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남미리 - 배우 - 소심한 남정네들을 기죽이는 ‘나쁜’ 그녀

by.김한상(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 2015-04-17조회 1,964

임권택 감독의 스릴러 영화 <속눈섭이 긴 여자>(1970)의 한 장면. 옛 애인으로부터 남편에 대한 의혹을 들은 숙진은 빈 집에서 정적 속에 나타난 검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놀라고 곧이어 묘령의 여인의 방문을 받는다.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한 그녀, 자기 이름을 전하면 남편이 알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남편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의혹에 시달리는 숙진의 불안한 심리는 정적을 깨는 두 검은 존재에 의해 편집증적으로 증폭한다. 이 검은 방문자, 도발적인 눈빛에 연갈색 피부를 한 그녀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남미리(南美里)다. 남미리가 맡은 미아는 ‘방탕’한 생활과 범죄를 저지르고도 끝까지 반성적인 면모라고는 찾을 수 없는, 뼛속 깊이 ‘나쁜’ 여자다. 매사에 무관심하고 권태로운 듯이 도도한 남미리의 표정은 그런 캐릭터에 힘을 실어 넣는다.

이처럼 나쁜 여자이거나 ‘타락’한 여자, 혹은 남자의 통제 아래 머무르지 않는 여자로 등장하는 남미리의 얼굴은 1960~70년대 영화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주연급으로 출연한 영화가 많지는 않아도 그녀의 독특한 인상과 연기는 그 대부분의 영화에서 짙은 잔영을 남기고 있다. ‘스타일’이 망가지는 것이 싫어서 피임도구를 사고 남편이 꺼리는 가족계획을 하는 한순(<신식할머니>), 약속에 늦은 상대를 바람맞히고 그의 경쟁자와 데이트에 나서는 클럽 댄서 유미(<폭풍의 사나이>), “사내한텐 아예 반하면 안되는” 세상의 원리를 잘 알아 남자에 냉소적인 터키탕 여성 순희(<육체의 문>), 그리고 게이샤로 변장을 하고 상대남에게 독이 든 술을 먹이는 “홍콩의 요화” 유미(<홍콩에서 온 철인 박>)는 모두 남미리였기에 가능한 캐릭터들이다.

그녀가 이렇게 인상적인 역할들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방탕과 순정의 양극에서 번민하는 여인상”을 연기하고 싶다는 배우 본인의 개성 있는 연기관 덕분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외적으로 그녀가 지니고 있던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이화여대를 중퇴하고 외국 유학을 했다는 경력은 그녀에게 단지 ‘지적인 여배우’ 정도가 아니라 경계 바깥의 문물에 대해서도 이미 남성들보다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위험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한 것 같다. 더구나 그녀는 데뷔 초기부터 이미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의 전속 모델로 유명했으며, “아름다운 각선미” 등으로 (소위 ‘순수함’과는 반대편에 있는) 육체파 스타라는 평가도 받고 있었다. 후기작에서 암흑가의 마담이나 클럽 댄서 역할을 유독 많이 맡았던 것은 이렇게 쌓여온 ‘일탈’의 이미지가 그녀에게 각인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케도 만든다. 아마도 도전적인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 남미리 본인의 과감함과 그렇게 자신감 있는 그녀를 ‘경계 밖의 여자’로 한정지으려 했던 집단적인 무의식이 만난 결과할 것이다.

영화 데뷔 전 대만 동오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그녀는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것으로 유명했고 실제로 제16회 아시아영화제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 중국어 실력과 대만 유학 경력이 그녀에게 ‘중국통’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것인지 남미리는 영화에서 중국인 역할을 종종 맡기도 했다. <여마적> <홍콩에서 온 철인 박> <인간 사표를 써라> 같은 영화에서 치파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한·홍 합작영화 <사랑의 스잔나>에서는 홍콩 가수 진추하의 어머니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녀의 중국어 실력은 <인간 사표를 써라>에서 짧게나마 볼 수 있다. 

영화배우 활동을 하는 도중에도 모델로서 신문·잡지에 ‘가을의 모드’, ‘직장여성 옷차림’ 같은 패션사진을 선보였으며, 1963년에는 ‘영화배우의 브라운관 화면 진출 제1호’로 KBS 일요연속극 <아내의 얼굴>에 출연했다. 최근 일반 슈퍼 판매 문제로 화제가 되었던 모 드링크 음료 광고모델로도 유명세를 얻었다. 영화계에서 은퇴 후 한동안 문화방송 근처에서 살롱을 경영했고 지금은 호주로 이민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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