(윌리엄 프리드킨, 1973), <오멘>(리처드 도너, 1976)에서 <캐리>와 <분노의 악령>까지. 1970년대 전쟁, 살인, 암살을 지켜보았던 아이들의 분노의 에너지가 이런 식의 ‘몬스터가 된 아이들’로 표현된다고 생각하는데, <분노의 악령>은 그런 괴물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시도에 반발하는 이야기다. <경성학교>도 이와 유사하게 봤다. <경성학교>는 ‘이상한 방식으로 4.16을 경험한 아이들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아이들이 받아들일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게 했다. 교장이 주란에게 훈련을 시킨다며 헤드폰을 씌우고, 백색의 동그란 스크린을 보게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분노의 악령>에서 아이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트라우마를 통해 계발하는 장면처럼, 이 장면은 백색의 스크린과 이상한 소리들로 표상되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한다.

: 1930년대를 기준으로 생체실험을 할 때 어떤 방식이 있을까를 고민했다. 약물이나 차, 혹은 향 같은 전통적인 것과 차별되는, 이질적인 설정을 하나쯤 넣고 싶었다. 교장이 씌워준 헤드폰에서는 신호음 같은 삐- 소리가 나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그 안에는 소녀들의 절규가 기괴하게 섞여 있다. 이게 반복적으로 주입되면 어떤 소녀는 이명과 함께 부작용을 일으켜 발작으로 이어진다. 주란도 이명과 몇 가지 부작용을 얻게 되기는 하지만 찰나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개념이었다. 말하자면 뇌파를 자극한다, 같은 거다. 이 신에서의 사운드 디자인은 몇 가지 버전을 반복 시도하며 공을 들였다. 관객들도 어느 순간 넋을 놓고 ‘알 수 없는 먹먹함’에 압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 마지막에 주란과 연덕이 축음기를 고치고 함께 음악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관객들에게 음악을 들려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 기본적으로 여자 보컬이길 바랐다. 꼭 1930년대 음악이 아니어도, 다소 현대적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많은 음악을 들었고, 구체적인 레퍼런스도 정해놓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구현하려다보니 문제는 ‘언어’였다. 가사가 한국어여도, 일본어여도, 영어, 혹은 제3국 언어여도 정확하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고민 끝에 음악을 들려주기보다 특정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래서 두 소녀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 저수지로 함께 달려가며 즐거움이 충만했던 그때 흐르던 음악을 삽입했다. 화면이 암전되는 순간 숲을 달리던 두 소녀의 밝은 웃음이 기억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차기작은 어떤 작품을 준비하고 있나?

: <경성학교>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차기작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고민이 많이 된다. 더 신중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동시에 이럴수록 더 저질러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와는 정말 다른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놓지 못하고 있던 것들, 이를테면 우아함에 대한 강박, 훌륭한 감독 코스프레(웃음) 같은 껍데기. 이번에도 그런 것들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나를 부수고 싶다. 작정하고 치열해질 거다. 괴물 같은 영화를 만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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